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리울의 달 15] 제7장 독립문(2)
독립협회는 치욕스런 그 모화관을 헐어내고 독립관을 지었으며, 영은문을 헐어 버린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자주독립과 자유민주 정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남궁억은 독립협회가 창립될 때부터 수석총무와 사법위원의 중책을 맡아, 기우는 나라를 구하려는 한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는 무슨 일이든 오직 나라를 중심으로 삼아 옳고 그른 것을 가려 정정당당하게 처리했으므로, 사람들은 ‘남궁고집’이라고 부르곤 했다.
독립협회는 또한 독립신문을 펴내 나라 안팎의 주요 소식을 알리는 한편 외세의 침략을 몰아내고 홀로 서자는 자주정신을 끊임없이 일깨웠다. 주필은 서재필이 맡았고, 한글판 독립신문은 주시경, 영문판 독립신문은 남궁억이 맡아서 발간했다.
그 무렵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을 침탈하는 데 가장 큰 방해요소로서 왕비였던 명성황후를 지목하고 제거하고자 했다. 그것은 일명 ‘여우사냥’으로 불렸다.
새벽에 경복궁 안의 옥호루로 숨어 들어온 일본 낭인들의 손에 의해 명성황후는 처참하게 시해당했다. 시신마저 향원정의 녹원에서 불살라지는 수모를 당했다.
왕비 살해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시아버지인 대원군은 그 틈에 잠시 권력을 되찾는 듯했다. 하지만 고종 황제가 자신의 아버지마저 믿을 수 없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함으로써 대원군은 곧 실각하고 말았다.
일국의 황제가 왕궁에 있지 못하고 피신하여 외국 군대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그 처지는 말이 아니었다.
그 기회를 잡은 러시아 공사는 고종에게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함경도의 광산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경제적인 이권을 차지했다.
남궁억을 비롯한 독립협회 간부들은 러시아 공관으로 달려가 고종에게 호소했다.
“폐하, 이건 나라의 수치이옵니다. 어서 환궁하셔서 정무를 살피셔야 합니다.”
얼마 후 고종 황제가 경운궁으로 돌아오자 독립협회 회원들은 상소를 올렸다.
“친러파인 이범진과 러시아 공사를 해고하십시오. 그리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중추원 의원을 뽑아서 정치에 참여케 하십시오.”
조정에서는 독립협회가 여론에 미치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가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겨우 허락을 했다.
그러자 조정의 수구파들은 1898년 가을에 거짓 보고를 올렸다.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국을 건설하려 합니다.”
고종은 즉시 독립협회 해산명령을 내리고 이상재, 남궁억 등 독립협회 회원 17명을 구속했다. 이른바 익명서(匿名書) 사건이었다.
감옥에 갇힌 독립협회 회원들은 반역 도당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했다. 당시엔 이미 일본 경찰력이 감옥의 형벌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남궁억은 ‘학춤’이라는 극악한 형벌을 당했다. 학춤은 밧줄로 양 어깨를 걸어서 뒷등으로 모아 빗장을 꽂아 올리는 고문으로서 마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때마다 굴복하지 않고 견뎌낼 수 있었던 건 늙은 어머니의 쪽지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사식을 넣을 때 밥 속에다가 ‘너보다는 나라를 생각하거라’는 쪽지를 넣어 주었던 것이다.
또한 열일곱 살이 된 아들 염은 감방 앞에 거적을 깔고 엎드려 울부짖었다.
“죄 없는 우리 아버님을 어서 내어놓아라!”
그는 열흘 동안이나 단식투쟁을 하며 계속 부르짖었다.
이에 흥분한 민중들이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소란이 일자 당국은 별수 없이 구속했던 애국지사들을 석방하고 말았다.
독립협회는 결국 해산되고 말았으나, 그 후 만민공동회로 이어지다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로 그 정신이 계승되었다.
남궁억은 대한협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어 바쁘게 일했다. 그는 교육과 문화의 발달을 추구했으며, 나쁜 풍습을 고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강연회를 통해서 국민의 권리와 의무 등에 대해 자세히 알려 민주의식을 넓혀 나갔다.
또한 기관지인 ‘대한협회회보’를 창간하여 국민들이 정치, 역사, 철학 등에 대한 교양을 깊이 지니도록 애를 썼다.
회보 제3호에는 다음과 같은 남궁억의 글이 실렸다.
“바늘은 비록 작은 물건이지만 그 귀 부분도 있고 끝 부분도 있으니, 그 끝 부분을 제거해도 쓸모가 없으며 그 귀 부분을 제거해도 쓸모가 없다. 하물며 거대한 사회를 어찌 한 사람의 지혜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두루 넓게 견문을 구하여 경영의 기초를 세우는 것은 선진의 직분이고, 앞날의 험난함과 평이함을 예상하여 그 설 자리를 굳게 하는 것은 청년의 책임이다.
한가로움을 틈타지 않고, 헛된 것을 찾지 않으며, 그림자를 좇지 않고, 각각의 직분을 다하여 힘써야 하리라.”
남궁억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성심을 다해 일했다.
여러 모로 어깨가 무거웠으나 그는 거인처럼 민족의 역사를 짊어지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김영권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