[송영옥 박사 기독문학세계] 밥 딜런과 미국의 꿈, 인간의 꿈(5)
물질만능주의는 몸과 쾌락을 앞세우면서, 정신과 절제를 뒷전으로 밀어 냈다. 물질적으론 풍요로웠지만, 정신은 빈곤했다.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에서 이 시대에 타락한 미국의 꿈을 고발함과 동시에, 데이지에 대한 이상과 환상으로 본래 미국의 꿈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가 제시한 이상과 환상은 새로운 구원의 방법으로 어쩌면 이 시대의 '문화 자본'에 대한 암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데이지는 그가 난생 처음으로 알게 된 '우아한' 여자였다. 그는 온갖 숨겨진 능력을 발휘해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만나긴 했지만, 그들과의 사이에는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철조망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런 부류'란 물질적으로는 부자이지만 그 정서적·미적 기아 상태의 사람들을 말한다. 헨리 루이스 멩켄(1880-1956)은 그 같은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컨트리클럽에 우글거리는 겉만 번지르르한 야만인들, 저 영국 귀족을 흉내내는 골판지 상자들"이라고. 헨리 루이스 멩켄은 독설형 저널리스트로서, 자기 만족에 빠진 미국의 청교도적 중산층의 속물근성을 여러 면으로 비판한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자신의 자화상 같은 개츠비에게 '아메리칸 드림'의 부활을 투영하고자 했고, 이는 개츠비의 위대성에 대한 논란과 맞물리게 된다.
글의 전개를 위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사실 개츠비와 데이지라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는 흔하고 단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츠비가 위대한 것('Great Geysby'인 것)은 과거까지도 되돌려 놓을 수 있다고 보는 그의 희망에 대한 집념과 재능 때문이다.
물질만능의 시대에서 그의 목적은 이상인 데이지를 다시 찾는 데 있었고, 물질은 그 수단에 불과했다. 본능보다 정신의 중요성을 상징함과 동시에, 이상에 대한 순수성과 진정성을 의미한다.
물질적으로 민감하나 낭만적으로 둔감한 시대에, 그는 보기 드물게 낭만적으로 민감했다. 낭만적 민감성의 화신이라 할 개츠비는 파멸의 예감에서 비롯되는 미학적 숭고함을 지니고, 전 생애에 걸쳐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집념과 좌절을 보여준다. 개츠비는 변질된 미국의 꿈의 실재이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물질적 성공은 어디까지나 변질된 미국의 꿈이거나, 기껏 해야 그 꿈의 작은 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참다운 미국의 꿈은 다분히 정신적인 것임을 초록의 불빛 또는 데이지의 이미지로 살려 나간다. 어쩌면 메이플라워 호에 청교도들을 싣고 뉴잉글랜드에 도착한 윌리엄 브레드퍼드가 말하는 위대한 계획이 바로 이 꿈의 정수 가 아닐까 싶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바라보고 본받을 수 있도록, 신대륙에 '언덕 위의 도시'를 세우는 것이 그들이 품었던 위대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청교도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그 '초록의 꿈'은 개츠비의 너무나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운 죽음과 함께 상징적 빛이 사라진다. 그리고 피츠제럴드는 1940년 12월 할리우드의 한 아파트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유작 <마지막 거물(The Last Tycoonn)>이 에드먼드 윌슨의 편집으로 출간된다.
그로부터 5개월 후 밥 딜런(Bob Dylan, 1941. 5. 24-)은 로버트 앨런 짐머맨(Robert Allen Zimmerman)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미네소타 주 덜루스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그의 종교적 이름은 샤브타이 자이셀 벤 아브라함이다. 그의 가정은 당시 그 도시에서는 드문 유대계 가문이었다. 조부는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에 이민왔던 인물이었다. 가톨릭 신자가 다수였던 마을에서 유대인은 소수민족으로 왕따를 당했다.
때는 세계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국은 전쟁에 참전했고, 4년 뒤인 1945년 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전쟁은 끝난다. 그러나 동서 냉전이라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