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기독교 내다보기(3)] 증인들의 이야기②
2018년 새해를 맞아 연재중인 서동준 강도사의 '세계 기독교 내다보기' 세 번째 편으로, 지난 시간에 이어 '세계 기독교, 그리고 증인들의 이야기' 두 번째입니다. 이제부터 각주는 생략하고, 중요 출처는 기록해 놓겠습니다. 나머지 출처는 글쓴이의 포스트를 참고하세요. -편집자 주
3. 스콧 선퀴스트: "세계 기독교는 이미 우리 가까이에 다가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껏 우리가 살펴본 두 증인들(레슬리 뉴비긴과 앤드류 월스)의 이야기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만일 그들이 경험을 통해 느끼고 깨달은 바가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가볍게 넘겨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번에 살펴보고자 하는 스콧 선퀴스트(Scott W. Sunquist, 1953-)의 이야기는, 앞선 두 증인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증언한 '세계 기독교의 도래'가 우리의 삶에 직결되어 있는 주제라는 점을 분명히 확인시켜 줍니다.
현재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 교수이자 학장(다문화학, Intercultural Studies)으로 사역하고 있는 선퀴스트는 과거 싱가폴 트리니티 신학교(Trinity Theological College)에서 교육 사역을 감당한 장로교 선교사였습니다. 싱가폴에서 약 9년간(1987-1995) 선교 사역을 잘 감당한 선퀴스트는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피츠버그 신학교(Pittsburgh Theological Seminary)에서 약 17년 동안 교수로 봉직하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살펴보게 될 선퀴스트의 이야기는 바로 이 시기, 곧 그가 선교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피츠버그 동부 지역에 거추하고 있던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20세기 말 무렵 당시 선퀴스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지역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급격한 변화에 주목하게 되는데요. 그는 그 당시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내가 펜실베니아 주의 피츠버그 동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을 때, 나와 나의 아내는 도심에 있는 한 장로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20세기가 거의 끝나가던 그 무렵 우리는 새로운 변화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즉 전통적으로 흑인과 백인이 살아가던 우리 지역에 새로운 인종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스페인어로 쓰여진 표지판들이 점차 생겨났고, 스페인어와 영어로 교회 이름을 적은 오순절 교회의 차량을 교차로에서 보기도 했다. 에디오피아 식당들이 문을 열었고, 우리 교회 리더들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인들을 위한 예배를 열어야 한다는 요청을 받기 시작했다. 점점 더 많은 중국인들과 동 아시아인들이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이내 두세 이집트인 가정이 우리 교회에 출석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10년 사이에 발생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스콧 선퀴스트, 《The Unexpected Christian Century》, 146-147쪽)?"
선퀴스트는 전통적으로 백인과 흑인이 살아가던 지역의 구성원들이 점차 다양해지고 있음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인종이 다양해짐에 따라, 지역 내의 언어와 문화도 점차 다양해져 감을 발견했죠. 즉, 선퀴스트가 살던 지역이 점차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이 되어 간 것입니다.
더욱이 선퀴스트는 이러한 변화가 사회·문화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지역 교회에까지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즉 다른 문화권에서, 다른 언어로 신앙생활을 하던 이들이 선퀴스트가 속한 지역 교회의 이웃이 되었고, 나아가 선퀴스트가 속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선퀴스트가 고백하듯이, 이러한 변화는 그가 살던 지역에서 아주 빠르게 일어났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세계화라는 추세 속에 말이죠.
