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에 대한 연구서 세 편에 관한 리뷰
"누구도 예수의 육체 부활이 역사적으로 일어났는지 아닌지, 함부로 확언할 수 없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일까?"라는 질문은 언뜻 보기엔 이상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비록 직접적인 설문조사 결과가 없지만 아마도) 국내 절대 다수의 성도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가지 해외의 설문조사 결과를 살펴보자.
2017년 BBC는 영국의 성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중 '기독교인'이라고 응답한 사람의 1/3도 되지 않는 수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문자적으로 믿는다고 답을 했다.
EMNID는 독일 성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56%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고 답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고 답한 사람은 46%에 그쳤다. 미국 같은 경우도, Rasmussen Reports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점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아래의 세 권의 책들을 통해, 우리는 왜 해외에서, 특히나 기독교 문명을 제외하고 생각될 수 없는 긴 역사와, 현재도 그러한 문화권에 있는 사회 속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지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1. 게르트 뤼데만(Gerd Lüdemann)의 『The Resurrection of Christ: A Historical Inquiry』
2. 닥 오이스타인 엔조(Dag Øistein Endsjø)의 『Greek Resurrection Beliefs and the Success of Christianity』
3. 마르쿠스 빈센트(Markus Vinzent)의 『Christ's Resurrection in Early Christianity』
추측컨대 이 책들의 저자들도, 그리고 다루는 주제들도 국내에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책들은 조금씩 다른 것을 주장하지만,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그리고 셋 다 상당히 전문적인 역사적 연구를 담고 있다.
게르트 뤼데만은 당대의 신학자인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역사적으로 조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에 긍정하며(그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실제로 역사적 조사를 위해 부활절 이야기와 관련된 모든 초기 기독교 문서를 다뤘다. 정경뿐 아니라 외경까지 다룬다. 그리고 거기서 부활과 관련해 언급되는 모든 구절을 일일이 다룬다. 뤼데만은 부활절 이야기와 관련된 텍스트를 다음과 같이 여섯 범주로 구별한다.
1) 묘사(예를 들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
2) 예수가 부활한 뒤 누군가에게 나타났다는 교리문답적 진술
3) 현현 이야기
4) 빈 무덤 이야기
5) 예수의 생애로 거슬러 투영된 부활절 이야기(예를 들면 물 위를 걷는 예수, 변화산 사건, 베드로의 낚시 등)
6) 기타
뤼데만의 조사에 의하면, 대다수 내러티브는 목격자의 증언이 아니라 공동체나 해설자를 통해 각색된 것이며, 바울서신에 겨우 '목격담'이라 할 만한 것이 있으나 다른 제자들과 연관된 목격담이라 할 만한 것들을 비교할 때 환상 체험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한 복음서의 육체 부활 강조는 후대에 나왔고, 가장 초기 전승들을 살펴보면 예수의 몸은 '하늘'에 있는데, 후대에 가현설적 입장을 가진 어떤 기독교 공동체에 대응하기 위해 땅에서 머물다가 승천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외에도 복음서의 부활절 이야기들은 상호적으로도 문제가 되며, 무엇보다 갈릴리 현현이냐, 예루살렘 현현이냐의 문제는 결코 일치할 수 없다.
뤼데만은 베드로의 죄책감에 의한 환상 체험의 확산, 바울의 양심의 가책에 의한 동일한 환상 주장을 통해 부활절 이야기가 촉발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교회는 부활 신앙 위에 세워졌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닌 위증에 의거할 따름이며, 결론적으로 "이제 우리는 이것이 그저 전 세계적인 역사적 사기일 따름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We must now acknowledge that it has all along been a worldwide historical hoax)"고 말한다. 뤼데만은 해당 서적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 않았다(Jesus did not rise from the dead)."
닥 오이스타인 엔조는 노르웨이 베르겐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서, 몇 가지 사실들에 기초하여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우선 그가 확신하는 몇 가지 사실들이란 다음과 같다.
