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펴낸 김용규 작가(2)
김용규 작가의 <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는 우리가 보통 교회에서 배우는 '하나님' 이야기와 다르다. 2,000년간 이어져 온 풍성하고 아름다운 서양문명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카페에서 대화하듯 편안하고 따뜻하게 이야기한다.
그래서 932쪽의 많은 분량이지만 페이지 넘기기가 그리 힘들지 않다. 그리고 2,000년의 서양 기독교 사상 역사나 주요 인물의 여러 이야기를 알게 되는 즐거움도 있다. 이 책은 2010년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라는 이름으로 휴머니스트에서 나왔던 작품을 다시 쓴다는 마음으로 고치고 확장한 개정증보판이다. 곳곳에 설명과 화보를 전보다 풍성하게 넣었고, 욥의 이야기로 살펴본 '하나님의 부재'에 관한 4부 8장을 추가했다.
김용규 작가는 지난달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3가지 이야기했다. 김 작가는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설득의 논리학>, <생각의 시대>, '철학통조림 시리즈' 등을 쓴 '생각 전문가'이기에, 그의 제안은 독자들에게 유용할 것이다. 다음은 그 내용.
-인간이 묻고 로봇이 답하는 인공지능 시대가 됐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사유(思惟)는 빈곤해지고 있는데, '제2의 김용규'가 나오려면 '그리스도인들의 사유 개발'이 어떠해야 할까요.
"'제2의 김용규'라니요, 그 무슨 가당치 않은 말입니까. 그건 절대 아니고요, 저는 단지 책에서 독자들이 주목해줬으면 하는 것 3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들은 제가 처음 이 책을 구상할 때 설정한 기본 방침이기도 한데요, 이 3가지가 독자들이 기독교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기독교적으로 사유하는 방법을 습득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먼저, 기독교의 신 개념을 인문학 측면에서 서양문명과 엮어서 파악하고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눈여겨 보아주길 바랍니다. 기독교와 서양문명이 면밀한 상호 작용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무려 2,000년 동안이나요.
때문에 이런 연관관계 하에서 서로를 조명했다는 것이 중요하고, 또 필요한 작업입니다. 저는 이 작업을 책표지에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아 명시했는데요, 이 방법에는 많은 이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와 서양문명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떤 것에 대한 피상적 이해가 가진 위험을 풍자한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이 귀해 식수마저 부족한 어느 나라의 사람이 서구를 방문하여 벽에 붙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시원스레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경탄했답니다.
그래서 수도꼭지를 여럿 사 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벽에 꽂아놓고 틀어보았지만 물이 나오지 않자 크게 실망했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벽 뒤에 마땅히 있어야 할 배관도, 급수펌프도, 정수장도 없이 물이 쏟아져 나올 리가 없지 않겠어요?
이 이야기는 물론 누군가가 만들어낸 농담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습니다. 무슨 일에 대해서든 심층적 이해 없이는 해결책도 없다는 것을 또렷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에는 서양문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대부분 이처럼 피상적이지 않은지 의심스럽습니다.
신에 대한 이해부터 그렇지요. 때문에 제 책의 주된 목표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바르고 정확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심층을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서양문명을 이끌어왔고 또 앞으로도 이끌어갈 급수펌프이자 정수원인 기독교 고유의 가치들과 특유의 사유방식을 찾아내 배우고 익히자는 거예요. 제 책은 다른 무엇보다도 여기에 방점을 두었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신 개념을 인문학 측면에서 서양문명과 엮어서 파악하고 이해하고 표현하면, 다른 이 점들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비기독교인들과 의사소통을 보다 원활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같은 무신론의 시대에 복음을 어떻게 전파하면 좋겠는가?' 하는 질문들을 많이 하십니다.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인문학 책을 쓰는 사람으로서 저는 이런 대답을 자주 합니다. 성경 말씀이나 기독교 교리를 성경적·기독교적 언어나 어법으로 전하면 은혜롭고 효율적이고 정확해서, 좋습니다. 하지만 비기독교인들이 들을 때는 자칫 거부감이 들거나 배타적으로 생각될 수 있으니, 이것들을 인문학적 언어와 어법으로 바꿔서 전해 보라고요.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요한일서 말씀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은혜로운데, 비기독교인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거부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인문학 용어로 바꿔보라는 겁니다. 마치 안셀무스가 자신의 책 <모놀로기온>에서 '하나님'을 '최고 본질,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라고 표현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말씀은 '최고의 진리는 사랑이다, 최고의 아름다움은 사랑이다, 최고의 정의는 사랑이다, 최고의 지혜는 사랑이다'... 등이 되는데요, 이런 표현들은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를 가져다주고, 비기독교인들에게는 거부감을 덜어줍니다.
