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여성독립운동 신앙인 최덕지·안이숙·조수옥 재조명
항일여성독립운동 신앙인 최덕지·안이숙·조수옥 재조명 학술세미나 ‘죽으면 살리라’가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사단법인 아침(이사장 고규군) 주최로 개최됐다.
주제발표와 토론 시간에서는 김정일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가 ‘최덕지를 중심한 여성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김대응 목사(한국침례교회역사연구회 회장)가 ‘일본 국회를 호령한 안이숙’, 최재건 교수(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가 ‘조수옥의 신사참배반대운동과 그 삶’ 등을 차례로 발표했다.
이후 이정은 박사(3·1운동기념사업회장,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원)를 좌장으로 전갑생 박사(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와 이명화 박사(도산학회장), 오병환 박사(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 연구관) 등의 패널토의가 이어졌다.
“최덕지, 일제 ‘5대 황민화 정책’ 모두 거부한 맹렬 지도자”
먼저 김정일 교수는 “여성 지도자 최덕지(1901-1956)는 1938년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통과시키자 반대운동에 뛰어들어, 전국적 조직화를 위해 부산·경남 일대 400여명의 교회 지도자들을 포섭하고 신사참배의 성경적 부당성과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 저항할 것을 천명하고 운동자금까지 제공했다”며 “그녀는 네 차례 예비검속을 당했을 뿐 아니라 당시 악명 높았던 평양 형무소에 수감돼 해방될 때까지 소위 일제의 ‘5대 황민화 정책’을 모두 거부한 맹렬 지도자였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스스로 ‘여성으로서 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자신하며 남성을 능가하는 투철한 신앙과 저항의식을 발휘한 그녀는 해방 후 김린희·박신근·이광록 등과 함께 재건교회를 출발시켰다”며 “월남 후 1948년 2월 예수교 재건교회 남한지방회를 출발시키고, 철저한 회개와 주일성수, 우상타파의 기치를 내세우며 3대 주의와 5대 강령을 지도방침으로 정하고 한국교회의 완전한 재건을 위해 헌신했다”고 했다.
그는 “부산·경남 지역을 선교구역으로 맡은 호주 선교부는 일차적으로 다른 곳에 비해 여성 선교사가 현저히 많았고 여성교육에 치중했다는 색다른 특징이 있었다. 이들에 의해 유치원 교육과 보육 활동이 많이 이뤄졌다”며 “해방 후 최덕지가 최초로 선교가 아닌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추진했던 일이 유치원 설립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고 말했다.
김정일 교수는 “최덕지의 기독교 여성 지도자 사역은 3기로 나눌 수 있다”며 “1기는 어린 시절과 청년 시기를 보낸 통영대화정교회에서 집사직을 받고 교사 또는 유년부장과 도천리 기도실 책임자로 봉사하던 시기, 2기는 1932년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해 신학공부를 한 후 여전도사로 활동하며 일제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해 민족운동을 병행한 시기, 3기는 해방으로 출옥한 후 한국교회 재건을 위해 헌신·노력하던 시기”라고 했다.
김 교수는 “신사참배 반대투쟁은 민족운동이었고, 동방요배를 비롯한 일체의 황민화정책에 반대한 것은 일제의 신도국가주의와 천왕 신격화를 통한 한국인의 민족혼을 말살하려 한 제국주의 정책에 반기를 든 애국운동이자 독립운동이었다”며 “여성으로서 유교 교조주의적 사회인식을 무릅쓰고 부산·경남 지역 남녀 종교지도자나 학생들에게 참배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40여회 400여명에게 저항의식을 교도한 것은 여성민족운동 독립운동의 표상”이라고 했다.