1) 초기 기독교에는 부활에 대한 다양한 이견이 존재했다.
2) 기독교를 성공시킨 배경은 유대교 문화권이 아닌 헬라-로마 문화권이다.
3) 헬라 문화와 예술(그림이나 시 등)은 헬라 철학과 달리 육체를 중요시했다.
4) 다수 학자들은 헬라 문화권에서 기독교가 성장했다는 사실만 파악했을 뿐, "기독교의 육체 부활 주장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다"는 것이 편견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한 적이 거의 없고, 실제로 이 사안을 연구하지 않았다.
5) 육체 부활을 강조하는 기독교 집단일수록 헬라 문화권에서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육체 부활 주장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헬라-로마 문화권에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 부활 주장 '덕분에' 기독교가 그러한 문화권에서 성장한 것은 아닌가? 육체 부활 주장에 대한 강조가 헬라-로마 문화권에서 성공적이었기에, 더욱 그것을 밀어붙이고 교리화한 것은 아닌가?"
실제로 엔조는 헬라 문화에 속한 대중에게, 육체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였음을 밝혀낸다. 구원을 뜻하는 헬라어 '소테리아'의 구체적 의미도 안전과 건강이다. 헬라의 신들도 그들의 육체의 탁월한 요소로 인해 불멸의 존재로 여겨졌다. 신들이 섭취하는 음식들도 신들의 '육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기독교 혹은 예수의 부활이 헬라 전통 종교에 없다고 생각되지만, 헬라 전통 종교에는 소생이나 회춘 외에도 불멸의 '몸'으로 부활하는 개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어떤 버전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킬레스가 죽어 화염이 그 시체를 불태우려 하자, 그의 어머니 테티스가 자신의 아들의 시체를 축복의 섬(Elysian Plain)으로 데려가 그를 부활시켰으며, 따라서 아킬레스는 지금도 영원히 살아있다고 전한다. 이것은 그가 불멸의 '몸'으로 부활했음을 암시한다.
멤논도 그와 유사하며, 헤라클레스의 어머니 알크메네 역시 그러한 경험(관 속에 있던 그녀의 시체가 사라지고 거기에 큰 돌이 놓인)을 겪었다고 당시 헬라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 불멸을 믿었던 플루타르크는 대중들의 이러한 믿음을 비판하며 '육체 없는(asarkos)' 이상을 주장했고, "육체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어 순수하고 육체없고 더럽지 않은 상태가 될 때" 신의 영역에 도달한다고 말했다.
오리게네스도 지적하듯이, 대중은 아스클레피오스 신화를 믿었다. 그리고 헬라인에게 '불멸의 존재(hoi athanatoi)'는 곧 신이었다. 모든 신이 숭배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영웅과 신의 차이는 육체에 있었다. 즉 아스클레피오스는 유령도 영웅도 아닌, 불멸의 몸을 가진 신이었다. 그리고 그는 제우스에 의해 살해당하기 전 그러한 불멸의 신이 될 수 없었다.
2세기 기독교 변증가 테오필루스도 그가 죽은 뒤 '부활'했다고 논한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아스클레피오스는 번개를 맞은 뒤, '승천'했다고 논한다. 디오니소스의 어머니 세멜레 역시 제우스에 의해 번개를 맞아 죽었으나, 부활하여 신이 되었다. 헤라클레스도 마찬가지다.
멜리케르테스(Melicertes)는 부활하여 육체적으로 불멸이 된 또 다른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인 이노(Ino)는 헤라 여신으로 인해 미쳐서 멜리케르테스를 끓는 가마솥에 던졌고, 그 아이를 건져내어 함께 바다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멜리케르테스는 바로 그 바다에서 다시 살아났고, 불멸이 되어 팔라이몬이라는 바다의 신이 되었다.
