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교과서’ <굿 모닝> 번역한 윤득형 교수의 조언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상실은 누구나 겪는다는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상실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잘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우리가 상실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우리는 상실의 현존 안에서 어떻게 평안을 찾고 살아가야 할지는 배울 수 있다. 애도의 과정은 이러한 평안을 제공해 준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 책 <굿 모닝(Good Mourning)>은 우리가 깊은 상실에 직면했을 때, 제목 그대로 '좋은 애도(good mourning)'를 통해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고, 잃은 것으로 인해 생긴 지속적 공허감을 안은 채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특히 심리학 이론보다 기독교 신앙 관점에서의 실천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어 상실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하기 좋은 책이다. 책을 번역한 각당복지재단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 회장 윤득형 교수를 만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윤득형 교수는 <슬픔학개론>을 썼다.
-먼저, 번역하신 책 <굿 모닝>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저자인 알렌 휴 콜 박사님은 목회상담학자입니다. 텍사스 장로교신학대학교에서 목회상담학 교수를 하다, 2년 전부터 텍사스 대학교 사회복지학부 부학장으로 가셨습니다. 이 분의 관심은 슬픔과 애도, 인간의 불안과 실존에 관한 문제들입니다.
이 책은 미국에서 지금까지 나온 목회상담 계통의 슬픔치유 관계 도서 중 가장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논문을 쓰면서 2015년까지 출간된 목회상담 분야의 슬픔치유 서적들을 모두 조사했습니다. 이 책은 비교적 최근에 나왔을 뿐 아니라, 슬픔 치유에 대한 이론을 말하면서도 일반 사람들이 읽어도 될 정도로 쉽습니다.
저자는 성도들로부터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읽을 만한 책'에 대한 많은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써 보기로 했답니다. 슬픔을 당한 이들이 직접 읽기 좋으면서도 지금까지의 학문적 배경들을 빠트리지 않고, 슬픔의 과정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이를 어떻게 잘 겪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굿 모닝>은 제목 그대로 '좋은 애도'입니다. 어떻게 좋은 애도를 잘 겪어낼 수 있을까요? 저자는 '극복한다'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슬픔을 극복한다는 게 아니라, 애도의 과정을 잘 겪어 나가는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이 책이 다른 책들보다 탁월한 이유는, 구체적인 방법을 서술했기 때문입니다. 슬픔 치유를 위한 전략, 애도의 전략 등입니다. 기존 도서들은 개념 설명에 있어 다소 모호한데, 이 책은 학문적 입장에서 이를 굉장히 명확하게 제시해 줍니다.
저자는 감정적 재배치 중 '공간적 재배치'가 있다고 합니다. 감정은 고인에 대한 생각들을 언제든지 추억하며 기억으로 불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 삶을 지배하거나 압도하지 않을 수 있도록 '공간'을 두라는 것입니다. 추모의 공간, 기억하며 회상하며 묵상할 수 있는 공간들을 말합니다. 묘지를 비롯해 고인이 평소 좋아했던 장소나 가까운 박물관, 카페, 하다 못해 집 옥상이나 교회 등 어디라도 고인을 추모할 만한 장소를 찾아놓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해 준 것이 큰 공헌입니다.
또 이 책은 특별히 '심리학'이라 할 만한 부분이 없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목회상담 쪽에서 슬픔치유 이론을 다루면, 대부분 그대로 심리학 이론을 수용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심리학적 이론보다, 기독교 상담적 영성과 기도, 예배와 성경 말씀 등을 실천하는 것이 슬픔에서 얼마나 위로를 주고, 그 과정들을 잘 겪을 때 좋은 애도에 도움이 되는가 등 기독교적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그리고 이론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굉장히 폭넓고 쉽게 '이렇게 해 보라'는 방법까지 제시해 줍니다.
