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리울의 달 21] 제10장 보리울 가는 길(3)
그들은 한 지점에서 길을 꺾어 고갯길을 올라갔다. 거기서부터는 첩첩산중이었다. 한 구비를 돌아 오르고 보면 또 산이 막아섰다.
여느 지역의 산과 달리 강원도의 산은 나무숲이 울창했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그들이 걸어 올라온 가파른 길이 흐릿하게 보일 뿐 초록빛 숲만 울울한 채 바람에 쓸려 수런거렸다.
높은 산길 앞에서 뭉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어르신 올라가실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 좀 업히십시오.”
“아니다. 한 발짝 두 발짝 걷다 보면 결국 넘어가게 되겠지. 인생이 어차피 그런 것인걸.”
남궁억은 단호하게 말하고 앞서 걸어 올랐다. 사실 남궁억이 걸어서 보리울로 간다고 했을 때 가족과 친구들은 모두 말렸다. 성치도 않은 노인의 몸으로는 어림없다며 걱정했다. 이번만은 수레나 가마 등 탈것을 이용해야 한다고 간곡히 권했다.
그러나 남궁억은 웃으며 말했다.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때 걸어야 몸에 좋으니 염려들 마소. 일부러 시간을 내서 등산하는 사람도 많은데 왜 이런 등산 기회를 놓치겠소.”
사람들은 유명한 남궁고집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리하여 가족은 필요한 준비를 좀 더 해서 나중에 수레를 타고 오기로 했던 것이다.
굽이굽이 이어진 고갯길을 돌아 오르던 남궁억이 한 마디 했다.
“오르막길 같은 힘든 길을 오를 때는 정신집중이 필요하거든. 지난날의 어떤 좋았던 일이나 절실했던 일들을 생각하다 보면 힘들 줄도 모르고 저절로 올라가게 된단 말야.”
그러고는 스스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사실 남궁억에게 강원도의 산천은 처음이 아니었다. 꼭 먼 조상들이 살다가 산소에 묻혀 잠들어 있는 곳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남궁억은 1906년 봄에 강원도 양양군수로 부임하여 1년 8개월간 재임했었다.
그는 부임한 얼마 후에 근대식 학교인 현산학교를 설립했다. 미래에 독립운동의 주인공이 될 어린이와 청소년을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현산학교는 양양 지역의 유지들로 위원회를 조직하여 기부금을 모으고 문중의 재산을 합친 4천환을 들여 동헌 뒷산에 세웠다.
남궁억은 양양 지역의 유지들과 군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애국충정이 담긴 시조를 지어 읊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결의를 표현하였다.
“설악산 돌을 날라 독립 기초 다져놓고
청초호(靑草湖) 자유수를 영 너머로 실어 넘겨
민주의 자유강산 이뤄 놓고 보리라.”
현산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역 유림의 일부는 근대식 학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양양에서 관직을 지낸 정현동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신 같은 고리타분한 사람이 많아서 우리나라가 이 꼴이 된 줄 모르겠소? 고리타분한 악몽에서 깨어나도록 볼기라도 치고 싶구려!”
남궁억은 정현동을 위협도 하고 달래기도 하여 결국 동의를 얻어냈다.
그는 현산학교에 온 열정을 쏟았다. 근대적인 학교에 입학하지 않으려는 지역 주민의 가정을 방문하여 학생을 모집했으며, 나중엔 각 가정에서 한 명씩의 자제를 의무적으로 학교에 보내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현산학교 개교식에는 200명의 학생이 모였다.
현산학교에서는 공책과 연필을 무료로 공급했고, 교과서를 깨끗이 사용한 학생에게는 상을 주어 다음 학년이 쓸 수 있도록 했다.
남궁억 군수는 나무 심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어느 날 관내의 산야를 돌아보던 그는 강선면 일대에서 30리에 이르는 황무지를 발견하고는 군민들을 동원해 소나무를 심도록 했다. 어디를 가거나 빈 땅을 보면 푸른 소나무나 참나무 등을 심어 금수강산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남궁억은 양양군수를 사임한 후엔 관동학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어 강원도의 교육을 진흥시키려 애썼다. 관동학회는 강릉, 원주, 철원 등지에 7개의 지회를 설립하여 강원도민의 교육과 계몽에 힘썼는데, 특히 강릉지회와 원주지회에서는 직접 사립학교를 설치하여 운영하는 등 교육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관동학회의 재정은 민간인의 의연금으로 운영했다. 독립운동에 뜻을 둔 많은 지역 유지들의 의연금과 출자금이 학회의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돈이란 똥과 비슷해서 쌓이면 악취를 풍기지만 뿌려지면 땅을 기름지게 만든다.”
남궁억은 그 당시 그런 말을 강조했다. 그것은 빈말이 아니라 그의 진실한 철학이었다.
남궁억은 부지런히 걸었다.
산새들만 울어 예는 심심산골을 지나 평지로 나섰을 때는 이미 서산마루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비탈진 밭뙈기에는 푸른 보리가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두 나그네는 휘적휘적 걸어 내려가 길가의 허름한 주막으로 들어섰다. 마루에 걸터앉아 숨을 돌리고 있으니 허리가 잔뜩 꼬부라진 노파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낯선 길손들이시구마. 어디루 가시능가여?”
“보리울로 들어갑니다.”
“응, 보리울. 저 길루 쫌만 더 가문 나와여.”
“네, 그렇군요. 여기 국밥하구 막걸리 한 주전자 주세요.”
“그란디 워디서 오시는강?”
“경성에서 옵니다.”
“아 그렇구만이. 나도 옛날 옛적에 거길 한번 가봤는디 별별 사람이 다 살더만. 쫌만 기달리우.”
먼저 내온 막걸리로 두 길손은 타는 목을 축였다. 할머니는 냉이와 달래 무침을 내왔는데 보기보다 맛이 좋은지 뭉이가 감탄을 했다. 국밥까지 게눈 감추듯 비우고 나서 두 사람은 다시 길로 나섰다.
보리울 마을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첩첩 산에 둘러싸인 가난한 마을의 초가집 창문으로 불빛이 드문드문 새어나왔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에 남궁억의 조카 뻘인 남궁현을 따라 미리 한번 와 보았던 뭉이가 앞서서 어떤 집 안으로 들어갔다. 황토 흙으로 담을 쌓고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아담한 집이었다. 기둥이나 창호지를 새로 바른 문은 모두 나무로 되어 있었다.
조카의 활약으로 방이며 부엌 등은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집안에 따스한 기운은 없었고 썰렁했다. 봄이라곤 해도 깊은 산골이라 그런지 밤엔 아직 추웠다.
뭉이가 아궁이에 장작불을 피웠다. 어둠속에서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남궁억은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새로운 곳 새로운 집에서 시작될 새로운 삶이 비로소 실감이 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우물물을 길어 세수를 한 후에 남궁억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랫목으로부터 따뜻한 온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남궁억은 꿇어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긴 침묵의 기도였다.
풀숲에서 풀벌레가 찌르르 찌르르 울었다.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