트라키아의 왕 레소스도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에 의해 살해당한 뒤 다시 살아나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프리지아 코티아이움(Cotiaeum)의 한 헬레니즘 비문은 트로이 전쟁의 사르페돈이라는 전사가 부활하여 육체적으로 부활했다고 기록한다. 그 외에도 많은 전사들이 살해된 뒤 부활하여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는 기록 등이 있다.
그렇다면 고전-헬레니즘 시대의 헬라인들은 이러한 전설을 '실제로' 믿었을까? 플루타르크, 위-루키나노스, 오리게네스 등은 헬라인들이 헤라클레스, 아스클레피오스, 디오스쿠로이 쌍둥이 형제 등이 실제로 부활하여 신이 되었음을 믿었다고 말한다.
이 외에도 아리스테아스는 죽었다가 7년이 지나 육체로 부활하여 고향에 기적적으로 현현했다. 플루타크로스는 이 이야기를 1세기인 당시에도 대중들이 믿었다고 마지못해 인정한다. 아리스테아스야말로 예수와 가장 유사한 전설을 가진 역사적 인물이다.
그 외에 '육체의 사라짐'이라는 개념도 헬라 문화권에 있었다. 불멸의 존재가 된 사람은 모두 우주의 특정 공간으로 이동한다. 아킬레스, 멤노스, 메넬라오스, 헬렌, 카드모스, 아약스 형제, 파트로클로스, 안틸로쿠스는 축복의 섬 엘리시움으로 갔다.
멜리케르테스, 이노(류코테아), 펠레오스, 글라코스, 볼리나, 브리토마르티스는 신성한 바다로, 힐라스는 신성한 호수로, 헤라클레스, 아스클레피오스, 세멜레, 디오니소스, 알크메네, 이피게니아 등은 하늘로 갔다. 이상 엔조의 검토에 의하면, 헬라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불멸 그리고 몸의 사라짐을 받아들이는데 무리는 없다.
한편, 엔조는 유대교 내에 본래 부활 신앙이 없으며, 파르티아 왕조와 사산 왕조 기간 동안 조로아스터교와 유대교가 서로 상호 작용하며 유대교가 조금씩 부활을 말했다 할지라도, 육체 부활은 완고하게 거절했다고 주장한다. 당대 유대교 내에 일부 존재했던 '영혼' 불멸의 개념도 헬레니즘 시대 상호작용의 산물이었다.
즉 엔조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평행을 이룰만한 요소는 당대의 유대교에 없었다. 그리고 엔조는 단호하게, 비록 당대의 유대교가 위용이 있었고 개종자들도 있었을지라도, 헬라인 다수는 유대교를 선택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기독교와 달리 유대교는 개종자를 얻고자 할 때 육체 부활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초기 기독교 문헌을 보아도 바울의 경우는 육체를 상당히 경멸적으로 말했고, 육체 부활을 주장했는지 아닌지, 바울이 말하는 부활체가 실제로 무엇인지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할 정도로 모호하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즉 복음서 등에서는 육체 부활이 상당히 강조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엔조는 말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고대 모든 헬라 시인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표현한 불멸의 육체에 대한 매력을 기독교가 가져다 주었기에" 기독교가 성공할 수 있었다고 논한다.
마르쿠스 빈센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부활이 정말로 초기 기독교의 핵심이었는지, 그 자체를 의심한다. 킹스칼리지 런던 신학 및 종교학 교수인 그는 1-2세기의 문헌을 포함한 유적들까지 추적하면서, 의외로 '부활'에 대한 강조는 '마르키온'이 등장하기 전까지, 즉 약 140년 경까지의 그 어떤 기독교인의 저술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 4세기 이전 (즉 콘스탄티누스 이전) 초기 기독교인들의 모든 예술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없다. 닻, 배, 물고기, 기도상, 비둘기, 감람나무 가지, 선학 목자, 어린 양, 종려나무, 빵, 포도주, 포도나무, 포도, 요나, 기적을 일으키는 자, 마리아, 십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어떤 상징 등은 있어도, 그리스도의 부활은 없었다는 것이다.