'하나님만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 교리이지만, 비기독교인들은 '아 됐어. 예수쟁이들이구만'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나 '최고의 진리가 인간과 세상을 구원한다. 최고의 선함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한다, 최고의 정의가 인간과 세상을 구원한다. 그런데 그 최고의 진리, 최고의 선함, 최고의 정의를 우리가 신이라 한다'는 식으로 표현하면 어느 누구도 듣기 전부터 거부하진 않습니다.
예전에 몇몇 자연과학자들과 토론하는 기획이 있어, 한두 번 미팅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깨달은 것인데요, 당시 우리는 어떤 테마에 대해 토론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용어부터 조정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조율하지 않은 오케스트라처럼 끊임없는 불협화음만을 생산해낼 뿐이거든요.
이런 자연과학자들에게 '하나님만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면 더 이상 이야기가 진척되질 않습니다. 그런데 '진리, 선함, 아름다움, 정의, 지혜 이런 것들만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면, 반론이 없었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인 생각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의사소통 과정을 거치면, 심지어 '하나님을 믿으면 당신의 아이들과 가정이 잘 될 것이다'라는 자칫 기독교인 사이에서조차 기복신앙으로 오해를 살만한 언급까지도 저항 없이 받아들게 됩니다. 당신의 아이들과 가정이 '진리, 선함, 아름다움, 정의, 지혜 이런 가치들을 추구하면 잘 될 것이다'라는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작은 예에 불과합니다. 인문학적 측면에서 기독교의 신 개념을 서양문명과 엮어서 파악하고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에는 이밖에도 숱한 이점들이 있습니다. 독자들이 제 책에서 그런 사례들을 확인하실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요.
"기독교의 신 개념을 서양문명과 엮어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에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 곧 가치관의 몰락, 삶의 의미 상실,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테러와 전쟁으로 치닫는 문명의 충돌 등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문제인데요... 여기서 잠시 우리의 문명사를 간략해 살펴볼까요?
좀 전에 말씀드렸듯 신이 세계에서 일하는 방법, 문명 속에서 역사하는 방법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를 통해서였습니다. 예컨대 서양문명에서 신은 안셀무스가 '최고 본질,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라고 표현한 것처럼,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정점, 최고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신은 고대와 중세를 걸쳐 서양인들의 삶의 지표이자 목적이었지요. 그런데 근대가 시작되면서, 인본주의 가치들이 이 같은 신본주의 가치들을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16, 17세기 과학혁명, 18세기 계몽주의에 의한 사회혁명, 19세기 산업혁명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이 증명하듯이, 자유, 평등, 박애, 이성, 과학, 계몽, 진보와 같은 인본주의 가치들이 신본주의 가치들을 가차 없이 밀어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이뤄질 파라다이스(paradise) 대신 인간에 의해 세워질 유토피아(utopia)를 설계하기 시작했지요.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이, 바로 그것을 알리는 극적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본주의 가치관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곧이어 일어난 제1·2차 세계대전과 샤워실로 가스를 주입한 아우슈비츠, 굴뚝으로 독극물을 투입한 구소련의 몰락, 여인들과 노인들 그리고 아이들의 머리 위로 원자폭탄을 투하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등을 통해 인본주의적 가치들의 경악스런 폭력성이 드러났기 때문이지요.
