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 목사의 마지막 사도행전 설교 전문 ‘거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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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8일 주일예배 설교(행 28:30-31)]

▲이재철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교회 제공

▲이재철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교회 제공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

지금 바울은 세를 내고 얻은 로마 변두리의 싸구려 헛간에 2년째 연금당해 있다. 그 싸구려 헛간으로 바울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고, 바울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바울은 모두 영접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쳤다.

바울은 이렇게 사도행전의 막이 내리는 순간까지, 아니 이 땅에서 그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가 사도행전 20장 24절을 통해 천명했듯, 주님의 마르튀스(종)와 휘테르케스(증인)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인 본문 31절은 다음과 같이 막을 내리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사도행전 마지막 구절을 기록하면서 특별히 강조한 두 단어가 있다. 첫째는 ‘담대하게’이다. 누가가 사도행전 마지막 구절에서 왜 담대함을 강조했을까. 다시 말해 귀로 들은 하나님 말씀을 삶으로도 듣기 위해, 왜 담대한 믿음의 용기가 필요한지에 대해 지난 시간에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누가가 사도행전 마지막 구절에서 강조한 두 번째이자 마지막 단어는 부사 ‘거침없이’이다. 총 28장으로 구성된 사도행전은 바울이 거침없이 복음을 전했음을 강조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우리 말 ‘거침없이’라는 헬라어 부사 ‘아콜리토스’는 거침없이, 방해없이 혹은 자유로이 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의 강조점 역시 두 가지이다. 먼저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마르튀스와 휘페르테스로 일관한 바울의 자세이다. 바울은 이 때 인생 말년, 노년에 평생 그를 괴롭혔던 지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욱이 황제에게 상소한 미결수 신분으로 2년 동안 로마 변두리 싸구려 헛간에 연금당해 있던 바울의 한쪽 손목에는 그를 지키는 로마 군인의 손목과 연결된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그와 같은 바울의 상황은 끊임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영접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복음을 가르치기에는 전혀 적합한 상황이 아니었다. 바울의 상황은 인생 말년의 인간이 당면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시편 119편 165절 말씀처럼, 그 어떤 악조건도 바울에게는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악조건에 굴복하기에는 다메섹 도상으로 핀셋으로 집어내 주신 하나님 은혜가 너무 컸고, 자신이 연약하면 연약할수록 오히려 강하신 주님의 섭리가 더욱 신비롭게 성취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사도행전의 막이 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을 거침없이 전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거침없이 기록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인 본문의 부사 ‘거침없이’는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즉 말씀의 본질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본래 거침이 없다.

한강을 보라. 도도하게 흘러가는 한강에는 거침이 없다. 한강은 갇히거나 막힌 호수가 아니라 흐름이 멈추지 않는 살아있는 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원도에서 발원한 한강은 서해에 이르기까지 481.7km를 거침없이 굽이쳐 흐르면서 무려 3만 4,473㎢ 지역을 거침없이 적시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생명의 물을 제공하고 있다. 한강이 살아있는 덕분이다.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티끌 정도의 크기에도 미치지 못할 한강도 그 정도로 거침이 없다면, 하물며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무슨 거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흑암과 혼돈 속에서 당신의 말씀으로 거침없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 말씀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인간의 역사 속으로 거침없이 침투해 들어오신 분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거침없이 십자가 죽음의 제물이 되셨고, 사흘째 되던 날 거침없이 죽음을 깨뜨리고 일어나시어 인간을 위한 영원한 생명의 구원자가 되어주셨다.

어디 그뿐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가야 할 바른 길을 거침없이 일러 주는 인생 사용설명서이다. 이렇듯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 하나님 말씀, 복음은 본질적으로 거침이 없다.

인생 말년의 바울이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거침없이 전하고 가르치며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자신이 위대한 영웅이거나 초능력자여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생을 걸었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본질적으로 거침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사도행전의 막을 내리면서 최종적으로 강조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바울은 본문 이후 잠시 석방됐지만, 주후 64년 발생한 로마 대화재로 촉발된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인 박해로 다시 투옥됐다.

