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4월 12일 故 한경직 목사
본지는 故 한경직 목사님의 생전 설교 전문을,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제공으로 매주 한 차례, [그 때 그 설교] 코너에서 소개합니다. 한 목사님은 얼마 전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고인의 생전 설교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에 생생히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1:1~11
먼저 제가 말씀드리기 전에 마태복음 27장 55절과 56절 두 절을 봉독하여 드리겠습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쫓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다음 주일이 바로 부활주일입니다. 오늘 이 주일은 흔히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때에 큰 무리가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입으로는 '호산나'를 부르며 영접한 것을 또한 기념합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은 흔히 고난주간이라고 부르는데, 문자 그대로 주님이 고난을 받으셨고 그 절정은 골고다 곧 십자가입니다. 지금 읽은 마태복음 27장 55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때에 갈릴리에서부터 쫓아온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고 하는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고난주간에 말하자면 멀리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비록 멀리서라도 우리가 참으로 눈을 들어 골고다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 하나하나를 도우셔서 우리의 신령한 눈을 열어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축복을 더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시간에 우리 모두 신령한 눈을 들어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를 앙망하십시다. 흠 없고 죄 없는, 백옥같이 맑고 깨끗한 그리스도는 그 추한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그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고 못 박힌 두 손자욱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 내립니다. 창에 찔린 가슴으로부터는 물과 피가 쏟아집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수정같이 맑은 그 심령, 백옥 같이 깨끗한 그 마음, 삶의 참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신 그 몸이 어떻게 이렇게 추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이러한 모순, 이러한 역사의 비극이 어찌 인간 역사상에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인간의 역사 가운데 나타난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깊은 의미를 일단은 오직 성경에 돌아가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일찍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 때에 예수께서 나오심을 보시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이와 같이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린 양'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옛날 이스라엘 백성과 어린 양은 무슨 관계를 가졌던 것입니까?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옛날부터 그들은 인간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어린 양을 잡아 속죄의 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왔노라"고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신 근본 목적이 많은 사람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대속물이 되시기 위하여 오셨노라고 친히 증언하십니다.
또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일서 4장 10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친히 기록하시기를 로마서 5장 6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그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리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기록합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린 속죄의 제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우리 인간성은 모두 부패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계속하여 또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는 성경에 선언한 대로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느니라" 그대로입니다. 죄에는 값이 있습니다. 그 최종의 값은 사망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모두 멸망을 받을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은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올시다. 그러므로 멸망 받는 이들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쉽게 생각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그저 용서만 해 주시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볼 수도 혹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용서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올시다. 공의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우주를 다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하면 이 우주의 도덕적 질서가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죄를 지은 이가 그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하여 어린 양을 대신 드려서 그 피를 흘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림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도를 영원히 또한 반복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누가 능히 만민, 곧 우리 인간 모두의 죄를 대속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분을 우리 인간 중에서는 찾을 수는 없습니다. 왜요? 인간은 누구나 다 죄를 짓는 까닭입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인간 아닌 어떤 다른 영적 존재가 인간의 죄를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가령 천사가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는 없습니다. 왜요? 그는 단순히 인간이 아닌 까닭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우리 인간이면서 죄가 없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을 읽어 보세요.
주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많은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하나님 앞에 단번에 희생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금 이후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얻는 넓은 길을 열어놓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속죄의 제사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 공의를 세우시고 동시에 그 사랑을 나타내시며 범죄한 인간들에게는 사죄와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예언하기를 "그가 찔림을 받은 것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을 입은 것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장 5절에 이미 예언하셨는데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 고난주간에 우리 하나하나는 내 죄를 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주님의 얼굴을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죄는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가공할 일입니다. 빈 손 들고 십자가 앞에 나와 중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사함을 받으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여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오직 우리는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할렐루야 찬송을 그치지 마십시다.
그리고 둘째로,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깊은 의미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우리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큰 상처 곧 고통이 있음을 십자가는 보여줍니다. 비유를 통하여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여기에 한 어진 어머니가 계십니다. 또 그에게 귀한 아들이 하나 있다고 합시다. 이 어머니는 그 아들을 극진히 사랑합니다. 장래에 대하여 큰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아들이 뜻밖에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큰 죄를 범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렇게 되면 그 죄의 결과로 제일 먼저 상처를 입는 이는 누구이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어머니입니다. 왜요? 어머니는 그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혹은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어진 부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자기의 남편을 극진히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범사에 그를 믿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그 남편은 큰 범죄를 비밀리에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 때에 제일 먼저 그 남편의 범죄로 말미암아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이는 누구입니까? 물론 그의 아내입니다. 왜요? 그 아내는 남편을 극진히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이에게 죄가 들어올 때에는 그 죄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이 먼저 마음의 상처를 입고 고통을 받습니다. 상처와 고통은 사랑에 정비례합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그 상처는 깊고, 사랑이 뜨거울수록 그 고통은 더욱 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와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와 같은 사랑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범죄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중심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가슴 속에서는 고통의 십자가가 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갈보리 산 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사랑의 하나님의 가슴 속에 세워진 그 고통의 십자가의 역사적 표현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의 성품과 그의 교훈과 생활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그의 생활의 절정인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깊이 상한 그 상처를 또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내가 짓는 죄는 하나님의 가슴 속에 십자가를 세운다는 이 엄숙한 사실을 잊지 아니하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내가 한 가지 죄를 더 지으면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그 십자가 위에, 말하자면 못을 하나 더 박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내가 짓는 죄는 하나님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셋째로,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여 줍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음성, 그리스도의 간절한 말씀을 우리는 또 좀 들을 줄 알아야 할 겁니다. 갈보리 산 위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는 온 인류를 향하여 무엇을 말합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아마 무슨 말씀보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사도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한 외침이올시다.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믿는 이들에게 또한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권면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장 34절과 35절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이 명령을 또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 명령을 이어받은 사도 베드로는 또 이렇게도 권면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할 것이 많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가르칩니다.
사랑은 과거의 모든 허물과 죄를 서로 가리어 줍니다. 덮어 줍니다. 옛날의 허물이나 이야기를 다시 하지 아니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겨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사랑을 배워 살라고 십자가는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십자가의 권면을 이렇게 권합니다. 내가 비록 천사의 말을 하고 많은 지식이 있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더 길게 말하지 못합니다. 사도 요한은 십자가의 권면을 이렇게 전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 기도합시다.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비록 저희들의 마음이 어둡고 미련하나 이 시간 우리의 신령한 눈을 열어 이 고난 주간에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내 죄를 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신 주님의 얼굴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또 내가 잘못해서 짓는 죄는 하느님의 가슴 속에 새로운 십자가를 세우는 이 무서운 일임을 저희들이 깊이 깨달아 이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무엇보다도 이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통해서 권면하는 하나님의 말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주 안에서 하나가 되라는 이 권면을 다시 한번 들을 수 있는 은혜의 주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