요나의 표적은 종말의 때를 상징할 뿐, 안타깝게도 저술이든 예술이든 요나의 표적을 다룬 그 어떤 기독교인의 저술에서도, 때때로 우리 몸의 부활의 기적을 가르치는 것으로 사용될지라도(물고기 뱃속에서 3일이나 있었으나 상처없이 뭍으로 나온 요나처럼 우리 몸도 부활 때 상하지 않은 채일 것) 그리스도의 부활은 암시되지 않는다.
빈센트에 의하면, 예수를 따르던 이들에게 그의 죽음은 순교로 해석됐을 뿐이다. 최초의 1-2세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어록, 예수의 십자가, 희생적 죽음에 관심을 가졌고, 예수에 대한 믿음은 유월절 어린 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마르키온이 등장하면서부터 초기 기독교는 상당한 발전을 했다.
그는 유대교와 다른 정체성을 기독교에 심어주면서, '신약'이라는 책을 최초로 분류하며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심어주려 했다. 그 분류 기준은 바울과 바울의 복음이었다. 빈센트의 분석에 의하면, 바울의 편지(혹은 바울에게 영향을 받은 편지들) 외에는 신약에서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발견할 수 없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의 편지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조한다. 하지만 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의 편지가 아니며, 부활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고 그는 주장한다. 골로새서는 바울의 이름을 차용했을 뿐, 바울의 편지는 아니다. 골로새서는 바울이 부활에 둔 강조점을 성육신과 특히 죽음으로 옮겨간다. 에베소서도 역시 부활을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 영적 지혜, 계시, 그분 안에서의 성장 등을 위한 메시아적 증언으로 볼 뿐이다.
베드로전후서는 서로 다른 저자가 썼다.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부활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며, 부활이 갖는 구원의 기능에 강조점을 둔다. 즉 부활은 종말의 구원의 순간에 일어난 표징이다. 게다가 베드로전서는 마르키온처럼 부활과 구원에 대한 비물리적 강조를 공유한다(3:18).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전서와 상당히 다른 톤을 지니고 이으며, 바울의 권위를 높이고, 바울의 적들을 비판하는 등 바울을 꽤나 따른다.
히브리서는 부활 개념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요한 문헌들, 야고보서, 유다서뿐 아니라 바나바 서신, 헤르마스의 목자, 클레멘트 서신, 디다케 등도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복음서들'은 어떠한가? 여기서 빈센트는 대담한 가설을 하나 세운다. 마르키온이 2세기 경 로마에서 활동하던 전까지는, '주의 말씀'은 알아도 '책으로써의 복음' 즉 '복음서'에 대해서는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무명의 복음서라 알려진 에거톤 파피루스2나 옥시링쿠스 파피루스 840과 같은 단편들도 정경복음서를 아는 듯하나 그것과는 차이가 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이전 학자들은 마르키온의 '복음서(소위 전누가복음)'는 이전의 누가복음에 의존했다고 생각하지만, 최근 학자들은(M. Klinghardt, J. B. Tyson, J. Knox, D. T. Roth 등) 오히려 마르키온의 복음서를 바탕으로 현재 누가복음이 나온 것은 아닌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초한 그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바로 마르키온은 어떤 복음서를 발견한 것도, 사용한 것도, 편집한 것도 아니며, 자신의 기독교 철학 모임을 위해 '복음서'라는 것을 생산했으리라는 가설이다. 빈센트가 내세우는 이에 대한 몇 가지 증거가 있다.
우선 어떤 익명의 시리아 복음서 주석은 마르키온이 원-복음서(Proto-Gospel)를 쓴 것으로 알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반복해서 마르키온을 자신만의 '복음서를 쓴 저자'로 부르며, 때로는 간결하게 '복음서 저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심지어 마르키온이 그 자신의 복음서를 다른 누군가가 구약, 율법과 선지자와 함께 엮는 식으로 '유대화'시켰음에 분노했다는 사실이 있음을 인정한다. 거기다 몇 가지 논란이 될 수 있는 보충적 증거들도 빈센트는 제시한다.