-국내에 '슬픔학'을 소개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슬픔학'이란 지난 2015년 <슬픔학개론>을 쓰면서 만들어낸, 어디에도 없는 말이다. '건축학 개론' 같은 느낌이 나는 전략도 있었지요(웃음). 대부분 '슬픔학'을 어떤 학문의 좁은 영역으로 여길 뿐, 학문적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슬픔을 다루는 것은 상실과 애도를 다루는 입장에서 필요합니다. 모든 상실과 슬픔에 대한 상담이라고 할까요. '애도상담'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됐는데, 슬픔학과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애도학'이라는 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슬픔학개론> 서론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상실로 인해 겪는 슬픔들 속에서 의미를 찾고, 단순히 그 슬픔 자체가 아니라 슬픔의 과정들을 잘 겪어 나가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새로운 삶으로 전환하면서 삶을 다시 바라보는 관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슬픔의 미학'이라 할 수 있는데, 슬픔학을 간단히 설명한다면 이것입니다. 신학, 철학 등 단위가 큰 다른 학문과 비교하면 작은 영역일 수 있지만, 슬픔과 애도도 분명한 학문적 영역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학문적 영역과 이론 안에서 제대로 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위로의 방법을 몰랐기에 제대로 위로해 주지 못했고, 위로해준답시고 상처를 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애도상담이나 슬픔에 대한 이론을 잘 몰랐기 때문에, 자신들의 방식대로 행한 것입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호스피스는 호스피스로서 각자 위로하다 보니 정작 크게 위로가 되지 못한 채 상처에 노출되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뒤 제가 하고 있는 것이 애도상담 전문가 양성 과정입니다. 4학기째 하고 있는데, 한 학기는 이론을 배우고 한 학기는 훈련을 합니다. 아직 출판하진 않았지만, 사별 가족을 위한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8회차로 만들었습니다. 이론에 기반한 프로그램을 통해 집단상담에서 치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이론 없이 그냥 자기 생각과 노하우로만 상담을 한다면, 오히려 내담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문적 영역에서의 연구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통 슬픔에 대해 '안으로 삭히라'고 배워 왔는데요.
아닙니다. 슬픔은 표현될 때 치유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모토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직접 경험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죄책감과 후회, 수치심 등은 주로 잘 표현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주로 사별 이후 겪게 되는 큰 슬픔을 다룹니다. 여러 감정을 동반한 슬픔이지요. 단순히 'sad'가 아닌 'grief'입니다. 그 말 안에 여러 감정뿐 아니라 인지, 신체, 행동적으로 겪는 어려움들이 들어 있습니다. 감정이라면 여러 감정들과 다양한 반응들을 동반한 큰 슬픔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 안에 포함된 감정 중 말씀드린 3가지, 죄책감과 후회, 수치는 잘 표현하지 않는데, 당한 그때 이야기하지 않으면 나중에도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 감정들은 우리 속에 남게 되고, 언젠가 표현하지 않으면 눈에 보이진 않지만 일상적 삶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것이 어느 순간 폭발하는 경험을 할 수도 있고, 다른 상실로 인해 더 크게 슬퍼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슬픔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그 순간 자신이 겪은 감정들을 그때 그때 표현하지 않고 지나가면, 표현되지 않는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됩니다. 눈사람을 만들 때 눈덩이가 계속 불어나듯이 계속 쌓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느 순간 터지면,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충격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슬픔이 아주 크지 않을 수도 있지만, 표현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표현 방법은 첫째로 친구나 가족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내용이라면 상담가나 교회 목회자, 전문적 상담 훈련을 받은 사람에게 꼭 이야기해야 합니다. 기왕이면 사별 슬픔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게 낫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아직 잘 구조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 상담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못할 내용이라면, 혼자서라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기도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거나, 고인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고백할 수 있지만,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야기하면, 풀리나요.
"최근 남편을 사별한 학생과 상담을 진행했습니다. 신기한 것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풀린다는 것입니다. 상담학적으로 '공감적 경청'이라는 게 있습니다. 정말 잘 들어주기만 해도, 내담자가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게 돼 있습니다. 감정을 이야기하도록 끌어내 주는 것이지요. 그냥 들어주기만 해도, 계속 이야기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 기회는 아무 때라도 생길 수 있지만, 일반적 상황에서 애도상담을 모르는 분들이라면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어색해지거나 그 상황을 피하려 합니다.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버지가 누구시냐? 뭐하는 분이시냐?'는 질문을 받곤 했습니다. 그때 '돌아가셨다'고 하면, 대부분 '미안하다'며 덮고 지나갑니다. 어른들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에 대해 표현하고 이야기할 기회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까도 학생이 돌아가신 남편 이야기를 꺼냈을 때 다른 주제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마다 '이야기할 기회'라고 생각해 계속 들어줬습니다. 그 분이 계속 이야기하도록 도왔습니다. 본인의 감정을 표현하면서,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직장을 얻은지 5개월만에 남편이 돌아가셔서, 그런 부분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충분히 이해하고 듣고 있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지속적으로 표현하면서 본인의 감정들을 꺼내 놓습니다. 신뢰할 만한 분위기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공감적 경청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굿 모닝, 좋은 애도란 무엇인가요. 꼭 눈물을 흘려야 하나요.
