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서평] 전통으로부터의 자유와 신학
「The Tradition of Liberal Theology」 서평
자유주의 신학이 Liberal Theology의 적절한 번역어일까? '~주의'라는 번역어가 되려면, 대개 일차적으로는 해당 용어에 '~ism'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 내용상으로도 주체가 있거나 체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Liberal Theology'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종교적 의미의 'Liberal'은 통상적으로 '합리적'이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전통으로부터의 자유'라 볼 수 있다. 구체적인 역사적 정황을 따졌을 때, 'Liberal Theology'는 18세기 계몽운동의 합리적 비판(특히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와 신학자 헤르만 라이마루스)의 영향을 받아 재구성한 신학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Liberal Theology' 신학에 '전통'이 있을 수 있을까? 얼핏 보면 'Tradition'과 'Liberal'은 모순적 관계다. '전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한 '합리성'이 전통을 가질 수는 없는 듯하다.
하지만, 캐나다 뉴펀들랜드 메모리얼대학교 명예교수로써 철학과 생명윤리를 가르치는 미카엘 J. 랭포드(Michael John Langford)는 자신의 책 「The Tradition of Liberal Theology」에서(그리고 제목이 보여주듯) 그러한 신학사적 의미를 다소 비틀어, 당시 교파의 주류 교리나 시대정신에 얽매이지 않고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조금 앞선 신학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지리적인 관심사는 언급되지 않으나, 추천사를 쓴 미국 유니온신학교 게리 도리엔(Gary Dorrien)의 말대로 일정 부분 영국의 신학사도 엿볼 수 있다.
본서는 총 열한 가지 신학 주제, 그에 따른 열세 명의 기독교인, 그리고 그러한 자유주의 신학에 역행하는 현대의 몇 가지 신학 사조들을 다룬다. 열한 가지 신학 주제란, 다음과 같다.
1. 비문자적 성경해석
2. 이성과 계시의 조화
3. 구속에 대한 非법정적 해석
4. 구원 가능성의 넓은 해석
5. 관용 정신
6. 원죄가 아닌 최초의 죄
7.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
8. 자연 질서를 해치지 않는 섭리에 대한 믿음
9. 믿음과 행위의 필연적 연결성
10. 규율을 최소화하기
11.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기
이 중 몇 가지만 예를 들자면, '비문자적 성경 해석'은 말 그대로 성경 자체가 해석을 요구하며, 그것이 문자적으로 해석될 때 오히려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또한 일관성 있는 해석을 할 수 없게 된다(어떤 것은 문자적으로, 어떤 것은 상징적으로 지키면서 또 어떤 것은 폐지된 것으로 하는데, 기준이 없다거나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지키게 될 때 필연적으로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는 문제점에 대한 폭로이다.
그리고 '구원 가능성의 넓은 해석'은 요한복음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구절을 넓게 해석하는 것으로써, 정확하게 교회가 정하고 있는 신앙을 소유하고 있지 않더라도 영원한 로고스께 무의식적으로라도 반응한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실제로 최초의 기독교 변증가인 순교자 유스티누스도 과감하게 "로고스와 함께 살아가는 자들이 기독교인입니다. 심지어 그들 중 무신론자가 있을지라도"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원죄가 아닌 최초의 죄'라는 표현은 필자의 다소 임의적 번역으로써, 전체 내용을 소개하지 않고 뉘앙스를 전달하긴 쉽지 않다.
말하자면 저자인 랭포드는 '최초의 죄(original sin)'는 인정할지라도, '근원적 책임(original guilt)'을 거부한다. 즉 최초의 죄가 저질러졌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도덕적·종교적 책임까지 진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실제로 동방정교회는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 랭포드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인간 상태에 대한 묘사, 즉 신으로부터 소외당한 상태를 강력하게 묘사하는 비유라고 주장한다.
또 13명의 기독교인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순교자 유스티누스
2. 오리게네스
3. 피에르 아벨라르
4.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
5. 엘리자베스 1세
6. 리차드 후커
7. 윌리엄 칠링워스
8. 존 스미스
9. 제레미 테일러
10. 한나 바나드
11. 존 프레데릭 데니슨 모리스
12. 조셉 라이트풋
13. 프레데릭 템플
아마 신학을 전공한 필자만큼이나 낯선 목록일 것이고, 왜 여기에 슐라이어마허, 리츨, 하르낙, 트뢸치 등이 없는지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열한 가지의 신학 주제에 대한 태도를 지닌 기독교인들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로 랭포드는 전통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또한 이러한 명단을 작성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들 다수는 열한 가지 주제를 어느 정도 공유한다. 저자는 구체적으로 이들이 당대에 저항해 어떻게 자기 입장을 펼쳤는지 소개한다. 아벨라르는 '도덕 감화설'로 유명하며, 저자는 조금 덧붙여 로고스의 모범은 우주적 사건으로, 예수의 삶과 죽음은 전 인류를 위한 상징이 되므로, 굳이 법정적 구속을 고수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논한다. 즉 랭포드는 아벨라르의 도덕 감화설의 주관적 성격을 넘어서 그것이 객관적 효과를 지닐 수 있도록 신학적 논리를 추가한다.
