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4월 5일 故 한경직 목사
본지는 故 한경직 목사님의 생전 설교 전문을,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제공으로 매주 한 차례, [그 때 그 설교] 코너에서 소개합니다. 한 목사님은 얼마 전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고인의 생전 설교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에 생생히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사도행전 2:36~47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결론이올시다. 오순절의 큰 은혜를 받아서 방언을 말하며 큰 기쁨이 충만하게 될 때에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기 위하여 그곳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사도 베드로는 열한 사도와 같이 일어서서 그들에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먼저 이와 같은 현상은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과 같이 무슨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 선지자 요엘의 예언대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실이라고 분명히 명언(明言)을 한 후에,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냈으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이 십자가의 죽음도 결국은 성경의 뜻대로 된 죽음이라고 말씀을 한 후에,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부활케 하심으로 과연 이분은 구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주가 되시는 것을 증거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구주가 되는 것을 오순절에 확증한 것입니다. 이 설교는 기독교 복음을 전파한 제일 처음 설교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전파는 이 설교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늘 특별히 1년에 한 번 전도부 주일로 지키는 오늘, 사도시대에 전도를 어떻게 했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간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조용히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간단하게 말하면 세 가지 방법으로 전도를 하였습니다. 첫째는 말로 전도했습니다. 둘째는 행위로 전도했습니다. 셋째는 교회 생활로 전도를 했습니다. 이 한 가지씩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들은 입을 벌려서 말로 예수의 십자가를 증거하고 예수의 부활을 또한 증거한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도 말하였지만, "사도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이렇게 사도행전 2장에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뿐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서게 될 때에 역시 입을 벌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예수께서 구주가 된다고 하는 것을 증언한 것입니다. 스데반뿐 아니고,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 회당에 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전도를 할 때, 아덴에 가서 아레오바고에서 많은 철학자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할 때에, 혹은 가이사랴에서 베스도 앞에서 아그립바왕 앞에서 역시 입을 벌려서 말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구주가 된다는 것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전도는 일시에 여러 사람에게 전도하는 말씀인 까닭으로, '대중 전도', 혹은 '공중 전도'라고 우리가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말로 전도할 때에 다른 형식의 전도가 있습니다. 가령 빌립이 가이사랴에 가서 전도한 것을 보면, 많은 사람을 모아 놓고 전도한 것보다도 개인 개인을 접촉해서 전도한 모양입니다. 길 가다가 구스 여왕 간다게의 그 유명한 세력 있는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만나서 수레를 같이 타고 가면서 이사야를 해석해 주면서 개인으로 전도한 그러한 기록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공중으로만 전도한 것이 아니고, 집집이 다니면서 전도를 했고, 거리에 나가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는 대로 개인적으로 또한 전도를 한 것입니다. 말로 전도하는 가운데는 공중 전도뿐이 아니고 개인 개인 전도가 많아요. 예수님의 전도도 이 두 가지 방법을 병용을 했습니다. 산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산상보훈을 가르칠 때에는, 말하자면 대중에 대한 공중 전도올시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유를 가르치실 때에 역시 일제히 수천 명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어떤 저녁에는 조용히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 한 사람을 만나서 전도를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 하나를 만나서 전도를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 사람 한 사람을 만나서 전도를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조용히 그들에게 또한 천국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가만히 읽어 보면, 대중 전도뿐 아니고 이와 같은 개인 전도를 통해서도 복음이 각처에 퍼진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명 전도자가 안디옥에도 먼저 가서 교회를 세웠고, 무명 전도자가 로마에까지 가서 교회를 세웠고, 생명책에만 이름이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개인 개인 전도를 통해서 복음을 사방으로 전파한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말로 전도하는 가운데 말의 전도를 보충하기 위해서 어떤 이가 또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가령 마가 같은 이는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생활과 교훈을 기록해서 다른 사람이 읽게 했습니다. 말을 보충해서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마태는 마태복음을 썼고, 누가는 누가복음, 요한은 요한복음, 또 사도 바울이 여러 교인들에게 자기가 이미 가르친 것을 더 분명히 가르치기 위해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사도시대에 문서 전도가 시작된 것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사도시대에 보면 말로 먼저 전도했는데 공중 전도, 개인 전도, 문서 전도 이 세 가지 방면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현대에 와서 볼 것이면, 문화가 발전됨으로 말미암아서 말의 전도를 보충하는 여러 가지 기계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확성기 같은 것이고, 라디오 같은 것이나 TV 같은 것이 다 우리의 말의 전도를 도와 줍니다.
