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7일
눅10:17-20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 70인 기뻐하며 돌아오다
예수님은 70인 전도인을 세우사 자신이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보냄을 받은 70인 전도인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왔습니까?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돌아올 때의 모습이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처음에 떠날 때에는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가지지 않는 초라한 모습으로 떠났습니다. 많은 두려움도 안고 떠났습니다. 떠날 때에는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지는 않을까? 과연 사람들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까? 전대와 배낭도 없는 우리는 숙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많은 두려움을 안고 초라한 모습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70인 전도인들은 떠날 때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돌아왔습니다.
이것을 보면 떠날 때의 모습보다 돌아올 때의 모습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가끔 떠날 때에는 의기양양하게 떠났는데 돌아올 때는 고개를 숙이고 패잔병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는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떠났는데 돌아올 때에는 개선장군의 모습처럼 승리의 영광을 가지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험을 치르는 사람도 보면 시험장에 들어갈 때의 모습 보다 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치르고 나올 때의 모습이 더 중요합니다. 학교나 직장도 들어갈 때의 모습보다 나올 때의 모습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도 처음 만날 때보다 헤어질 때의 모습이 더 중요합니다. 시작할 때의 모습보다 마무리를 지을 때의 모습이 더 중요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보니까 어떤 교역자는 면담을 할 때 사례비는 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는 정말 오륜교회 와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꼭 이 곳에서 와서 사역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간청을 합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면 문제를 일으키고 떠나갑니다. 지금 70인 전도인들은 떠날 때는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떠나갔지만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기쁨이 충만하여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떠날 때의 모습보다 돌아올 때의 모습이 더 중요합니다.
■ 귀신들의 항복
그러면 왜 70인 전도인은 그토록 기뻐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전도 보고를 하였을까요? 그들이 그토록 기뻐한 기쁨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17절b)
그것은 귀신들의 항복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귀신들린 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자 귀신들이 항복하였습니다. 귀신들이 항복했다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였을 때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사로 보냄을 받은 전도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명령할 때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들이 떠나가는 것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귀신들이 자기들 앞에 굴복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기쁨으로 돌아와 흥분된 목소리로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 하더이다"라고 보고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귀신들이 항복했다는 말을 부정과거 시제가 아닌 현재 시제로 말하였습니다. "항복하더이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굴복시킨 그 현장의 감동과 기쁨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너무나 큰 감동을 받고 큰 기쁨을 갖게 되면 그 기쁨과 감동의 여운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왜 이런 기쁨과 감격이 없을까요? 왜 오늘 우리에게는 복음의 권세와 능력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감격이 없을까요? 왜 이런 간증이 없을까요?
그 이유는 오늘 나에게 전도의 현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덥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는 영적전쟁의 현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이론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말씀을 듣기만 하고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기만 하고 복음을 전하는 영적 전쟁의 현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답답하십니까? 마음이 무겁습니까? 신앙생활의 감격이 없습니까?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에 빠지셨습니까?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두렵습니까? 자신이 초라하게 보이십니까? 점점 신앙생활이 황폐화되어가고 마음이 굳어져가고 계십니까?
신앙생활의 년 수를 자랑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순종하여 복음을 들고 나아가 보십시오. 우리는 그 현장에서 핍박도 당하지만 귀신들이 나에게 항복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니 준비된 영혼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을 잃어버린 자는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야 말로 가장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전도야 말로 가장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보니까 전도하는 사람이 간증이 많습니다.
복음의 권세와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현장으로 나아가십시오.
■ 전도는 가장 치열한 영적전투
그런데 전도는 가장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입니다. 항복이라는 말은 오직 전투에서만 쓸 수 있는 용어입니다. 입사에 실패했는데 항복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잘못 봤는데 항복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싸움에서 승리했을 때에만 항복이라는 용어가 사용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가장 치열한 영적전쟁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사슬에 매여 불타는 지옥을 향하여 끌려가는 영혼을 구원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영적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 전쟁의 현장에는 무승부가 없습니다. 승리와 패배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승리하든지 패배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세상의 전쟁에는 무승부도 있습니다. 절반의 승리 절반의 패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구원해 내는 영적 전투는 승리와 패배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적 전쟁은 주님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승리하셨기에 이미 승리가 보장된 전쟁입니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나아가 복음을 전했던 70명의 전도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영적전투의 현장에서 귀신들이 자신들에게 항복하고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복음의 권세와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일로 인하여 흥분하고 감격하고 기뻐하였습니다.