과학 기술의 발전과 세계화라는 흐름은 각 개인이 지리적·국가적 경계를 넘나들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과거 특정한 지역에서만 접할 수 있던 문화와 언어들을 세계 각지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이러한 세계화의 물결은 사회·문화·정치적 영역 뿐 아니라 기독교계에도 영향을 주어, 각기 다양한 문화권에서 자라난 이들이 한 지역에서 함께 살아가고, 나아가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다양한 문화권에서 신앙생활을 해나가던 이들이 한 지역에서 만나 서로의 '이웃'이자 '교우'가 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2012년 기준 미국에 이주하여 합법적으로 영주권을 획득한 이민자들 중 약 61%가 기독교인이라는 통계를 감안한다면, 이러한 사실은 단순히 꿈에서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이미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들이 미국에서만 일어나고 있을까요? 대한민국 법무부 소속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서 제공하는 자료에 따르면, 2016년 말 기준 국내에서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의 숫자는 약 200만명(2,049,441명)이라고 합니다. 또한 체류 외국인의 숫자는 최근 5년간 매년 9.26%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고, 앞으로도 외국노동력의 유입, 국제결혼 증가, 유학생 증가 등으로 인해 지속적인 증가가 예상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국내에 유입되는 외국인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문화권에서 형성된 삶의 방식과 기독교적 전통을 갖고 한국에 들어와 살아가면서, 우리가 속한 교회의 '이웃'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교우'가 되어갈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세계 기독교는 저 멀리에서 일어나는 일만이 아닌, 이미 우리 곁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지역·언어·문화적 배경을 갖고 신앙생활을 해오던 이들이 한 지역에서 만나 함께 살고 예배드릴 수 있게 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모르는 사이 이미 세계 기독교의 도래를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 기독교의 이러한 추세는 (국내 체류 외국인 숫자의 증가율이 시사하듯이) 더욱 빠른 속도로, 우리 삶에 더욱 깊숙한 곳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4. 세계 내 자기인식: "우리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 기독교의 도래를 증언했던 세 명의 증인들(레슬리 뉴비긴, 앤드류 월스, 스콧 선퀴스트)을 살펴보았습니다. 선교지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서구 세계를 선교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 뉴비긴의 탈-서구중심적 증언, 비-서구권 지역에서 자라나는 기독교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 그들을 통해 배워야 함을 역설한 월스의 증언, 그리고 세계 기독교가 이미 우리 삶에 아주 가까운 곳까지 들어왔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준 선퀴스트의 증언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들 모두는 세계의 수많은 문화권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를 목도했습니다. 그리곤 그들과의 관계성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았죠.
다르게 말하자면, 세계 기독교의 도래는 그들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 내 자기 인식 곧, 신앙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EDS)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케빈 벤후저(Kevin Vanhoozer)는 세계 기독교가 도래하는 시기에 복음주의 교회가 직면하는 과제가 '우리와는 다른 인종적, 문화적, 언어적 배경을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우리가 포용할 수 있는가'임을 지적합니다. 그리곤 벤후저는 복음주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과제 앞에서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확언합니다.
"확실한 것은 자신과 동일한 사회적-경제적 계층과 피부색 부류와 함께 나누는 예배를 보다 안락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는 안락을 느끼는 것이라고 성경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가? ... 복음의 보편성이 요구하는 것은 민족적이고 사회적, 경제적 정체성을 포괄하는 교회가 우리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충성된 사람들 사이에 현존한다는 양상은 단순화할 수 없는 다문화적인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정확히 복음의 보편성에 대한 ... 헌신 때문에, '다인종 집단'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구현할 수 있는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케빈 벤후저, <복음주의 미래> 113-114쪽)."
벤후저의 지적처럼,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인종적, 문화적, 언어적, 사회계층적 경계를 넘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의 보편성을 위한 하나의 헌신으로, 우리는 세계 각 문화권에서 자라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염두하며(더 나아가 포용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레슬리 뉴비긴은 이러한 세계 내 자기 인식, 곧 우리 자신이 전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은 우리의 잘못된 시각을 '교정하는 기회'가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지적처럼 만일 우리가 온 문화에 걸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의 존재를 더욱 의식할 수 있다면, 만일 우리가 서로의 존재와 모습으로부터 도전과 격려와 훈계를 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 곁에 도래한 세계 기독교의 도래를 우리의 새로운 신앙적, 사역적, 선교적 양분으로 삼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모든 성도와 함께 할 때에야 그리스도의 크심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엡 3:14 이하). ... 예수가 서구 문화의 눈에 비친 모습보다 훨씬 더 크고 그것을 넘어서는 분임을 절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른 눈으로 그분을 보는 이들의 증언을 통해서이다. ...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려면 그들의 증언이 필요하고, 거꾸로 그들의 시각을 교정하는 데 우리의 증언이 필요하다. ... 다양하게 많은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충실한 증인이 되려면 우리가 반드시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레슬리 뉴비긴,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186-187쪽)."
서동준 강도사
총신대학교 신학과(B.A)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였다. '세계기독교학'을 깊이 공부하기 위해 영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으며,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post.naver.com/seodj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