감옥에서 최후의 서신서인 디모데후서를 기록한 바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공개적으로 참수형을 당해 이 땅에서 그의 생을 마감했다. 공포의 참수형마저 주님의 마르튀스와 휘페르테스로 생을 마감하려는 바울에게는 거침이 될 수 없었다.

▲18일 100주년기념교회 주일예배 모습. ⓒ교회 제공

▲18일 100주년기념교회 주일예배 모습. ⓒ교회 제공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사도행전 9장부터 바울에게 초점을 맞춰왔다. 따라서 누가는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한 바울의 최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는 주님을 위해 참수형마저 거침없이 감수한 바울의 영웅담을 다루는 사도행전 29장을 기록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누가라면, 바울이 주님의 마르튀스와 휘페르테스로 어떻게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는지 전하기 위해 반드시 그의 참수형을 상세하게 다루는 29장을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가가 사도행전의 초점을 바울에게 맞춰온 것은 그의 영웅전을 집필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도구삼아 거침없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증언하기 위함이었다.

누가가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침없이 전한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침없이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음을 증언하는 것으로 사도행전을 마무리지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침없는 하나님의 말씀, 거침없는 하나님의 능력, 거침없는 하나님의 사랑, 거침없는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는 바울의 참수형으로 사도행전의 대미를 장식하는 29장을 기록하여 그를 영웅시하거나 미화하지 않았다. 인간 세상에서는 바울의 참수형이 위대한 순교로 투영되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거침없이 베풀어주신 은혜로 비춰보면 바울이 당한 참수형은 하나님 은혜에 응답하기 위한 일상의 삶이었을 뿐이다.

본문 이후부터 참수형을 당하기까지 바울의 삶은 일상의 삶이었고 그가 참수형을 당한 것은 주님의 휘페르테스가 겪어야 할 일상의 삶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바울의 그 일상을 다룬 사도행전 29장을 별도로 기록하지 않았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결론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침없이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믿는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문자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사도행전 29장을 우리 일상의 삶으로 엮어가야 한다는 결론이다.

오늘은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감사주일이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상대적인 조건에 기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십자가의 보혈로 거침없이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헤에 대한 절대적인 감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조건이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거침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를 통해서도, 가난을 통해서도, 병듦을 통해서도, 고통을 통해서도, 우리를 위한 당신의 신비한 섭리를 거침없이 이뤄가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그 은혜에 어떻게 감사드릴 수 있겠는가?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바칠 최상의 감사 예물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주님을 위해 거침없이 참수형을 당하는 일상의 삶으로 자신의 사도행전 29장을 완결했던 바울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바울은 우리에게 로마서 12장 1절을 통해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1)영적 예배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올려드릴 최상의 감사 예물은 영적 예배요, 그것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옛날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짐승을 제물 삼아 제사를 드렸다. 짐승을 잡아 그 피와 고기를 제물로 바친 것이다. 그러나 짐승을 제물로 바치긴 했지만 정작 제단에 바쳐진 제물은 이미 생명이 끊어진 죽은 짐승의 피와 살로 그 제물은 더 이상 산 제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해 산채로 거침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문자 그대로 산 제물이 되어주셨다. 그 거침없는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침없는 은혜에 우리 자신을 감사의 산 제물로 거침없이 바쳐드림이 마땅할 것이다.

이것을 우리 교회의 용어로 설명하면, 우리의 삶으로 ‘예배의 생활화와 생활의 예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인 오늘 본문에 기인한 사도행전의 결론을 빌어 표현하면, 일상의 삶으로 각자의 사도행전 29장을 거침없이 엮어가는 것이다.

누가가 파피루스에 먹으로 기록한 사도행전은 분명히 오늘의 본문인 사도행전 28장 31절에서 끝났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의 종결을 의미하는 닫힌 끝남이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새로운 시작을 향한 열린 끝남이다.