'68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포스트모던 시대는 인본주의적 가치들의 특성인 '획일성, 전체성, 주체성, 역사성'에 내재된 폭력성을 제거하기 위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상대성, 다양성, 타자성, 현재성을 새로운 대안으로 내세워 인본주의 가치들을 배척하고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라캉, 푸코, 데리다 같은 해체주의자들과 리오타르, 하버마스, 로티와 같은 포스모던 철학자들이 이 일을 영웅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계몽, 진리, 역사, 진보, 혁명과 같은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 개인의 미적 또는 심리적 성향, 다양한 성적 취향, 소수자의 권익, 문화의 다양성, 그리고 요리, 놀이, 주거, 관광, 레저와 같은 일상의 소중함 등에만 몰두하며 살아가고 있지요. 대형서점의 인문 베스트 목록이 이 같은 테마를 다루는 책들로 차 있는 것이 그 한 증거입니다. <신>과 같은 제 책이 그 목록에 못 들어가는 이유이기도 하고요(웃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작은 이야기들도 마땅히 해야 합니다. 라캉과 푸코가 충분히 입증했고 리오타르가 적절히 언급한 대로, 우리는 개인의 심리와 취향, 문화의 다양성,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 일상의 중요성과 같은 '작은 이야기'들을 부지런히 해야만 신이니, 자기희생이니, 이성이니, 계몽이니, 혁명이니 하는 '큰 이야기'들이 가진 폭력성들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그런 '작은 이야기'들만 할 뿐 '큰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신과 그의 이름으로 추구되던 '신본주의적 가치'들, 그리고 그것들을 위한 사랑과 헌신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에서 이야기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사회적 진보와 혁명과 같은 인본주의적 가치, 그리고 그것들을 위한 인간의 연대와 협동에 대해서는 '근대적'이라 해서 입을 닫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직 탈근대적 이야기들, 즉 개인적인 것,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 결과 사랑과 헌신을 이끌어내 인간과 세계를 가치 있게 하던 신은 죽어버렸고, 인류애와 연대를 통해 사회를 진보하게 할 이성과 주체도 소멸해버렸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바다를 갈랐던 모세의 지팡이는 부러져 버렸고, 유토피아를 향해 치켜들었던 레닌의 팔은 잘려 버렸지요. 그래서 우리는 갈 곳 몰라 헤매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거지요!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인류 역사는 이전 시대를 이끌던 가치들을 폐기하는 식으로 흘러왔다는 겁니다. 그것이 잘못된 거예요. 삶에 지표이자 목적이기도 한 가치들을 모두 폐기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호모 데우스의 시대'에 도달한 겁니다.
이 말을 하라리는 '18세기에 인본주의는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신을 밀어냈다. 21세기에 데이터교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데이터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인간을 밀어낼 것이다'라고 표현했지요.
이어서 하라리는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자본주의라는 '설국열차'를 막을 방법은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릅니다. 징후가 이미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지요. 신본주의적 가치를 다시 되살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인본주의적 가치를 다시 정립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탈근대적인 가치들도 보존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왜냐고요? 인본주의의 문제는 신본주의의 가치를 폐기해버린 데서 발생했습니다. 근대 이후 우리는 중세의 신본주의 대신에 인본주의를 내세웠는데, 이때 말하는 인본주의는 당연히 '무신론적 인본주의'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안셀무스를 따라 신이 모든 인간적 가치들의 정점이라고 한다면, 이 말은 자기모순에 빠집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를 배제한 인본주의는 이미 인본주의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러시아 혁명이 그래서 실패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본주의를 배제한 인본주의란 불가능하다는 것, 달리 말해 신본주의적 가치를 배제한 인본주의적 가치는 더 이상 가치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인본주의는 오직 신본주의를 기반으로 해야만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신을 옹호하다>를 쓴 영국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도 같은 의미에서 인본주의는 오직 '유신론적 인본주의'만 가능하다고 주장했지요.
마찬가지로 탈근대적 가치들은 인본주의적 가치를 기반으로 해야만 정당하다는 겁니다. 바꿔 말해 인본주의적 가치를 배제한 탈근대적 가치들은 정당할 수 없다는 거지요.
