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북뉴스 서평]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자유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김용주 | 좋은씨앗 | 208쪽 | 10,000원
보수적 교회(사실 근본주의에 가까운)에서 자라난 성도들은 자유주의에 대해 아주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신학은 비성경적이고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원수이고 공부할 필요도 없으며 가까이 하면 안 되는 적으로 여긴다.
필자 또한 그러한 배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이 깊게 자리잡았었다. 아마 대부분이 자유주의는 신앙을 파괴하고 믿음을 오염시키는 신학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은 자유주의의 장점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칸트, 슐라이어마허, 리츨, 하르낙의 원전을 읽고 소개하며 지난 2천년 동안 흘러내려오는 신학과 교리를 부정하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자유주의가 오늘날 현대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하는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워한다.
필자가 볼 때 저자는 자유주의의 장점을 알고 있지만, 오히려 부정적 시각으로 책을 쓰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부정적 시선을 못 박지 않고 독자들에게 생각할 자유를 준다. 자유주의 신학이 가진 한계와 문제를 잘 지적해주고, 우리가 정통 신학을 어떻게 지켜갈 수 있는지 고민하게 도와준다. 그래서 책을 통해 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 그들이 무엇을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이 16-18세기를 바로 연결하는 사람처럼 주장하는데, 적어도 이들에게 그런 교만함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원전을 통해 들려지는 그들의 주장은 필자에게 필요한 신학이 무엇인지 좋은 도전을 주었다.
잘못된 점
그러나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그들의 공통적인 잘못된 주장 몇 가지가 있다. 네 명의 인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들에게 나타나는 정통을 위협하는 잘못된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칭의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통해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는 법정적 선언으로 보지 않고 화해와 평화를 위한 인격적 기초로 본다는 것이다.
중세 때 신앙의 암흑기에서 신앙의 빛과 자유를 주었던 칭의의 개념을 겨우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요소 정도의 제한적으로 본 그들의 신학은 개인적으로 너무 아쉬웠다.
둘째, 하나님 나라를 너무 도덕 윤리적이고 현세적인 나라로 협소하게 바라본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물론 지상에 임해야하고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고 비인간적 요소들이 제거되는 도덕적인 나라를 포함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과 법과 제도와 구조 개선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현존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에 대한 회개와 근본적인 인간의 회심과 영혼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성경에서 말하는 더 근본적인 나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성경적 개념보다 현실적인 가치를 더 강조하는 것이, 자칫 사회단체에서 말하는 것처럼 보여졌다.
셋째, 성경을 온전한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이제는 보수적인 해석에서도 성경에서 말하는 과학과 역사적인 것들을 다 믿지 않고 문자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제는 문화 역사적이고 문예적 성경해석을 인정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에서는 성경을 실증주의로 보며 계시만 믿고 검증되는 것만 가치 있는 것으로 말한다.
성경의 영감에 있어서 훼손되는 부분이 있고, 성경을 하나의 고서처럼 여기는 그들의 태도가 불편했다. 물론 다양한 비평을 통해 성경의 참된 의미를 발견해가는 도구와 방법은 발달해야 하고 적용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인 그들의 입장이 성경을 고문서로 취하는 것 같아 거리감이 느껴졌다.
넷째, 개인적으로 제일 아쉬웠던 부분인데, 그들은 예수님을 도덕적인 인간이고 순종을 통해 신성에 이른 가능성 있는 인간으로 본다는 것이다.
참 하나님이고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단순히 인류애를 실현하는 성인 정도로 보는 그들의 시각이 불편했다. 물론 우리에게 주는 감동과 장점이 있고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보였으나, 근본이고 본체시고 제 2위이시고 영광과 능력과 본질이 동등하신 분이 인간 수준으로 훼손되는 것 같았다.
장점
그러나 이렇게 2천년 동안 교회의 역사를 통해 세워졌던 교리를 위협하는 주장들 외에,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소중한 주장들이 있다.