사도행전이 끝나는 28장 31절은 우리 각자의 삶으로 우리 자신의 사도행전 29장을 엮기 시작해야 하는 출발점이다. 질병에 시달리던 인생 말년의 바울이 주님을 위해 참수형마저 거침없이 감수하는 자신의 사도행전 29장을 일상의 삶으로 엮었다면, 주님을 위해 우리 일상의 삶으로 우리 각자의 사도행전 29장을 엮어가려는 우리 앞에 대체 무엇인들 거침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기쁜 일을 맞았다면 기쁜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슬픔을 당했다면 비통한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부유하다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가난하다면 핍절한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성공했다면 성공한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실패했다면 실패한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건강하다면 강건한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병들었다면 병약한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젊다면 젊은 일상의 삶으로 사돟애전 29장을 엮고, 늙었다면 늙은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어간다면, 그렇게 거침없이 엮어가는 우리 각자의 사도행전 29장을 통해 주님께서 이 시대 역사 속에 거침없이 이뤄가실 섭리는 또 얼마나 눈부시겠는가.

이것이 13년 4개월에 걸친 사도행전의 여정을 끝내는 마지막 주일인 동시에, 감사주일인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침없이 내려주시는 은혜의 메시지이다.

▲성도들이 흐느끼는 가운데 이재철 목사가 서 있는 모습. ⓒ교회 제공

▲성도들이 흐느끼는 가운데 이재철 목사가 서 있는 모습. ⓒ교회 제공

오늘은 감사하게도 제가 100주년기념교회를 떠나는 날이기도 하다. 2천년 전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이 땅에 강림하신 메시아를 눈으로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님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시므온은 평생 날마다 누가 메시아인지 알아봐야 한다는 영적 부담감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 영적 부담감 속에서는 매일의 삶이 긴장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그가 성전에 갔다가, 마침 정결 예식을 행하기 위해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겨 성전으로 들어오는 아기 예수를 보았다. 그 순간 시므온은 성령님의 조명 속에서 그 아기가 이 땅에 강림하신 메시아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제 평안하게 눈을 감게 된 것이다.

그 순간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자기 가슴에 안고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다는 영적 부담감에서 놓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였다.

오늘 제 심정이 그 때 시므온의 심정과 똑같다.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가 한데 어우러져 결성된 100주년기념재단에 의해 창립된 100주년기념교회는, 처음부터 지역교회가 아니라 한국교회를 위한 묘지기와 길닦이의 사명을 부여받은 교회이다.

100주년기념재단 초대 이사장과 2대 이사장이셨던 한경직 목사님의 보수 신앙과 강원용 목사님의 진보 신앙을 한데 아우르면서, 온갖 도전에 맞서 ‘묘지기와 길닦이’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제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면에 걸쳐서 부족하기만 한 제게 그것은 엄청나게 큰 영적 부담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부로 저를 그 큰 영적 부담감에서 평안히 놓아주셨다. 지난 13년 4개월 동안 제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혜도 능력도 모자란 저는 육체마저 부실해서, 지난 13년 4개월 중 2년여 동안은 암 투병으로 목회에 전념할 수 없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고 보고 있고 누리고 있는 100주년기념교회는 모두 때마다 시마다 하나님께서 거침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결과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저를 평안히 놓아주신다. 감사주일을 맞아 저는 저를 평안히 놓아주시는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신 재단의 어르신들, 그리고 오늘 100주년기념교회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주신 교우님들께도 감사드린다.

특히 이름 없이 헌신한 수많은 봉사자들에게 깊이 감사하다. 잠시 제 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양해해 달라. 후임 4인 공동 담임목사 체제가 잘 안착되고 있으므로, 후임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7개월 앞서 퇴임하겠다고 공지해 드린 것은 6월 셋째주일이었다. 그때부터 퇴임일인 오늘까지는 5개월이 남아 있었다.