“안이숙, 박관준과 함께 항일운동 했음에도 훈장 못 받아”
김대응 목사는 “안이숙(1908-1997)은 1928년 일본 교토여자전문학교 가정과 졸업 후 귀국하여 대구 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와 선천 보성여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2년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각 지역 기독교계 학교에서 해마다 문제가 되자, 교직을 그만두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전념했다”며 “1938년 일경에 연행됐으나 극적으로 탈출해 은신했다. 이듬해 2월 박관준 장로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3월 종교통제를 목적으로 종교단체법안을 심의하던 일본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 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유인물을 뿌리고 체포됐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광복 후 공산정권의 탄압을 피해 월남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LA에서 한인침례교회를 개척하고,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간증집회를 열었다”며 “저서로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살리라>, <당신은 죽어요>, <그런데 안 죽어요>, <낫고 싶어요> 등이 있다. 한국 대전에서 1995년 새누리침례교회를 개척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안이숙은 박관준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다. 정부는 박관준의 공훈을 인정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지만, 안이숙은 공훈을 인정받지 못했다. 의아한 일”이라며 “안이숙의 공적내용은 박관준의 공적내용 중 사적인 내용을 제외하고는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김대응 목사는 “안이숙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일제의 국가적 종교정책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신앙의 자유를 허용해야 함에도, 현인신이었던 천황에게 한국민을 법적으로 굴복시키는 창씨개명을, 정신적으로 굴복시키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다”며 “이 강요는 한시적이 아닌 무한 강요였고, 종교적 신앙의 문제로 국한시킬 수 없는 그 이상의 것, 즉 일제라는 국체에 순종하지 않고 한국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종교를 통한 국가적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한 것이었다”고 했다.
김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 박해를 당하고 순교한 이들의 피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그루터기가 됐다”며 “오늘 우리는 신앙으로 일제를 대항하고, 나라와 민족이 해방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과거 피흘린 순교자들의 피 위에 교회와 나라가 서 있음을 기억하고, 이들의 희생에 대한 예우를 국가에서 기념해 주는 것이 국가의 책무일 것”이라고 주문했다.
“조수옥, 결과적으로도 일제 치하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최재건 교수는 “조수옥(1914-2002)은 일제 말 신사참배를 거부한 소수의 크리스천들 중 한 사람이었고, 평양감옥에 수감됐다 해방 후 석방된 출옥성도였다”며 “그의 남은 삶은 옥중생활의 고난을 승화시킨 자선사업가가 됐다. 1946년부터 고아원을 설립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노인 무료병원을 세우는 등 사회사업가로서 여생을 마쳤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일치를 깨닫고 신앙과 삶을 일치시킨 신앙인으로서, 애국자의 삶을 이 땅에서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갔던, ‘믿음의 어머니로 일생을 사신 분’”이라고 정리했다.
최 교수는 “신사참배 반대 투쟁자들의 1차 동기는 대체로 신앙에 연유했지만, 그렇다고 모두 신앙에만 국한되진 않는다. 어느 한 간단한 사건도 원인이 복합적이듯, 생명을 내건 신사참배 반대운동도 교회 내 신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며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원흉인 신사와 천황에 대한 반대는 극히 일부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당시 한국인에게 자동적으로 연계된 것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신사참배 반대자들의 투쟁이 신앙운동에 그쳤다는 인식 아래, 어떤 이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어떤 이는 인정받지 못하는 이중 규정이 적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수옥의 신사참배 반대투쟁은 독일 저항신학자 빌헬름 니젤의 제자인 와타나베 노부오가 인터뷰해 책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으로 정리됐다. 조수옥은 와타나베와의 인연으로 일본교회를 순방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부당성을 알리기도 했다”며 “자신의 과거 신앙 체험 위주로 강연하다, 일본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고 밝혔다.
최재건 교수는 “조수옥은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더불어, 결과적으로도 일제 하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일제 말기 대다수 한국인들은 독립을 체념하고 우선 살기 위해 외적으로 친일 성향을 표했기 때문”이라며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신앙의 힘에 의해 민족 앞에서 끝까지 의연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조수옥은 교회의 본질적 요소, 본래적 사명, 참된 신앙적 훈련을 오늘날 교회가 수행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신앙의 수동적 확신을, 당시의 어려운 신사참배 강요에 능동적으로 견지했다. 이는 그의 소박한 믿음의 승리였다”며 “조수옥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신앙인이었고 애국자였다. 영향력 있는 유력한 인사가 아닌 지방의 한 젊은 연약한 여인이었지만, 계명과 말씀에 순복하는 하나님 사랑에는 강했다. 고아들과 약자들을 위해 한평생 헌신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