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강좌 ‘3·1운동과 기독교 그리고 김마리아’ 주제로
2019년 봄학기 홍성강좌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 근대사의 카이로스 3·1운동과 기독교 그리고 김마리아’라는 주제로 개막했다.
9일 시작된 강좌는 매주 화요일 5차례 양현혜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부)가 진행하게 된다. 첫 강좌는 ‘한국 근대사의 카이로스 3·1운동과 기독교 그리고 김마리아’는 주제로 진행됐다.
양 교수는 1919년 3.1운동의 현황과 민족사적 의의를 소개하고, 현재 남북한과 일본 등에서 3.1운동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알리면서 이 기억이 ‘통일’돼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많은 행사와 강의가 진행됐지만, ‘반짝’ 하고 말 수 있다. 우리는 3.1운동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기념하고 기억하는가”라며 “남과 북이 다르게 기념하고, 3.1운동과 직접 관련된 일본도 굉장히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 크게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큰 질문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국가 대신할 ‘민족’의 힘 발견하게 했던 3.1운동
양현혜 교수는 “3.1운동은 33인의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이 웅변했듯 한국 민족이 강요된 노예상태에서 자유를 향해 자기를 일으킨 사건으로, 3-5월 1,542회 시위에 연인원 202만여명이 참가했다”며 “박은식의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에 따르면 3-5월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검거자 46,948명 등으로, 중국 5.4운동과 비교할 때 엄청난 희생을 동반한 항일 민족독립 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또 “이렇게 한국인들은 자유인들에게 합당한 용기와 지혜를 나라 안팎에 증명해 보였다”며 “3.1운동은 한민족 역사에서 물리적인 수평적 시간을 뚫고 들어와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역사를 여는 질적으로 다른 성스러운 시간, 즉 한국 역사의 ‘카이로스적 시간’이었다”고 했다.
이와 함께 “3.1운동 이후 민족 해방운동사는 압도적인 폭력의 힘 앞에서 자유로운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믿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과 실천으로 형성해 온 역사”라고도 했다.
양 교수는 “3.1운동은 무단통치로 조선인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자부하던 조선총독부가 사전에 아무런 정보도 입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진,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었다”며 “조선총독부를 향해 ‘왜 이러한 대규모 사태를 미리 알지 못했느냐’는 비난이 일본 내에서 빗발친 것처럼, 일본 제국주의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다”고 소개했다.
그는 “3.1운동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운동이 아니었다. 과거의 민족 운동, 즉 의병 운동과 계몽 운동을 반성하며,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독립 운동의 방략을 모색하는 오랜 숙고와 준비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며 “학생들과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민족 세력이 종교적 편견을 뛰어넘어 통일 전선을 이루었고, 농민 대중과 지방 유생들은 이 운동을 대중화해 전국으로 전파했다”고 했다.
양 교수는 “조선인들은 3.1운동을 통해 문화적 실체를 자각하고 민족 자결의 정치적 의지를 다져갔다. 그리고 국권 상실 속에 국가를 대신할 ‘민족’의 힘을 발견했다”며 “‘민족’이란 인종이나 혈통이라는 ‘사물적 조건’이 아니라, 오직 ‘너와 나로 이루어진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공동의 자기의식으로부터 발생한다. 조선인들은 마침내 역사 형성의 공동 주체로서 ‘민족’을 자각하고, 민족적 정체성과 주체성을 확보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남한, 3.1운동 ‘민족 단결’ 표상으로 형상화
이후 남북한 교과서나 언론 매체, 공식 역사서에 나타난 ‘기억 투쟁’을 살폈다. 그는 “다른 체제의 남과 북에서 한국 민족해방 운동의 수원이자 집합적 동력인 3.1운동에 대한 해석이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띠게 됐다. 3.1운동에 대한 해석 주도권 장악이 곧,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라며 “나라가 분단됐듯, 3.1운동 해석을 둘러싼 사회적 기억 역시 분단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양현혜 교수는 “남한의 경우, 해방 후 첫 교과서는 1946년 군정청 학무국에서 발행한 <초등 국사교본>이었다. 여기서는 한국 근대사를 3.1운동, 임시정부(임정), 의사들의 활동, 광복군의 선전 포고-해방이라는 구도로 서술했다”며 “3.1운동 배경으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강조되고, 임정이 민족해방 운동을 이끈 것처럼 서술했다”고 말했다.
전쟁 후인 1954년 제1차 교육과정에 의거해 발행된 <중등 국사>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3.1운동과 임시정부와 직결시키고, 3.1운동을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의 결과로 서술하고, 그 결과 일본이 문화 통치로 전환됐다고 체계화했다. 이러한 체계화는 이후 대한민국이 견지하게 된 3.1운동의 기본적 서술 기조가 됐다. 이러한 기조에 균열이 보여지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역사교과서의 검인정 체제로의 전환이었다.
