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도에서는 교회에 대한 핍박 속에서 한국선교사들이 비자의 어려움으로 절반 이상 인도를 떠나야만 했는데요. 이런 현상들을 단지 인도 정부의 탓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이 잘못한 부분들은 없는지 돌이켜보고 이를 고쳐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도의 선교 전통이 있는데요. 바로 18세기 초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로 남인도 지역에 도착한 바르돌로마우스 지겐발크와 그와 함께 일했던 할레대학 출신의 크랑코바선교회에 속했던 독일 선교사들의 선교적 유산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트랑코바선교회의 사역이 오늘날까지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유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들은 독일의 경건주의의 영향으로 인격적인 훈련과 준비가 잘 된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선교지에서 선교사들 간 갈등이 얼마나 심합니까? 또한 현지인들을 무시하는 태도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은데요. 그들은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사역을 감당했고, 지겐발크 이후에 리더가 된 슈바르쯔는 18세기의 성자라는 별명까지 얻기도 하였습니다.
둘째, 그들은 팀사역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최초로 인도의 트랑크바 지역에 도착한 지겐발크와 다른 동료 선교사는 따밀어와 포르타갈어로 사역의 분담을 하였고, 18세기 초부터 19세기 말까지 있었던 79명의 선교사가 학교, 고아원, 과부들을 위한 안식처, 병원, 신학교, 교회 등의 사역을 분담하여 모범적인 팀사역을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그들은 많은 사역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역의 중심에는 언제나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이 있었습니다. 지겐발크는 유럽 선교사들 가운데 최초로 1714년 따밀어로 된 신약성경을 번역했는데 이는 현지어로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현지인들에게 물질적인 혜택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카스트 그룹들 가운데 개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에 집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넷째, 그들은 건물이나 기관을 세우는 것보다 사람을 세우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인도의 전통에 따라 제자들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세우고 사람을 세우는데 힘을 썼습니다. 특별히 지겐발크 사후에 리더의 역할을 하였던 슈바르쯔는 탁월한 제자양성가로서 생활 속의 교육, 매월 정기 훈련 등의 제자훈련에 힘을 썼습니다. 그 결과 그의 제자들은 그 근처 소왕국의 왕과 왕세자뿐만 아니라 18세기 말과 19세기 전반기에 남인도 복음화에 큰 영향력을 끼친 전도자와 지도자가 배출되었습니다. 나아가서 그들은 현지인 리더십을 세우고 그들을 중심으로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카톨릭이나 다른 개신교 교단들은 현지인 리더십을 세우는데 매우 인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독일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현지인들을 '동역자' 또는 '순례자'라는 이름으로 일정기간 훈련을 받게 하고 정식으로 안수받은 목사와 선교사로 세우는 현지인 중심의 사역을 하였습니다. 언어와 문화적 한계를 지닌 외국 선교사들에 비해 현지 문화에 익숙한 현지 리더십이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733년 한 해만 해도 슈바르쯔는 인도인 제자들의 사역으로 3,766명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섯째, 그들은 현지 문화를 존중하고 현지의 지역 연구에 힘썼습니다. 지겐발크는 도착한지 1년만에 따밀어로 설교를 하였고, 2년 만에 2만 단어짜리 사전과 문법책을 만들었으며, 5년차에는 인도사회 연구서, 7년차에는 인도 신들의 족보 연구서, 8년차에는 신약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를 독일로 보내서 현지 언어를 습득하고 타문화권 사역을 준비하게 함으로써 실수를 줄이고 질적으로 양적으로 충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선교전략은 오늘날 모든 선교사들도 마땅히 따라야 할 원칙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역의 어려움만을 토로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 행했던 바를 고치며 바른 사역의 원칙을 세워나가는 나갈 때 성령의 도우심으로 더욱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지리라 믿습니다.
브라이트 리(Bright Lee)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