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투데이 신년 대담] 한복협 회장 이정익 목사(下)
전편에 이어 2020년 경자년(庚子年)을 맞아 이정익 목사와의 신년대담을 게재한다. 전편에서 2019년 사회와 교계를 돌아보고 2020년의 해법을 제시한 이 목사는, 은퇴와 그 이후, 한국교회 주요 과제인 목회 계승 문제 등에 대해 기탄없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2020년을 살아갈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격려를 전했다.
양적 성장 못 이루면 온갖 도전과 자괴감 직면
현대인들 약점 지적 싫어해, 상담·치유 설교가
청중 충족하려다… 설교에 자꾸 ‘수단’ 가미돼
-‘은퇴하고 나서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이렇게 했으면’ 하고 아쉬움을 느끼는 점들이 있으시지요.
“아쉬움이 많습니다. 돌아보니, 현장에서 목회할 때는 몰랐던 것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목회할 때는 굉장한 유혹이 있었습니다. 바로 ‘교회 성장’입니다.
이게 왜 문제일까요. 양적 성장을 못 이루면 온갖 도전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지요. 그래서 이 유혹을 피할 수 없고, 모든 목회자들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사실 양적 성장 문제에서 비켜나야, 진정한 설교, 예언자적 설교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때 영성을 회복할 수 있고, 성경을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적 목회에 미련이 있는 한, 성도들에게 예언자적 설교를 하기 어렵습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의 약점을 지적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언자적 설교 대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야 합니다. 상담 설교, 치유 설교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수요예배나 주일 저녁에는 상담·치유 설교도 해야 하지만, 주일 낮예배에서도 그것이 주가 되면 안 됩니다. 영화와 음악 등 설교에 자꾸 ‘수단’이 가미되는 이유는, 청중들을 그런 식으로 충족시키고자 하는 현대적 발상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게 없었지요. 그래도 설교를 들은 성도들의 변화가 있었고, 참회가 있었고, 자기 부정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은퇴하니까 조금 보입니다. 목회가 보이고, 이해가 되고, 아쉬움이 생깁니다.”
수천 명 목회하니 ‘한 사람’에 감각 없어져
‘한 사람’의 문제 생각하지 않은 것 후회돼
열정 없이 너무 편하게 목회했다는 생각도
-진솔한 고백이십니다.
“그땐 목회하면서 사람 숫자에 매이다 보니, 한 사람이 상처받고 교회를 나가는 것에 대해 별 감각이 없었습니다. 이게 가장 큰 아픔입니다. 목회자가 모르는 사이 수천 명의 군중 속에서, 상처 받고 가나안 신자가 되거나 떨어져 낙오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어졌더랬습니다.
작은 교회나 큰 교회나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열댓 명 놓고 설교하는 것이 성에 안 찰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설교 준비를 충분히 하지 않게 됩니다. 반면 큰 교회에서는 수천 명 모이다 보니, 한 사람이 떨어져 나가는데 별 생각이 없습니다. 둘이 똑같습니다.
목회를 끝내고 보니, 한 사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됩니다. 수천 명 속에서는 한 사람이 우습게 보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중직자들이 분란을 일으키고 갈등을 조장하는데, 그러면 적지 않은 성도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중직자들도 그런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을 계속 유발시키는 것이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목회자는 치유를 위해 일일이 상처받은 사람들을 찾아가기 힘듭니다. 다 목회를 마치고 나니 보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병원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어도, 너무 바쁘기 때문에 2-3분간 기도해 주고 나오는 게 다입니다. 사실 그게 목회는 아니지 않은가 합니다. 오랜 시간 함께 앉아 있어만 줘도,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그게 치유일텐데…. 그 많은 시간 동안 성도들과 기도로 연결됐다면 더 좋았을텐데…. 이제야 느껴지고 보이는 후회스러운 모습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더 많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좀 더 열정적으로 하지 못하고, 너무 편하게 목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일예배에 교회 주변에서 오시는 분들만 있는 게 아니고, 정말 멀리서 나오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천안 독립기념관 옆에서 나오는 분도 계셨습니다. 새벽 6시 반에 출발해야 낮예배에 참석할 수 있고, 마치고 돌아가면 한밤중인데 그걸 매주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과연 그 분을 깊이 있게 눈여겨 보면서 생각했는가, 분주하게 목회하다 보니 잊혀진 것은 아닌가…. 그런 분들은 주일마다 그 일을 반복했을텐데, 그때 더 찾아갈걸, 더 세심하게 보살필걸, 왜 더 열정적으로 하지 못했을까 후회스럽습니다. 현역 때는 이런 것들을 잘 몰랐습니다.”