그 5개월 동안 모든 교우님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작별인사를 드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5개월은 우리 교회 355개의 구역과 74개의 봉사팀 구성원들을 일일이 만나기에도 턱없이 짧은 기간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특정 구역이나 봉사팀 구성원들만 만나 작별인사만 갖는다면, 다른 교우님들이 시험받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저희 부부는 저희들과 함께 자리하기를 요청하는 구역과 봉사팀이 있으면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 그 요청에 모두 응하기로 하고, 그대로 실행해 왔다. 그때마다 제 처가 모임에 참석한 모든 봉사자들에게 선물을 드렸다. 아내는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교회가 창립될 당시 목사는 저 혼자뿐이었다. 두 달 후부터 전임목회자가 차례로 합류하기는 했지만, 매주 늘어나는 교인들을 섬기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부족했다. 갓 조직된 교회 봉사팀들의 기틀이 확립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교회 창립 초기 양화진에서 일어나는 모든 중요한 일의 현장에는 저를 대신해서 제 아내가 불려 나갔다. 가장 많게는 하루에 9번 불려 나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13년 4개월의 세월이 흐른 지금, 100주년기념교회의 공식 문서 어디에도 정애주라는 이름 석 자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아내는 ‘교회 곳곳에서 이름도 없이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봉사자들의 귀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했다. 그 귀한 마음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초청해준 모든 봉사자들에게 선물을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100주년기념교회의 공식 문서에 이름이 기록되지도 않은 수많은 봉사자들이 없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교회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이름 없는 봉사자들과 보이지 않는 밑가지들이다. 13년 4개월 동안 수고하신 이름 없는 봉사자들과 보이지 않는 밑가지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비록 100주년기념교회 공식 문서에 여러분의 이름이 단 한 글자도 기록돼 있지 않아도, 이사야 49장 16절 말씀처럼 여러분 개개인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새겨놓으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그 귀한 헌신을 거침없이 다 보고 알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당신이 약속하신 상급으로 여러분을 영원토록 영화롭게 해 주실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각자의 이름을 몰라도 우리 각자의 이름을 개별적으로 알고 계시고 우리 각자를 개별적으로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형언조차 하기 어렵다.

▲이재철 목사가 축도하고 있다. ⓒ교회 제공

▲이재철 목사가 축도하고 있다. ⓒ교회 제공

많은 분들이 오늘 100주년기념교회를 퇴임하는 제가 내일부터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궁금해 하신다. 13년 4개월 전 제가 살던 집 옆에 100주년기념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더라면, 세워졌더라도 저와 무관한 교회였다면, 저는 당시 이미 20년째 살고 있었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난 양화진에서 계속 살면서 양화진에서 제 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제가 양화진에 세워진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가 된 이상, 퇴임 후 제 여생을 양화진에서 보낼 수는 없게 됐다. 퇴임 후에도 제가 양화진을 떠나지 않는다면, 제 후임자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창립 직후부터 저희 부부는 퇴임 후 여생을 시골에서 지내기로 하고, 한반도 어느 곳이든 평당 10만원짜리 땅이 나오는 곳을 생애 마지막 정착지로 삼기로 했다. 평당 10만원이라고 책정한 것은 그 정도 가격이라야 저희 부부의 형편에 맞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골이라 해도 집을 지을 수 있는 마을 속의 땅으로 평당 10만원짜리 땅은 부동산 투기가 판을 치는 한반도 땅에서는 찾기 어려울 것이라 여겼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택정해 주셔야만 가능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저희 부부는 지방에 연고가 있는 몇 분에게, 평당 10만원짜리 땅에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수 년이 지나도 평당 10만원짜리 땅을 만날 수는 없었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나왔다고 한 적이 있었지만, 정작 매입하려 하자 가격이 치솟았다. 그런 땅은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를 위해 택정해 놓으신 곳일 수 없었다.

2013년, 제가 암 수술을 받고 투병할 때였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다 경남 거창으로 이사한 교우님이 제 아내에게 연락했다. 거창군 웅양면 산 중턱 마을에 평당 10만원짜리 땅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 땅의 주인은 서울 사람이 땅을 매입하려는 것을 알고서도, 땅값을 올리지 않았다. 바로 그 땅이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를 위해 택정해 놓으신 땅이었다.

저희 부부는 돈을 모으지 않으므로, 아이들이 그곳 땅을 매입해 주었다. 그리고 작년부터 대출을 받아 집을 짓기 시작했지만, 건설업체를 잘못 만나 공사가 중단되고 공사비가 떼이는 곤욕을 치르며 겨우 완공되어 이사까지 모두 마쳤다.

