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리울의 달 35] 제15장 푸르른 노송(5)
“취조관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나쁠지 모르지만, 우리로서는 그렇게 해야 하므로 그런 말을 했을 것이오. 나는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 말이 법에 저촉된다면 어떤 처분이라도 받겠소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에게 그런 불온스런 말을 하여 앞길을 그르치는 건 교장으로서 책임이 없는가?”
“이 일을 일본인에게 말하면 불온한지 몰라도 우리 민족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오. 조선인으로서 그 정도의 민족정신이 없다면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일 것이오.”
검사는 빙글빙글 웃고 나서 물었다.
“그대는 젊을 때 영어를 배운 사람으로서, 어차피 영어나 일본어나 같은 외국어인데 왜 일본어는 그렇게 싫어하는가?”
“흠, 만약 모든 사람이 영어를 배웠다면 나는 영어를 굳이 배우지 않았을 것이오. 그 당시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려 하지 않았기에, 나라도 배워서 우리나라의 외교와 무역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했을 뿐이오. 나는 세계의 어떤 언어보다도 우리 한글을 사랑하고 있소.”
“그대는 일본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모곡학교를 설립해 일꾼들을 길러내서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려 했는가?”
“조선 민족은 지금 꿈에서 놀고 있을 시기가 아니므로 꿈을 깨워 일으켜 세울 목적이 있었던 건 사실이오.”
검사는 책상 위에 놓인 음료수 잔을 들어 한 모금 홀짝 마셨다.
“학교에 무궁화를 많이 기른 동기는 무엇인가?”
“무궁화는 조선 민족을 대표하는 꽃이고, 꽃 자체가 꽃 중에서 가장 고운 것처럼 조선민족도 무궁화처럼 영구히 번창하길 바란 것이오. 자기 나라의 국화를 사랑하는 게 죄가 되는지는 몰랐소.”
“무궁화동산이라는 노래는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
“무궁화는 뿌리가 강하고 꽃이 져도 또 피어나는 것처럼 우리 민족도 다시 살아나 영원 무궁하길 바란 것이오.”
검사는 무심결에 콧방귀를 한번 뀌고 나서 물었다.
“그럼 조선 역사를 가르친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사정을 모르면 안 되므로 그런 것이오. 우리 조선도 세계 강국에 비견할 만큼 훌륭하고 고유한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다만 그걸 모른 채 다른 민족에게 압박을 받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소이다.”
“그대는 모곡예배당에서 한일병합에 대하여 비분강개하여 말하면서 일본의 정치를 비판하고 울었다는데 그런가?”
“언제 어디서든지 일한합병에 대하여 생각하고 이야기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눈물이 나오. 우리 조선민족을 어떻게 하면 비참한 처지에서 구해낼 수 있을지 생각하며 운 것은 한두 번이 아니오. 마루에 서서 앞산을 보고도 이 민족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지경이니, 자연히 일본의 압제를 비판했을 것이오.”
남궁억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한숨을 쉬었다. 감방에서 얼마나 심하게 고생했는지 그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그 후 열린 재판에서 남궁억은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제 나라를 사랑한 죄로 검은 쇠창살 안에 갇힌 몸이 된 것이다.
남궁억은 감옥에서 지급하는 일본식으로 만든 수의를 거절했다. 둘째딸 자경이 한복을 넣어 줄 때까지 알몸으로 지냈다.
그는 컴컴한 감옥 안에서도 정신을 모아 오로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주여, 저는 이제 아무 힘도 없나이다. 바라옵건대, 제 육신이 죽어 사라지더라도 제 영혼만은 더 강인해져 이 가엾은 민족을 위해 역사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총독부에서는 관리를 보내 회유를 하기도 했다.
“남궁 선생, 대세는 이미 기울었소. 이제는 누구든 일본의 뜻에 따라야 한단 말이오. 만일 선생이 생각을 바꿔 우리에게 협조한다면 호강시켜 드리겠소.”
“나는 일본이 망하고 우리나라가 독립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있소. 내 나이 이미 일흔이 넘었소. 다 산 몸인데, 이제 와서 생각을 바꾸라니 개도 웃을 일이오,”
남궁억은 단호히 말하고 관리를 노려보았다. 관리는 표독스럽게 웃고 나서 돌아갔다.
지옥 같은 환경에서 옥고를 치르던 남궁억은 결국 병을 얻고 말았다. 그렇다고 일본 당국이 병자를 배려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조센징 따위는 몇 명이 죽어도 눈도 까딱 하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애가 탄 둘째 사위인 윤광선은 장인의 보석원을 검찰청에 신청하는 한편 부친 윤치호와 함께 구명운동을 펼쳤다.
그리하여 1여 년만인 1934년 여름에 남궁억은 겨우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는 서울에서 잠시 간병을 한 후 보리울로 향했다. 가평 근처에 도착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가마를 보내 모셔오려고 했으나 그는 타지 않았다.
“나라를 빼앗겨 고생하는 백성이 무슨 가마며, 어떤 양반은 타고 가고 어떤 상놈은 힘겹게 메고 간단 말인가? 하루 5리를 가더라도 걸어가겠다.”
그는 강을 따라 걸어 올라와 근처 집에서 하루 묵은 후 나룻배를 타고 보리울로 돌아왔다.
보리울은 예전의 무궁화 동산이 아니었다. 한창 무궁화가 필 계절인데도 강신재 언덕은 황량하기만 했다.
해맑던 아이들의 눈동자를 보기가 힘들었고, 고락을 함께 하던 교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 버렸다.
“아, 적막강산이구나!”
남궁억은 길게 탄식했다. 의욕과 열정을 잃은 그의 병든 몸은 마치 빈 들판에 선 허수아비처럼 쓸쓸해 보였다.
그래도 끝끝내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병문안을 하러 온 제자나 마을 청년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간곡히 부탁했다.
“나는 독립을 위하여 일하다가 가겠지마는 너희들은 반드시 독립을 볼 것이니 독립 후의 일을 위하여 준비해야만 한다네. 우리가 준비를제대로 하지 않으면 설령 오늘 독립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닐 것이네.”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께서도 꼭 독립한 우리나라를 보실 것입니다.”
남궁억은 빙긋이 웃었다.
“그게 내 소원이다만 아마도 그럴 것 같진 않네.”
그러더니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젊은 벗들이여,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해주시게나. 무궁화나무 밑에….”
제자들은 숙연해진 나머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무덤을 만드는 것조차 과분히 여겼다. 그래서 무궁화나무의 밑거름이나 되길 바랐던 것이다.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 원고 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