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리울의 달 11] 제5장 귀무덤(1)
가을이 아직 채 끝나기도 전에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전신주를 휘윙휘윙 울리며 점점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다.
겨울 채비를 미처 할 여유가 없는 가난한 식민지의 백성들은 미리부터 동장군의 위세에 눌려 헐벗은 몸을 움츠린 채 떨었다.
총칼을 앞세운 일본의 위세는 그런 겨울바람보다 더 차갑고 매서웠다.
그럴 무렵 남궁억이 입교 세례를 받은 것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현실도피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도둑놈들을 싸워 물리쳐야 할 판에 교회로 숨어 들어가 홀로 편안해 보겠다는 것인가?”
남궁억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는 어떤 문제를 두고 심사숙고한 후 일단 스스로 옳다고 판단하면 꿋꿋이 실천해 나가는 성품이었다. 말만 많고 실행하지 않는 것은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재 상황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집에서나 교회에 나가서나 자기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의 자주독립과 헐벗은 백성들의 안녕을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리고 해외에서 고생하며 독립투쟁하는 이들이 무사하기를 함께 기도했다.
언젠가 그는 친구 윤치호에게 마치 농담처럼 “우리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이 땅을 천국처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바르고 힘찬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지만 남궁억은 억지로 일본을 사랑하려고 하진 않았다. 다만 일본을 증오할 그 에너지를 모아 우리 민족 내부를 알차게 성숙시켜 힘을 기르는 일도 이 시점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일은 자기가 해야 할 소명이라고 여겼다. 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청소년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자라나는 청소년이야말로 미래의 희망이었다. 한 자루의 양초처럼 제 몸을 태워 사라질지라도 불꽃을 피워 올려 청소년들의 두뇌와 가슴속을 밝힐 수 있다면 행복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 새싹이 바르게 자라 큰 나무로 우뚝 설 때 이 나라는 되살아나 악의 나라를 물리치고 전세계 식민지의 빛이 되리라고 믿었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악착같이 살아왔다고 자부할 때도 있긴 있었지만, 모세나 예수님 그리고 이 세상의 위대한 성자님들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을 뿐이야.”
남궁억은 수업이 비는 시간에 학교의 창가에 서서 혼잣소리로 중얼거리며 쓸쓸히 미소지었다.
초겨울 바람이 부는 운동장에서는 흰 운동복을 입은 학생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체육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먼 거리 때문에 아주 작아 보였으며, 커다란 은행나무의 가지를 흔들어대는 거센 바람에 날려 가버릴 듯이 위태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라는 것처럼 낭랑한 목청으로 소리지르며 뛰어다녔다.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겠지.”
남궁억은 빙긋이 미소를 띠며 굵은 손가락으로 허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는 석상처럼 가만히 선 채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남궁억은 서울 정동의 왜송골에서 태어났다.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거리던 무렵인 1863년의 추운 겨울이었다. 첫눈이 희끗희끗 내렸다.
왜송골이란 동네 이름은 임진왜란 때 왜군 장수인 카토 키요마사가 말고삐를 맨 소나무가 있다는 데서 붙여졌다.
그의 아버지는 철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중추부사를 지낸 바 있는 남궁영이었다. 그는 아들이 태어나자 이름을 억(檍)이라고 지었다.
박달나무나 참죽나무처럼 참되고 단단하게 자라 달라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소년은 어머니와 함께 쓸쓸하게 살았다.
홀어머니는 팔을 걷어붙이고 닥치는 대로 남의 일을 하면서 살림을 꾸려 나갔다. 아들이 자라 서당에 다닐 나이가 되었으나 가난하여 그러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걱정이 많이 되었다.
아버지마저 안 계시니 그냥 두었다가는 사람 구실을 하기가 어려우리라고 짐작되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부러 냉정하고 엄격하게 아들을 대하고 손수 하나하나 품성교육을 시켰다.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 말거라. 너 자신에겐 칼날처럼 엄격하고, 남에겐 솜처럼 포근하게 대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소년은 혹시라도 어머니가 염려할까봐 항상 몸가짐을 단정히 했다. 그러면서도 동무들과 놀 때는 누구 못지 않게 천진난만하고 활발했다.
동네 아이들은 틈만 나면 동구 밖의 큰 소나무 밑에서 말타기 놀이를 했다. 가장 나이 많은 아이가 마부 역을 맡았다.
“야, 준비해. 억이 니가 가장 날래니까 먼저 해라. 자, 힘껏 뛰어올라!”
억은 민첩한 동작으로 뛰어 맨 앞쪽으로 가볍게 올라탔다. 뒤이어 아이들이 줄줄이 말등에 올라탔다.
“이랴 이랴, 어서 가자!”
억은 짐짓 박차를 가하는 시늉을 하면서 소리쳤다. 그러다가 문득 소나무에 기대 선 마부 아이의 머리 위쪽에 박혀 있는 큰 못으로 손을 뻗어 그걸 잡곤 말했다.
“이게 바로 어른들이 말씀하신 그 대못이구나.”
“그래, 왜놈 장수가 그랬다지.”
“나쁜 놈들, 이렇게 큰 못을 나무에 박아 놓다니!”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은 사람의 귀와 코를 마구 베어 소금에 절여 가서는, 사람을 이만큼 많이 죽였다고 자랑했다더군. 그러면 일본 국왕이 한 개에 얼마씩 정해서 상금을 줬대. 일본엔 그것을 모아서 묻어 놓은 귀무덤이란 게 있대.”
“아, 정말 악독하구나!”
억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빨을 갈았다.
“그뿐인 줄 알아? 우리나라의 귀한 보물이란 보물은 다 자기네 나라로 훔쳐간다더라.”
마부 아이가 대꾸했다.
“총칼로 우리나라를 빼앗으려는 강도 놈들! 두고 봐라, 내가 크면 꼭 원수를 갚아 줄 테다!”
억은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 모습은 마치 말을 탄 소년 장수 같았다.
그 무렵엔 나라 안팎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나라 안에서는 못된 벼슬아치들이 백성들의 피같은 재산을 빼앗아 자기 배를 채우기에 바빴고 밖에서는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이 조선을 탐내어 호시탐탐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또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의 강대국들도 경제적인 무역을 핑계로 침략의 손길을 뻗쳤다.
김영권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