왜 그런지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볼까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쓴 장 지글러(Jean Ziegler)가 일한 '유엔인권위원회'나 유네스코 소속 '세계식량기구'와 같이 믿을만한 국제기구들의 보고에 의하면, 지금 우리는 세계 인구의 2배가 먹고 남을만한 식량이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세계에는 매일 10만 명 이상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고, 썩은 물과 진흙쿠키를 먹는 5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5초마다 1명씩 목숨을 잃고 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만일 우리가 계몽, 불평등 해소, 인권 옹호와 같은 인본주의적 가치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개인의 심리나 취향, 다문화적 요리와 놀이, 그리고 주거, 관광, 레저와 같은 탈근대적 이야기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에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캘리니코스, 라라인, 하비, 그리고 누구보다도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과 같은 좌파 지식인들이 탈근대적 가치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근대적 가치들의 복원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유이지요.
정리하자면, 탈근대적 가치는 인본주의적 가치를 기반으로 해야만 정당성이 있고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인본주의적 가치는 신본주의 가치를 기반으로 할 때에만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명백합니다.
우리가 지금 당면한 문제들의 해법은 먼저 신본주의적 가치들을 다시 세우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야만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호모 데우스'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음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집니다.
"세 번째는 '기독교적 사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기독교는 2,000년간 자신의 고유한 전통과 독특한 사유들을 개발해 왔습니다. 긍정의 길이라고도 불리는 '첨가의 방법(via di porre)', '부정의 길'이라고도 불리는 '제거의 방법(via di levare)'이나 '이중적 논법' 등이 그 대표적입니다.
다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가운데 이중적 논법(二重的 論法)에 대해 잠시 이야기할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독교적 사유의 본질을 잘 보여주기 때문인데요,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을 비롯한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와 개념들이 모두 이 논법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우선 삼위일체론을 보지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기 종교의 신을 설명하려 할 때, 구약의 신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시작되는 신약의 신도 이야기해야 했지요. 또 예수님이 가시면서 말씀하신 성령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삼신론(三神論)에 빠지기 쉬웠는데,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은 세분이 아니다, 한 분이시다' 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인가?'라는 물음에도 니케아 종교회의의 결론은 '하나님은 셋이고 하나다'라고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둘을 하나로 묶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삼위일체론이지요.
그리스도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라는 문제도 '참 신이고 참 인간이다'로 정리됐습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고, 신은 인간이 아닌데?' 라는 질문이 나왔지만, 이때에도 기독교는 대립되고 모순되는 둘을 하나로 묶는 이중적 논법을 사용해 답했습니다. 예수는 참 신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참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분이라는 거지요.
그뿐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예지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충돌'을 이중적 논법으로 해결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Ruther)가 신자를 '의인이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라고 규정한 것도 그렇고,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이 교회를 '성인의 공동체이자 악인의 공동체, 또는 '순결한 창녀(casta meretrix)'라고 한 것도 같은 논법입니다. 중요한 기독교 교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 그렇습니다.
이론에서만 그런 게 아닙니다. 개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보면 그것은 히브리 사상과 그리스 사상을 묶어놓았기 때문에 생긴 것인데요, 예를 든다면 그리스 말로 존재란 '토온(to on)'입니다. 그것은 영원불변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리의 근원입니다. 어떤 것이 초록색이었다가 갑자기 빨간색으로 변한다면, 그것에 대한 언급이 진리가 될 수 없지요. 그게 파르메니데스부터 플라톤으로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는 같은 존재라는 말이 '하야(hyh, håyå)'입니다. 뭔가를 '생성하다', '있게 하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뭔가 생성하려면 그 자신도 변해야 하겠지요. 따라서 하야는 매우 역동적인 개념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이름을 묻자, 하나님은 '나는 존재다'라고 답하셨습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서 나왔는데요, 이 말을 들은 히브리 사람들은 당연히 우주를 창조하시고, 역사에 관여하시며, 개인의 삶에도 참여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최초의 그리스어 성격인 <70인역>을 통해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존재'라고 계시했다는 말씀을 대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본래 의미인 생성하는 자라는 히브리적 존재 개념에 '영원불변'과 '진리의 근원'이라는 그리스적인 존재 개념이 덧붙여지면서, 그 의미가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이때부터 대립하는 두 개념이 하나로 합해져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여 진리의 근원이시면서도, 끊임없이 생성하고 창조하시는 분이 됐습니다.
