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계 2:12~17)
버가모는 우상과 황제숭배의 도시입니다. 그곳에는 B.C 29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숭배하는 처소가 마련되면서 황제신전이 세워진 로마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우스의 제단과 각종 신들의 신전이 건축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버가모가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고 하십니다. 그곳에 버가모 교회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핍박과 시험이 있었을지 짐작이 갑니다.
특히, 안디바는 주님께 충성한 댓가로 순교를 당했지만 버가모 교회는 함께 시험을 잘 이겨내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잡아 자기 믿음을 지켜서 이겨내었습니다(계 2:13). 믿음의 수준이 있는 훌륭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한쪽에서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니골라당과 발람의 교훈은 같습니다(계 2:15). 그러면 발람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발람은 모세 때에 있던 사람인데 영이 열려서 영적인 세계와 통하는 사람입니다. 발락왕은 영이 열려진 영통한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많은 돈과 함께 원하는 세상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여호와의 영에 이끌려 발락의 제안을 거절하고 이스라엘을 오히려 축복했습니다(민 22:17~18).
처음 시작은 좋았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결국 발람은 발락 왕이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다시 발락과 손을 잡았습니다. 발락을 지도해서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할 수 있는 치명적인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모압 여인의 유혹으로 시작해서 그들의 신들을 제사하는 축제에 초청해서 음행과 우상숭배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니골라당은 이처럼 처음은 구원으로 시작했지만 구원 받았으니 그 후의 삶은 무슨 행동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음행과 우상숭배를 정당화 시키는 것입니다(계 2:14). 복음으로 시작했지만 복음을 죄로 해석하니 이단이 됩니다.
아무리 누가 뭐라 한다 해도 음행과 우상숭배는 이스라엘이 멸망 할 수 있는 가장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사람들과 섞이어 세상도 섬기고 음행하는 일은 죽을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면 큰일 납니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습니다. 발람 당시에 이 일로 해서 이스라엘 중에 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이 이만 사천명 이었습니다. 문제는 발람의 영향력입니다. 이 거짓에 속아 그 길을 함께 가는 성도들을 모두 함께 멸망하게 하는 그 영향력이 문제입니다.
거짓 선지자도 처음에는 참된 복음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유는 돈을 사랑하다가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벧후 2:13). 니골라도 처음에는 깊은 영성과 말씀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영향력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벧후 2:21).
복음으로 시작했으면 끝도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니골라당은 은혜의 복음으로 시작해서 더러운 육체의 정욕으로 끝을 맺습니다. 돈과 음란과 쾌락과 세상권력은 멸망 안에 한 세트로 들어있는 구성요소 들입니다.
이 구성요소가 믿음의 열매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분별할게 뭐가 있습니까? 복음의 상식입니다.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안보겠다는 악입니다.
니골라당의 복음 해석은 교회가 싸워야 할 사상입니다. 구원받은 영혼과 육체를 복음으로 잘 해석해야 합니다. 생명으로 영혼이 살아나면 죽었던 육체의 일들이 회복됩니다.
그러나 육체가 죄의 권세 잡은 세상 속의 강성함과 쾌락과 음란함을 따라가면 영혼은 죽습니다. 영혼이 살아나는 육체의 회복과 영혼이 죽는 육체의 강섬함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 멸망에서 나오라! 이것이 요한의 외침입니다. 승리하는 교회는 여기에서 나오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싸움입니다(계 2:16). 교회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서울 마라나타교회 이영은 목사(압구정 큐티선교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