인도에 있는 도마교회 같은 데서는 1년에 한 번은 온 교인이 다 모여서 대회를 여는 풍속이 있는데, 한 번에 3~4만 명이 모인다고 합니다. 전에 확성기가 없을 때에는 한 사람이 가운데 서서 크게 설교를 한 마디 하면, 멀리 서서 그 말을 들을 만한 곳에 선 사람이 그 말을 듣고는 다른 사람에게 또 전해주고 또 전해주고 이렇게 해서 수만 명에게 일시에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확성기가 나온 이후에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지금은 라디오를 통해서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일시에 전국을 비롯해서 온 세계까지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오늘이 된 것입니다. 또 지금은 멀리 있는 사람까지도 얼굴까지 보면서 전도를 할 수 있는 TV도 생기게 된 것입니다. 시대와 환경은 변하였지만, 지금도 이 전도는 우선 말로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중으로 전도해야 되겠고, 문서로 전도를 해야 되겠고, 대중으로 전도를 해야 되겠고, 개인 개인이 만나서 또한 말로써 전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몇 가지 방법 가운데 누구나 할 수 있고 언제나 할 수 있고, 어디서나 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제일 편리한 전도 방법이 어느 것인지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그건 다른 게 아니고 개인 전도입니다. 이 전도하는 것을 전쟁에 비유하면, 문서 전도나 방송 전도 같은 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와 싸워서 그 나라를 점령하고자 할 때에 비행기를 보내서 폭격하는 것이나 군함을 보내서 함포사격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먼저 문서 전도나 방송 전도를 통해서 기독교 진리로써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기독교 진리를 깨닫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전쟁에서 공군 폭격만으로는 온전한 승리는 거두지 못합니다. 폭격을 다 한 다음에, 함포사격을 다 한 다음에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압니까? 육군이 있어야 합니다. 보병이 있어야 합니다. 직접 원수의 영토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점령해야 완전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여러분, 개인 전도자는 무엇과 같은가 하면 육군과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 종종 등록하는 이들의 사정을 들어보면 보통으로 하는 말이 방송을 통해서 우리가 진리를 들었습니다. 혹은 책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서 우리 교회에 오게 됐습니까? 물어보면 아무 집사가, 아무 친구가 나보고 오자고 그래서 이 교회로 왔다고 대답합니다. 어떤 때는 별로 공부 못한 이가 대학 교수를 인도해 가지고 우리 교회에 나온 적도 종종 있습니다.
이렇게 문서 전도나 방송 전도 같은 대중전도가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아무래도 가장 효과가 있는 것은 개인 개인이 하나씩 하나씩 인도하는 개인 전도자가 많아야 합니다. 사도시대에는 하나하나가 개인 전도자였습니다. 안드레가 예수를 만난 다음에 이어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로 인도해 왔습니다. 빌립이 예수를 만난 다음에는 같은 동향사람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해 왔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이 꼭 옳습니다. "천사같이 말 못하고 바울같이 못하나 내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 사도시대에 교인들은 하나하나가 개인 전도를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신자였습니다.
둘째는 가만히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그때 믿는 사람들은 행위 혹은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말의 전도가 물론 필요하지만, 말만 가지고는 아니됩니다. 말과 행위가 같이 해야 됩니다. 어떤 때는 말은 잘하지만 그 사람의 행위가 말과 같지 않으므로 말미암아서 아무리 잘한 말이지만,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게 되는 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해서 저희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착한 행실은 무언(無言)의 전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회개하기 전에 큰 감화를 받은 일이 있다고 할 것이면, 아마 스데반의 순교의 모습을 본 그것일 것입니다. 아마 사도 바울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그 논리에 의지해서 과연 예수님께서 메시아겠다, 이렇게 깨닫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아마 잊을 수 없었던 것은 그와 같이 위험한 자리에서 스데반이 담대하고 용감하고 침착하고, 더욱이 그와 같이 위험한 자리에서 그 얼굴이 변해서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나는 그 모습, 자기를 죽이려고 돌로 치는 그 사람들을 향해서 최후로 부르짖는 말씀이 "아버지시여, 이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이와 같은 일을 하오니 이 사람들의 죄를 그 머리에 돌리지 마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그 모습을 사도 바울이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을 것으로 압니다.
무언의 전도야말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4장이나 5장을 읽을 때에, 제사장과 그 공회원들이 사도들을 불러다 놓고서, "왜 이 복음을 전파하지 말라고 했는데 너희들이 그런 복음을 전파하느냐?" 이때에 이 사람들이 담대히 하는 말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것입니까? 사람의 말을 순종할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본래 생각하기는, 이 사람들은 다 갈릴리 어부요, 불학무식한 사람들인데, 이렇게 담대히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거 다 무언의 전도입니다.
초대 교인들의 그 생활 자체가 진실하고 성결하고, 사랑의 실천적인 생활은 무언의 전도가 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병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병든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병이 나아서 깨끗함을 얻은, 이런 모든 일들도 무언의 전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욥바에 사는 다비다와 같은 여자가 다른 사람을 구제하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지어 입히고, 일생 봉사 생활한 것도 온 욥바 전체에 무언의 전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심히 필요합니다.
오늘날도 우리 믿는 사람의 행위와 행동과 이 일이 무언중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생활이 진실하고 그 생활이 성결하며 사랑과 봉사로 무언 가운데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생활을 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참 이와 같은 행위와 행동으로써 무언의 전도를 하는 분이 많이 있는 것을 저는 항상 감사히 생각합니다. 그런 가운데도 가만 보면, 특별히 우리 교회 안에서 여러 부서가 다 교회를 봉사하고 전도를 잘하지만, 아마 특별히 이런 방면으로 전도 많이 하는 부서는 상례부나 봉사부나 혹은 각 구역을 맡은 권찰들일 것입니다.