1) 탄생이나 유년기 없이, 청년으로 등장하여 죽음에 이르는 예수를 묘사하는 마르키온의 복음서와 다른 복음서의 내러티브 라인이 상당히 유사하다.
2) 마르키온에 반대하는 당대 기독교 저자들 중 누구도 마르키온을 이미 존재하는 복음서를 함부로 뜯어고쳤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은 마르키온 30-40년 '이후'의 이레나이오스가 최초이다.
3) 마르키온 이전의 저자들 중 '복음'을 책이나 이야기나 연속되는 사건 등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신약 연구자 쿠르트 알란트는 이런 현상을 '악몽 같다(Nightmarish)'고 까지 고백한다.
4) 마르키온 이후 그에 응수하는 모든 저자들은 '복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꺼렸다.
다시 말해, 부활은 초기 기독교에서 신현, 성육신, 십자가 위의 죽음만큼 교리적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마르키온 시대부터 달라졌다. 왜 마르키온에게 부활이 중요했나? 마르키온이 열렬한 바울 지지자였으며, 바울에게 부활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2세기에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공통된 기억을 공유한다는 게 아니라, 공통된 것을 찾아내고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쨌든 마르키온 이전까지 그리스도의 탄생이나 수난 등은 있어도 부활은 세례 문답에 없었다.
빈센트는 "마르키온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신경은 그의 수난으로 끝맺었을지도 모른다(Without Marcion, the Christian creed might have ended with the passion)"와 같은 문장으로 자신의 연구서를 마무리한다.
일부 내용이지만, 지금까지 세 권의 부활에 관한 연구서의 핵심을 전달했다. 이 외에도 도발적인 연구서는 많다. 복음서 기록과 기억 이론을 연결시키는 시도들을 비판하는 책부터 시작해 심지어 예수의 실존성까지도 비판하는 책까지, 아직 국내에 소개조차 되지 못했지만, 관련 연구들은 결코 녹록치 않다.
국내에 잘 알려진 기독교 변증가들의 논리적 합리성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정당성을 얻고 있지 못하며, 부활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예를 들어 리 스트로벨의 책, 예수 사건이나 그 속편들, 그리고 그것을 영화화한 '예수는 역사다' 등에 등장하는 기독교 변증가들의 논리나 주장은 심각한 결점을 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Brent Landau가 The Conversation에 기고한 The Case for Christ: What's the evidence for the resurrection을 보라).
물론 위의 연구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 사람이 하는 연구라는 것은, 특히 어떤 아주 오랜 역사 속 사건의 재구성은 개연성의 문제이고, 어떤 식의 재구성이든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 논리적 약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압도적으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된다면, 전체가 수정될 가능성에도 열려있을 수 밖에 없다.
위 학자들 중 뤼데만은 가장 과격하게 자신의 연구에 근거해 부활 신앙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아무리 그의 연구가 철저하게 수행되었을지라도 신앙을 부정할 수 있는 권리까지 가질 순 없다. 그리고 부활의 교리가 초창기에 정립되지 못했을수도 있고, 정경 복음서가 정확한 역사 기록물이 아닌, 그리고 어떤 고정된 채 전승된 기억이 아닌 신앙고백이라 할지라도,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의 의미가 전혀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수천 년 전 사건을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그것도 턱없이 부족한 자료만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까? 누구도 예수의 육체 부활이 역사적으로 일어났는지, 아닌지 함부로 확언할 수 없다.
필자는 기독교 변증가들의 의도를 이해하지만, 그들에게 조심스레 되묻고 싶다. 그들의 변증이 지적 성실성의 결과물이라 말할 수 있는가? 기독교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 "헬라인이 구하는 지혜"는 아니다. 기독교 부활 신앙이 어리석은 변론거리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진규선 목사(서평가, 번역가, 독일 유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