말씀도 히브리어로는 '다바르(dåbår)'입니다. '뒤에 있는 것을 앞으로 내몰다', '대화하다'라는 뜻을 가졌지요. 주로 사물의 근원을 드러내고 말의 배경이나 숨은 의미를 알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어 로고스(logos), 즉 '말씀'으로 대체되었지요.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첫머리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라고 쓰면서, 창조를 이루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리스어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겁니다.
그리스어로 '로고스(logos)'는 본디 이성, 문장, 논리 등을 뜻하는 말로, 불변하고 고정된 의미를 지닌 개념입니다. 그런데 다바르와 로고스, 대립하는 이 두 개념이 합해져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의미가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불변하는 진리라는 뜻과 세계를 창조하고 인도한다는 두 가지 의미가 합해져 새로운 의미가 생겨난 거지요.
이론과 개념에서 숱하게 반복되는 이런 융합의 과정을 통해 기독교가 만들어졌습니다. 히브리적도 그리스적도 아닌 이중적 논법을 통해 기독교는 고유의 개념과 사상을 개발해 온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기독교 고유의 사유 방법을 안다는 것은 기독교가 뭔지를 이해하는 지름길이자, 기독교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이정표를 파악한다는 것이 됩니다. 저는 독자들이 제 책을 통해 이 같은 기독교 고유의 사유방법들을 익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4부 8장에 욥기와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 추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죄 없는 자의 고통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부조리에 대해 '침묵하며 외쳐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이중적 사유가 잘 드러난 문장인데, 실천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중적 논법은 대립하는 개념이나 관념을 그냥 무조건 합쳐놓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경우에 타당한 것도 아니지요. 특수한 조건 하에서만 성립도 되고 타당하기도 한 겁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자면, 19세기 서구 지성인들 사이에서 '하나님은 안식하면서 활동하신다'는 말이 유행했는데요,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에 '하나님은 세계 밖에서는 안식하시고, 세계 안에서는 활동하신다', 이렇게 세계라는 특수한 조건을 부여하면 말이 됩니다.
'침묵하며 외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부조리로 인식되는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는 침묵하고, 사람들 앞에서는 외치라는 겁니다. 칼빈신학과 해방신학을 하나로 묶어서 나온, 제 주장입니다. 칼빈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아브라함 같은 침묵을 권면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감춰진 섭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rez)와 같은 해방신학자들은 외치고 저항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셨듯, 억눌린 자들을 위해 외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구원받고 사회도 좋아진다는 입장이지요.
저는 둘 다 맞다고 봅니다. 그래서 대립하는 둘에 대해, 이것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자는 이중적 논법을 사용해 답했습니다. 이때 부여한 특수한 조건은 대상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는' 침묵하면서 감춰진 섭리를 깨달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죄 없는 자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 '사람들 앞에서는' 강하게 소리쳐 외치며 저항해야 합니다.
이는 칭의-성화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저는 죄와 악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죄와 악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서적으로도 그 뜻이 다르지요. 죄는 하나님 앞에서 짓는 잘못입니다. 그러나 악은 사람들 앞에서 짓는 잘못이지요. 따라서 죄인에 대한 대립어는 선인이 아니라 의인이고, 악인의 대립어도 의인이 아니고 선인입니다. 그리고 죄는 칭의에 의해서 사해지고, 악은 성화에 의해서 사라지지요. 전혀 다른 대립 구조입니다.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았고, 사람들 앞에서 악하지 않았다'고 자기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침묵하지 않고 외쳤지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옳지 않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옳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욥이 꾸짖을 때에도, 하나님께 대들고 저항한 것에 대해서만 책하셨지요. 욥이 친구들에게 맞선 것에 대해서는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친구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침묵하면서 섭리를 받아들일 때 의롭다 함을 얻을 것이고, 사람들 앞에 외치면서 죄 없는 자가 당하는 고통을 해소하려 할 때 성화될 수 있다는 것이 제가 욥기에서 얻은 결론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은 억눌리고 억울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외치고 소리치면서 저항하고, 이들을 구하고 도우려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침묵하면서 섭리를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하지요. 이중적 논법을 사용한 이 방법이 우리가 하나님의 부조리로 파악되는 온갖 고난들에 대처하는 올바른 자세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