우리는 모든 교리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님을 안다. 교리와 신학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고 진공 상태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신학은 성경을 기반으로 당대의 사회배경과 중요한 신학적 논쟁 속에서 형성되었다.
초대교회 때나 종교개혁 때나, 그 시대 가운데 신학이 형성된 것이다. 현대신학자들 역시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 속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신학을 추구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학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응답이고 신학자는 시대의 아들이다.
우선 자유주의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분석하고 이해하게 도와준다. 신학이라 해서 과거에 세워진 신학을 앵무새처럼 외우고 반복하고 답습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어떤 사회이고 어떤 가치관으로 돌아가는 세상인지 이해하고 있다.
고대와 중세가 신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았던 시대였다면, 현대신학자들은 그 눈을 사람이 사는 세상으로 눈을 돌린다. 시대와 사회를 분석하고 참여하는 일에 중요성을 둔다. 필자는 책을 통해 나쁜 사람인 줄 알았던 슐라이어마허가 종교의 필요와 중요성이 무너졌던 시대에 종교의 자리를 세우는 위대한 일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개인을 넘어서는 화해와 회복에 관심을 갖는다. 그동안 보수주의는 개인의 죄 용서와 구원과 개교회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이런 성향이 더 근본적으로 변하면, 고립되어 배제하고 비판하며 더 비성경적인 신학이 된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개인을 넘어 인격이 파괴되고 인륜이 무너지는 모든 영역에 관심을 갖는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고민하고 성경적인 대안을 제공한다. 그들이 처한 역사와 사회에서 성경적 대답과 신학적 대안을 포기하지 않고 시대와 같이 호흡해간다.
또한 자유주의는 인간을 도구 삼아 그 일을 펼쳐가길 힘쓴다. 물론 이들의 죄론과 기독론과 인간론은 정통적인 면에서 부족한 것이 있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의식도 약하다.
그러나 하르낙을 포함한 이들은 복음이 통치의 의미를 지녔음을 간파하고 그 복음이 인간에게 전달될 때 인간은 그 복음으로 화해와 평화의 나라를 이루어간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인간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과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의미 있게 다룬다. 인간이 구원받았다는 것에 대한 강조보다 인간이 해야 할 역할에 비중을 둔다.
읽어야 하는 이유
그리스도인은 교리에만 매몰된 사람들이 아니다. 그 교리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되, 인간과 사회와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한다. 나의 구원으로만 끝나는 것은 기독교 정신도 아니고 신학의 의미도 아니다.
신학은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고 현실에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성경적인 대안이 되는 것이다. 교회의 성장만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공공성과 교육과 정치와 복지 등에도 보편적인 가치를 실현해 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을 읽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며, 현대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하는 것에 오히려 더 위험한 것으로 의사를 살며시 비추었다.
필자 또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미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원죄가 희미하고 복음을 통한 구원을 약하게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한다. 예수님을 인류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보는 그들의 신학은 부정한다. 또한 인륜과 도덕과 화해와 평화라는 가치보다 영혼의 변화와 구원과 회심과 성령의 역사와 예배라는 가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기독교와 교회가 해야 할 근본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자유주의를 읽고 이해하고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히 과거를 답습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에 살게 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신학을 한다.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과거의 영광을 발판 삼아 우리의 시대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무엇을 하시는가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자유주의를 싸잡아 버려선 안 된다. 오히려 함께 하나님 나라를 걸어가되 취할 것과 조심할 것, 배울 것과 위험한 것을 분별하며 공존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이 시대의 문제(남북 문제와 동북아 평화, 전쟁과 테러, 부와 가난, 환경문제 등)를 어떻게 풀어갈지 같이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나의 신학적 입장이 옳다고만 여기기보다 서로의 신학을 인정하는 가운데 더 좋은 바른 신학의 길을 걷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유일한 신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겸손이 있다면 이 자유주의는 우리에게도 좋은 자극을 주지 않을까?
방영민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