■ 내가 보았노라
예수님은 기쁨으로 돌아와 흥분된 목소리로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보고를 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18절)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전도인들이 보냄을 받은 현장에서 귀신을 쫓아낼 때 귀신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았다는 말이 미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전도인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신 다음에도 '계속적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들이 나아와 귀신의 항복 소식을 말하기 전에 이미 복음을 전하는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라고 말씀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내시고 방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디서 자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상황 가운데 있든지 나 몰라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들이 스스로 알아서 모든 것을 해결 하도록 하라며 무관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전도의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 전투의 현장을 집중력을 가지고 뚫어지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영적 전투의 현장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의 현장도 보고 계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타고 앞서 벳세다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한 복판에서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산 속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힘겹게 노젖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막6:48절)
예수님은 풍랑을 만나 괴로이 노를 젓고 있는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깊은 밤, 육지에서 십리나 떨어진 바다 한 복판에서 괴로이 노를 젖고 있는 제자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주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밤 4경(새벽3시-6시)에 물 위를 걸어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풍랑을 만나 괴로이 노를 젓고 있는 당신의 지친 모습을 주님은 보고 계십니다. 아내와 자녀들 앞에서는 당당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당신의 지친 모습을 주님은 보고 계십니다. 인생이 너무 힘들어 살아갈 용기마저 잃어버린 당신의 모습을 주님은 지금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양 중에 '주 나의 모습보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주 나의 모습 보네 상한 나의 맘 보시네
주 나의 눈물 보네 홀로 울 던 맘 보시네
세상 소망 다 사라져 가도 주의 사랑은 끝이 없으니
살아가는 이 모든 순간이 주 은혜임을 나는 믿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누군가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사람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그 영적 전투의 현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십니다. 아니 인생의 풍랑을 만나 힘겹게 노를 젖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누군가로 배신을 당하였을 때 결코 나 혼자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 영적 전투의 현장을, 내가 처한 고난의 현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시는 주님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전하면서 받는 핍박과 멸시와 외면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실패하고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체념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지금 주님이 당신을 보고 계십니다. 주님이 당신을 외면하지 않는 한 당신의 인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지금 당신의 삶의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 하나님의 자녀 된 자에게 주어진 권세
계속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사인 우리에게 주어진 권세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19절)
예수님은 전도자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뱀과 전갈은 사탄과 그를 따르는 졸개들을 말합니다. 뱀과 전갈은 둘 다 치명적인 독을 가진 동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단의 세력을 상징할 때 뱀과 전갈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사단의 세력을 상징하는 뱀과 전갈을 밟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밟는다는 것은 곧 승리를 말합니다. 따라서 뱀과 전갈을 밟는다는 것은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가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대사로 보냄을 받은 저와 여러분에게는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권세를 누가 주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주었으니"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엄청난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분명히 요1: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그런데 이런 권세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권세를 깨닫지도 못하고 사용하지도 않은채 살아가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내어 쫒는 것은 은사가 아니라 권세입니다. 그리고 이 권세는 미래의 어느 순간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때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를 할 때 "말 주변이 없는 내가 어떻게....." "배운 것이 없어서..."라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리심을 입어 주님과 함께 하늘 보좌에서 통치하고 다스리는 자들입니다.
■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예수님은 70인 전도자들이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할 때에 그것으로만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20절)
제자들은 귀신들이 항복할 때 기뻐했습니다. 물론 이 기쁨도 보통 기쁨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탄의 세력을 정복한 사역만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귀신들의 항복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의 증거로 인한 기쁨도 필요합니다. 사역의 열매로 인한 기쁨도 필요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으로 말미암는 기쁨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보다 더 엄청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기쁨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곧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천국 백성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구원을 받았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은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그 사실,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그 사실을 인하여 더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사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우리는 사역으로 인한 기쁨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말고 내가 구원받은 사실을 인하여 더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구원의 기쁨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열매를 맺었어도 사역으로 인한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역으로 인한 기쁨도 정말 대단한 기쁨입니다. 가슴이 벅차올라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기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고한 만큼 열매를 맺지 못하고 기도하고 희생한 만큼 변화되지 않으면 낙심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된 축복은 영원합니다. 구원의 축복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사는 사역으로만 기뻐하지 말고 은사와 능력으로만 기뻐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그 구원의 은총을 인하여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힘들어도, 사업에 실패했어도, 병들어도, 인생의 풍랑을 만나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하고 하박국 선지자처럼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구원의 기쁨은 항상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기쁨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는 자입니다. 기쁨의 근거를 자신에게 두는 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내 자신의 성품과 행위와 사역의 열매로 인하여 기뻐하려는 자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에 근거한 기쁨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그 일들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속적인 기쁨의 근거는 우리가 한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행위와 성품과 나의 사역의 열매와는 상관없이 내 이름이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사로 나아갔던 전도인들은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돌아왔습니다. 주의 이름 앞에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을 인하여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인하여 기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더 나아가 오늘 나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대사인 우리는 인생이 힘들어도 고난이 겹쳐도 인생의 풍랑을 만났어도 나를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최대 위기는 핍박이나 환난 어려움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위기는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사라지고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고 성령으로 인한 기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내 안에 이 사역의 기쁨이 없다면 어떻게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내 안에 구원의 기쁨이 없다면 내게 엄습해 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어떻게 몰아낼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내 안에 이 기쁨이 없다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상의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대사인 내 안에 이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