프레데릭 템플(1821-1902)은 옥스포드 발리올 칼리지 출신으로, 과학과 수학에 능하고 칸트를 포함한 독일 사상까지 섭렵한 당대 영국의 몇 안 되는 지식인이었다. 그의 특징은 과학을 능동적으로 수용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1860년대 초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설교하면서 "지표면과 태양계가 자연 원인의 느린 작용에 의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음을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까지 선언했다(이것은 당시의 지질학 논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랭포드가 제시한 명단 중 몇몇은 'liberal'이라는 표현을 싫어했음에도 저자가 목록에 포함시킨 이유는, 그 외 나머지 기독교인들에게서도 이런 저런 당대 전통을 넘어선 도전적인 신학적 태도(위 열한 가지 신학적 주제 목록처럼)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적인 반응들도 있다. 계몽운동의 철학적, 신학적 도전뿐 아니라 다윈 이후의 과학적 도전은, 교회로 하여금 훨씬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랭포드는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개신교 근본주의, 가톨릭 마기스테리움, 유럽의 변증법적 신학(특히 카를 바르트) 등.
이것의 보수성에 대해서는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지만, 전반적으로 권위를 빌려 과거의 교회의 명령, 태도, 교리를 고수하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특히 바르트 신학은 국내에서는 다양하게 여겨지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굉장히 보수적인 신학 태도였기 때문에 유행했고, 미국 J. G. 메이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미국의 근본주의적 태도와는 달리, 빌헬름 2세, 나치 등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과 더불어, 훨씬 더 긍정적인 모습으로 수용됐다.
그럼에도 신학적 내용으로는 초월에 대한 지나친 의존, 보수적인 윤리 태도, 현대 과학과의 대화보다는 막연한 불신이나 비논리적 선택적 수용 등은 여전히 합리적인 태도에서 멀다.
한편 랭포드는 지나치게 완고한 유물론자들을 비판한다. 우선 역사 속에서 종교인과 종교집단이 저지른 범죄만큼이나 유물론이 저지른 범죄도 적지 않으며, 실제로 윤리적인 잣대나 실용성을 따지는 식으로 역사 속의 인간의 사상을 극단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편적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랭포드는 우리가 흔히 '종교전쟁'이라 부르는 30년 전쟁도 따지고 보면 가톨릭과 개신교가 같은 편으로 전투에 참전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 윌리엄 카바너프가 논문에서 "지난 피비린내 나는 30년 전쟁은 본질적으로 유럽의 두 거대한 가톨릭 왕가인 합스부르크가 대 부르봉가의 전쟁이었다(William T. Cavanaugh, "A Fire Strong Enough to consume the House: The Wars of religion and the Rise of the State," Modern Theology 11, no.4[Blackwell, October 1995], 403)"라는 문장을 인용 소개하는 등 여러 사례를 들면서 우리의 역사의식을 전환시킨다. 이를 통해 유물론이라 해서 무조건 종교적 사상보다 윤리적이라는 또 다른 착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더욱이 유물론이 '형이상학'을 비웃고, 저자 역시 낡고 쓸모없는 형이상학의 폐기를 주장하나, 그럼에도 '세계 전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라는, 생각하는 인간을 형성하기 위해 즉 인간이 마주 서야 하는 질문의 적절한 토대를 형이상학이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극단적 유물론자처럼 모든 형이상학의 가치를 폐기하는 것보다는, 유지하는 것이 삶에 더 실용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 현대 다종교 사회에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비롯해 타종교인과의 실제 대화를 어떻게 진행할 수 있을지 간략하게 짚고 넘어간다.
저자는 책에서 현대의 많은 이성적인, 그러나 기독교적 신앙을 가진 이들의 특징(열한 가지)을 보여주면서, 그에 해당하는 기독교인들도 역사 속에서 찾아내 소개한다.
본서의 가장 큰 장점은 이 수많은 주제를, 그리고 비교적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했던) 기독교인들의 신학적 주장을 간결하게 잘 다룬다는 점이다.
그는 어쨌거나 사도신경에 서술된 신앙 조항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인간의 합리성에는 한계가 있기에 무신론 혹은 세속 휴머니스트들도 합리적일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다시 말해 랭포드는 인간의 합리성 주장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양보할 때 진정한 대화의 토대가 놓이고, 기독교가 중세를 벗어나 현대에 머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계몽운동 시기 이후 관련 신학자들이 유럽을 지배했지만, 종교의 특성상 기적이나 신비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다양한 형태의 현대 기독교 신학 생태계를 형성하게 됐다. 따라서 'Liberal Theology'의 입장은 대부분 종교학이나 문헌학, 역사학 등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유럽 내에서 '신학과'라는 이름은 이제 일반적으로 주류 유일신 종교(특히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간의 대화를 추구하거나, 비교신학적 입장 안에서 신학적 주제를 새로이 살피는 방향으로 발전 중이다. 따라서 정부·대학과 교회 입장이 조금씩 신학적으로 멀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만 절대적일 뿐,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그래서 반성하고 뉘우치며 그분께 진리로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신학도 다른 것처럼 발전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하며, 모든 신학을 서술한 것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게리 도리엔의 3부작 「The Making of American Liberal Theology」나, 로저 올슨이 스탠리 그랜츠와 함께 썼던 「20세기 신학」의 개정판이라 할 수 있는 「The Journey of Modern Theology: From Reconstruction to Deconstruction」은 아무래도 'Liberal Theology'를 학술적으로 다룬 서적이라 두껍고 전문적이다. 그에 비해 랭포드의 이 책은 얇다.
또 'Liberal Theology'라는 용어를 새롭게 정리하면서, 다시금 합리적 신앙이란 무엇인지 다방면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신앙의 합리성을 고민하는 비신학 전공자들에게 적합하다. 만약 이 책이 우리말로 나온다면, 'Liberal Theology'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도서 정보
제목: The Tradition of Liberal Theology
저자: Michael John Langford
출판사: Eerdmans
가격: $18.00
진규선 목사(서평가, 독일 유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