처음에는 15평 컨테이너 두 동을 붙이려 했는데, 한 교우님이 재능기부로 설계해 주셔서 애초 계획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멋있는 집이 되었다. 오늘 4부 예배가 끝나는 대로 저는 그 집으로 갈 예정이다.

저희 부부는 내일부터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를 위해 택정해 주신 그 마을에서, 저희 부부의 사도행전 29장을 일상의 삶으로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그 마을에는 40가구 8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대대로 땅의 작물을 수확하며 살아온 분들이다.

모든 인간은 누군가의 손을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난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받아주지 않으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죽고 말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을 때에도 누군가의 손을 빌어 이 세상을 떠나간다. 연고자 없는 걸인조차 죽으면 누군가의 손을 빌어 매장되거나 화장되기 마련이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누구에겐가 빚을 지고 태어나서 누구에겐가 빚을 지며 세상을 떠나가는 빚쟁이들인 셈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그 누구에게 사랑의 빚을 감는 채무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에게 여생 동안 그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대상으로 붙여주신 분들이 바로 그 마을 사람들이다.

근래 제 눈길이 아내의 손등에서 멈췄다. 서울에서 먼 길을 오가면서 그 마을에 집을 짓고 이사하느라 수고한 아내의 손이 많이 상해 있었다. 그 손을 제가 측은한 마음으로 쓰다듬자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손과 발이 움직일 수 있을 때 더 많이 사용하고 가야지’.

그 말에 제 마음이 찡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과 발을 주신 것은 예쁘게 가다듬기만 하라고 하심이 아니라, 흙이나 재로 사그라들기 전에 누군가를 위해 더 많이 사용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제 저희 부부는 주님의 마르튀스와 휘페르테스로, 손과 발이 움직일 수 있는 동안 더 많이 사용해서 그 마을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저희 부부의 사도행전 29장을 일상의 삶으로 엮어갈 것이다.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 없는 거창군 웅양면의 산 중턱 마을에서, 저희 부부의 마지막 사도행전 29장을 일상의 삶으로 엮을 수 있도록, 거침없이 섭리해 주신 하나님 은혜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4부예배가 끝남과 동시에 100주년기념교회의 공식 담임목사는 후임 4인 공동 담임목사이시다. 훌륭한 네 분의 목사님들을 100주년기념교회 2대 공동 담임목사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거침없는 은혜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그 네 분의 영성과 역량이 한데 어우러지면, 저 같은 사람은 그 분들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0장 17절.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체의 생명을 거침없이 버리신 것은 죽음을 깨뜨리는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얻기 위함이셨다. 주님께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의 제물로 거침없이 버리지 않으셨다면, 만민을 살리시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육체의 소욕을 거침없이 버려야 깊은 영성을 얻을 수 있다. 오늘을 거침없이 버려야 새로운 내일을 얻을 수 있다. 낡은 부대를 거침없이 버려야,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를 지닐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후임 공동 담임목사님들을 통해 거침없이 내려주실 새로운 차원의 은혜를 얻기 원하신다면, 교우님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이재철을 버리셔야 한다. 저는 13년 4개월 전에 100주년기념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제 자신의 유익을 취하기 위해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가 된 것이 아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따른 마르튀스와 휘페르테스의 사명을 다한 뒤 떠나기 위해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가 됐고,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그리고 저의 떠남은 여러분들이 저를 버림으로써만 완결된다. 여러분은 이재철을 버리시되, 적당히가 아니라 철저하게 버리셔야 한다. 이재철을 크게 버리면 크게 버릴수록, 후임 공동담임목사님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침없이 내려주실 새로운 차원의 은혜를 더 크게 누리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실 그 거침없는 새로운 차원의 은혜 속에서 온 교우님들과 후임 공동 담임목사님들, 그리고 온 교역자들이 한 마음이 되어 주님의 휘페르테스와 마르튀스로 사도행전 29장, 각자의 사도행전 29장과 100주년기념교회의 사도행전 29장을 일상의 삶으로 지금부터 엮어가자.

그 사도행전 29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이 시대의 미래를 지구 반대편의 미래까지 날마다 당신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새롭게 심어주실 것임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는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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