"잘 표현하는 것입니다. 울 수도 울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각자 다릅니다. 저자는 '슬픔을 비교하지 말라'고 합니다. 장례식장 갔는데 누구는 울고 누구는 울지 않는다면, 우는 저 사람이 더 슬픈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억지로 울라고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알아서 하는 것이고, 울지 않는다 해서 슬프지 않은 게 아닙니다.
상실 직후 2-3일, 길게는 2-3주를 '비탄'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초기에는 충격과 무감각, 혼란 등의 감정들 때문에 기억이 안 납니다. 울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눈물이 안 나는데 '괜찮아 울어'라고 위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안 울면 안 슬픈 것 같다고 하고, 울면 울지 말라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러면 안 됩니다. 그냥 내버려둬야 합니다.
스스로 단계적 과정을 겪습니다. 실제로 눈물이 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혼란스럽고 감각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장례를 다 치르고 열흘 뒤에서 한 달 뒤, 혼자 앉아있으면 문득 생각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사별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애도'는 어떠해야 하나요. 천국에 갔으니 슬퍼해서는 안 되는 건가요.
저는 '천국환송예배'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환송예배'라는 이름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이 울면, '왜 울어, 천국 갔는데? 괜찮아 울지 마'라고 합니다. 하지만, 천국 갔다고 안 슬픈가요? 천국에 간 건 간 것이고, 사별이란 그동안 함께했던 애정과 사랑 같은 관계가 다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별로 인한 슬픔을 슬픔으로 겪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슬픔을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슬픔도 그냥 하나의 감정입니다. 거기에는 긍정도 부정도 없습니다.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감정은 감정 자체로 봐야 합니다. 왜 '울지 말라'고 합니까. 부정적으로 생각하니 그런 것 아닌가요.
또 한 가지는 '울지 마'라고 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환송예배'라는 이름으로 감정 표현을 억제하게 만듭니다. 신학적 관점에서는 '천국환송예배'가 맞을 수도 있으나, 그 이름 때문에 애도상담적으로 벌어지는 감정들을 표현하지 못하고 억제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장례식 가서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나요.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솔직함이란 무엇입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생각하지만, 뭐라 할 말이 없지요. 목회자들도 제게 묻습니다. 저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냥 내가 거기에 가 있는 자체가 위로입니다. 가만히 한 번 손 잡아주면 됩니다. 그 정도가 가장 좋습니다. 동성간 아주 친한 사이라면 안아줄 수 있고, 이성이나 덜 친한 사이라면 말 없이 손만 잡아주십시오.
굳이 말하고 싶으면, 솔직하게 이야기하십시오. 뭐라고 이야기할지 막 찾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뭐라 위로해 드릴 말을 찾아도 위로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하십시오. 가장 솔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가장 많이 실수하는 부류가 바로 목회자들입니다. '뭔가 신앙적 메시지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 하실 필요 없습니다. 목사님이 그곳에 간 자체가 위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정도만 하시면 됩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구절을 찾아서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감당할 시험 외에는 주시지 않는다'고요. 물론 하나님 뜻이 있겠지요. 하지만 엉뚱한 구절을 갖다 붙인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가 죽었는데, '하나님께서 천국에 천사가 필요하셔서 데려가셨다'고 말합니다. 가족들에게는 우리 곁에 있는 게 훨씬 나은데, 무자비한 하나님이 되는 것 아닌가요?