어떤 가정에 큰 슬픔을 당할 때에 가서 같이 위로해 주고, 같이 눈물을 흘리며 옷을 지어 주고, 모든 수속을 보아 주고, 여럿이 같이 모여서 정성껏 장례식을 치러 주고 산에까지 같이 가고, 그다음에 또 가서 위로해 주는 이런 모든 것은 무언 중에 다 전도가 됩니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마련해 주고, 밥 굶는 사람에게 쌀을 마련해 주고, 어려운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든지 피차 와서 직업을 알선해 주고, 피차에 서로 상부상조 하는 것은 다 무언의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안의 자선 사업 기관도 물론 불쌍한 이를 위해서도 일할 것이지만, 이런 일도 다 무언의 전도가 됩니다. 교육 사업이나 의료 사업이나 자선 사업이나 이 모든 것도 그 자체를 위해서 하거니와 이것 역시 무언 가운데에 모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의 전도가 됩니다.
네팔 같은 나라에, 지금도 선교사로는 그 나라에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잘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잘 믿는 의사들이 가서 병을 고쳐 주면서 개인으로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잘 믿는 의사가 그의 의료사업을 통해서 복음을 많이 전파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믿는 사람들도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성 프란시스의 이런 유명한 얘기는 우리가 항상 기억합니다. 한 번은 제자들을 데리고 아시시 거리를 한 바퀴 빙 돌고 돌아오면서 아무에게도 말 안하고 그냥 자기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이 놀라서 하는 말이, "이번엔 뭐 하려고 시간은 시간대로 허비하고, 전도는 도무지 하지 않고 그냥 거리를 돌아왔습니까?" 성 프란시스가 하시는 말씀이, "말로 하는 전도만 전도가 아니다. 우리의 모습과 우리의 걸어가는 행동과 이 자체가 무언의 전도인 것을 너희들이 기억해라." 그는 행위로써 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교회의 생활을 통해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자, 오늘 아침에 여러분이 다 이 성경 본문을 읽었지만, 그 가운데에 제가 몇 절을 다시 읽을 때에, 그때의 교회 생활이 어떠했는가를 이 성경책을 통해서 상상해 보세요.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사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자, 이런 몇 절이 그때 교회 생활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들은 다 사도의 가르침에 순복하였습니다. 이들은 성도의 교제를 가졌습니다. 이들은 유무(有無)를 상통하고 상부상조를 했습니다. 이들은 항상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이들은 항상 같이 모여 서로 이따금 떡을 떼어 먹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성찬식이나 애찬식 혹은 친목회를 자주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기도에 힘썼습니다. 이들은 찬송에 힘썼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 생활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게 돼요. 이렇게 되니 자연히 구원받을 사람이 구름같이 교회로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교회 생활 자체가 복음의 간증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화평과 사랑과 기쁨과 경건의 교회 생활, 동거동락(同居同樂)하며 성도의 교제가 있는 교회 생활은 언제나 큰 전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무엇보다도 화평해야 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이 하나가 되게 한 것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유감이지만, 우리 한국 교회는 특별히 이 방면에 실패한 점이 많습니다. 이 방면에 특별히 반성할 필요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여러분, 어떻게 이때 이 예루살렘 교회가 이와 같은 교회가 됐나? 그저 한마디로 말하면 오순절에 성령을 받음으로부터 이와 같은 교회가 됐습니다. 오순절에 어떻게 이들이 성령을 이와 같이 충만히 받게 되었나? 그저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의 믿음과 기도였습니다. 그들은 다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나보고 예수의 부활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 믿음에 의지해서 성령을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이 교회로 하여금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게 했습니다. 하나하나가 성령이 충만한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를 개인으로도 전파했고, 교회로도 전파했고, 말로도 전파했고, 행위로도 전파했고, 생활로도 전파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전도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지상 명령이올시다. "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예수님께서 최후로 우리 믿는 사람에게 명령한 말씀이올시다. 기억하십시다. 전도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요 살 길입니다. 개인의 살 길도, 민족의 살 길도 오직 복음에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도 복음을 믿는 데 있고, 이 썩어져 가는 사회를 구할 길도 오직 복음에 있습니다. 요새 보니 반공과 방첩의 표어가 사방에 붙어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표어를 붙이기만 한다고 반드시 반공이 되고 방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의 사상이 변화해서 과연 참된 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고, 참된 인간 생활의 철학을 바로 가지게 되고, 참된 인생관을 바로 가지게 될 때 자연히 반공의 생활을 하고 방첩의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남한에는 큰 전도의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열린 문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세 가지 방면으로 전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먼저 말로 전도해야지요. 그러나 우리의 행실로 전도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교회 생활로써 전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시간 약속하신 성령으로 우리 교회 우리 각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하신 은사를 내려주셔서 우리 하나하나가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고, 능력을 받아서 우리의 말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우리의 변화된 생활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오직 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 생활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