양 교수는 “남한은 최근까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 직결시키면서, 임시정부의 민족주의 계열 중심으로 3.1운동 이후의 민족 해방 운동사를 해석했다”며 “한편 3.1운동 정신을 역대 정권 담당 세력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재해석하는 ‘기억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고 정리했다,
북한, 3.1운동을 ‘사회주의 혁명’ 영향으로
양현혜 교수는 “북한도 김일성이 3. 1운동에 대해 ‘일제에 대해 전 민족적 투쟁을 전개한 날이며 우리 민족이 자기의 자유를 위해 고귀한 피를 흘린 날’이라며 중요성을 인정했듯, 3.1운동에 대해 크게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 서술 기조는 남한과 상당히 달랐다”고 언급했다.
북한 교과서는 3.1운동이 사회주의 10월 혁명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3.1운동이 민족 대표자들의 안이한 방략으로 실패한 것이 전환점이 되어 이후의 조선 역사가 노동자 계급이 지도하는 운동의 새로운 단계, 즉 근대를 지나 현대로 진입했다는 점, 따라서 앞으로의 민족해방 운동은 전위 정당의 지도 아래 강력한 무장투쟁으로 준비돼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특히 1960년대 발행된 <조선력사>는 3.1운동의 공식 명칭을 ‘3.1 인민봉기’로 확정했다.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한 역사서술 방침에 의거해 노동자와 농민의 진출을 강조한 명명으로, 현재까지 고수되고 있다. 여기에 1981년 출판한 북한의 공식 역사서인 <조선력사>에서는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부친 김형직의 영향을 강조하는 등 ‘김일성 가계의 활동’을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양 교수는 “주체사상에 의거한 김일성의 가계 중심의 서술뿐 아니라, 운동의 발상 지역이 평양이라는 점도 강조됐다”며 “김형직이 3.1운동 지도자였다는 것은 평양 중심의 주장과 더불어, 지도자 중심의 역사관을 위한 ‘기억 투쟁’ 작업의 일환이라 할 것”이라고 했다.
‘분단’된 3.1운동의 기억, ‘통일’을 위한 기억으로
양현혜 교수는 “이처럼 남북이 분단됨에 따라 체제의 정통성을 중심으로 3.1운동에 대한 기억을 전유하기 위한 ‘기억 투쟁’ 속에서 그 기억도 분단됐다. 그럼에도 중요한 교집합은 있다”며 “남북한 모두가 중요시하는 것은, 3.1운동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한국인을 정치적으로 드러내는 대표적인 기억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양 교수는 “3.1운동에 대한 집합적 기억은 한국 민족이라는 역사적 주체를 반영하고, 민족 자결을 추구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표상한다”며 “즉 3.1운동의 기억은 한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의 전범(典範)이자 표상이고, 언제나 한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증폭시키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따라서 한민족의 역사의 ‘카이로스’로서의 3. 1운동에 대한 기억은 남북한 정권이 독점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 조선인들이 계급·계층·종교·성별·지역의 장벽을 넘어 하나가 된 3.1운동은 한민족 전체의 기억이고, 따라서 3.1운동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주체 역시 한민족 전체이다. 요컨대 3.1운동은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는 민족의 공동 기억”이라고 강조했다.
3.1운동 100주년, 남북 공동 기념의 의미
양 교수는 “2018년 ‘9.19 평양공동선언’ 4조 3항은 ‘3.1운동 100주년을 남북이 공동으로 기념하기로 하고, 그를 위한 실무적인 방안을 협의해 나가기로 함’을 명시했다. 남북 공동의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는 3.1운동을 그 원래 자리인 민족 전체의 기억의 자리로 복원시키는 첫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와 함께 “남북의 분단된 3.1운동에 대한 기억을, 통일의 길을 열어가는 민족 공동의 기억 자산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며 “3.1운동에 대한 민족 공동의 기억은 남북 주민들로 하여금 분열과 적대의 역사를 청산하고, 상생과 화합의 길을 열어가는 지혜와 통찰력의 보고가 되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양현혜 교수는 “이를 위해서는 남과 북 양측이 체제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낸 해석의 틀인 민족주의-사회주의, 서울 중심 남쪽 지방-평양 중심의 북쪽 지방, 선-악이라는 적대적 이분법의 틀에서 3.1운동을 해방시켜야 한다”며 “그리고 반세기 동안 남과 북이 각각 축적한 연구 성과를 상호 존중하고, 3.1운동에 대한 기억을 더 풍성하게 해 민족 공동의 기억 자산으로 복원시켜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