뭔가 신앙적 이야기를 자꾸 찾아서 그럴듯하게 하려다 보니, 위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들은 위로 대신 더 화가 납니다. 당장에는 정신이 없어 넘어가지만, 곱씹을수록 화가 납니다. '아무말'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애도상담은 주로 사별에 의한 것인가요.
"사별 상담을 중심으로 하지만, 모든 상실에 대한 상담으로 확장하려 합니다. 상실이라면 물질적 상실, 관계적 상실, 심리 내적(자기가 꿈꿔왔던 꿈을 잃거나 자존감 등) 상실 기능적 공동체적 역할 상실 등도 다 애도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일반적 상담에서는 상실과 애도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그냥 상담을 했기 때문에, 분명히 부족한 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일반 상담가들도 절반 이상 애도상담 전문가 훈련 과정에 오시는데, 하면서 보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음을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애도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사이트를 배워 가십니다. 그래서 애도상담을 모든 상실에 대한 상담 영역으로 확대해, 애도의 과정과 감정 표현 등의 과정들을 다 겪을 수 있도록 상담을 하려고 합니다."
-자살 유가족들은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더욱 표현을 못하시지요.
"<슬픔학개론>에도 썼지만, 자살 유가족들 같은 경우 자살 자체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은 죽음이다 보니, 자살 유가족들이 겪는 슬픔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슬픔이 돼 버립니다. 슬픔을 마음대로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살이라도, 보통 '사고'라면서 덮으려 합니다. 하지만 슬픔과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이중적 고통이고 더 힘들게 됩니다.
자살 유가족들을 위한 치유상담은 반드시 일반적 상담보다 더욱 애도상담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해야 합니다. 집단상담할 때도 그들을 따로 모아야 합니다. 배우자 상실, 자녀 상실, 자살 유가족들처럼, 특성화해서 모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처럼 애도상담이라는 분야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공부한 분들도 많지 않습니다. 제가 거의 최선두에 서서 전파하고 있기에 어떤 사람들은 저를 '최초의 애도박사'라고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웃음). 전공은 영성상담이고, 세부 전공으로 애도상담을 공부했습니다."
-사별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잘 와 닿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사별이라는 게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낙태, 유산, 사산도 일종의 사별입니다. 사람들은 '애야 또 하나 낳으면 되지'라고 쉽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한 살 된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특히 사산은 거의 달이 찼을 때 일어납니다. 생명과 죽음 사이가 백짓장 차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생명으로 보지 않고 '산모만 건강하면 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성들은 대부분 이러한 감정을 이해합니다. 낙태나 유산, 사산 등을 하고 나면, '뱃속에서 살아있는 생명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죄책감을 많이 갖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했던 위로들이 위로가 안 됩니다. 더구나 관심받지 못한 죽음, 죽음으로 인정받지 못한 죽음입니다. 여성들 2명 중 1명에게 이런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낙태만 해도 10명 중 3명에게 경험이 있다는 조사가 있었습니다."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 회장이신데요.
"이 모임은 1991년 4월 2일 창립했습니다. 김옥라 명예이사장님이 사별의 슬픔을 겪고 나서, 비슷한 경험을 했던 공덕기 여사(윤보선 전 대통령) 등 몇몇 저명한 분들에게 '죽음을 공론화하자'는 운동을 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기도 중 '죽음을 탁상 위에 올려놓고 공론화하라'는 음성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 10여명이 모여서 논의하다, 죽음의 의미와 철학 등을 이야기하는 죽음교육과 사별돌봄 두 가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로 하고 조직한 모임입니다.
처음 김동길 김인자 교수를 모시고 연세대에서 죽음학 강연을 했는데, 900석 장소에 1,000명 이상이 참석했습니다. '죽음을 거부하고 터부시하는 것 같지만, 관심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해외 초청 강연회를 여는 등 죽음에 대한 담론을 확산시켰습니다. 2002년에는 지도자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초기에 세운 두 가지 목표를 놓고 지금까지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애도상담 전문가 교육을 작년 3월부터 시작했습니다. 주 교육은 죽음준비 지도자과정과 애도상담 전문가과정이고, 이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합니다. 웰다잉 강사과정도 2007년 시작됐고, '웰다잉'을 전파하는 연극도 만들어 순회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존엄사의 의미로 최근 국회를 통과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대한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