은퇴 앞둔 교회, 고도의 신앙의식 발휘해야
후임 선정, 은퇴 목회자 마음가짐 가장 중요
사심 없이 초연해져야, 조언 응하는 정도만
-한국교회가 지탄받는 부분 중 하나가 ‘목회 계승’입니다. 신촌성결교회는 모범적으로 계승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는데, 기준이 있으셨나요.
“교회마다 목회자 은퇴와 청빙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은퇴하는 목회자와 교회 구성원인 당회가 고도의 신앙의식을 발휘하지 않으면, 갈등이 유발되기 쉽습니다. 그 시기는 섬기던 교회가 20년을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의 분기점이 됩니다. 잘 하면 20년 전진하고, 잘못 하면 20년 후퇴합니다.
후임자 선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은퇴 목회자의 마음가짐입니다.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나를 잘 돌봐줄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으면, 어려워집니다.
모든 교회 생리가 그렇습니다. 은퇴 목회자가 후임 선정에 직접 관여하면,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조금 멀리서 바라보고 조언해 주는 선에 그쳐야 합니다. 내가 주도해서 내 사람을 데려오겠다는 발상 때문에, 교회들마다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은퇴 목회자가 ‘후임자는 전적으로 교회를 위한 분을 모시자’며 자기를 내려놓고, 그것으로부터 초연해진다면 교회는 나머지를 다 이해합니다. 그리고 들어오는 상담과 조언에 응해주면 성도들이 이탈하지 않습니다.
계승과 청빙은 1차적으로 은퇴 목회자가 문제입니다. 나와 관계 있는 사람, 내가 마음대로 코치할 수 있는 사람을 뽑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교회를 위한 것일까요.
은퇴 목회자 의도, 구성원들 다 알아
교회 운영과 치리, ‘상식의 목회’ 지향
다루기 좋은 목사 청빙? 이미 병들어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은퇴 목회자의 의도를 교회 구성원들이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부정적으로 관여를 막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도 불행입니다. 서로 지혜롭게 교회의 미래만을 생각한다면, 그런 갈등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목회철학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저는 목회하면서 모든 운영과 치리를 합리적으로, ‘상식의 목회’를 지향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법이 상식입니다. 상식은 무리가 없고, 사심이 없습니다.
상식은 지극히 합리적입니다. 상식대로 하면 사람들이 다 따라옵니다. 그렇게 위대한 법도, 지혜도 아닙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안 되다 보니, 교회마다 갈등의 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반대로 소위 ‘다루기 좋은 목회자’를 청빙하려 할 수도 있는데, 당회나 교회 구성원들이 그런 의식을 가졌다면 그곳은 이미 병든 교회입니다. 성도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슨 목회자일 수 있습니까.
거기서부터 불화와 갈등의 요소가 이미 포함돼 있습니다. 그 교회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지극히 하나님을 안 믿는 그룹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은퇴하면서 조금도 서운한 마음 없어
여한 없이 목회했고, 여한 없이 분주해
선교사와 작은 교회 목회자 섬기는 중
-갑자기 일이 확 줄어드셨을텐데, 그 ‘공허감’을 극복하셨는지요.
“저는 은퇴하면서 조금도 서운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던 사역을 다 내려놓아야 해서 아쉽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목회하는 동안 여한 없이 했고, 여한 없이 분주했고, 여한 없이 목회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놓는 일에 시원함이 있었고, 만족감도 있었고, 감사와 감격이 있었습니다. ‘아유, 내가 이걸 내려놓으면 얼마나 허전할까’ 하는 것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이 사무실을 만들고, 아까 말씀드린 목회할 때 몰랐던 부분들을 하는데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돈도 많이 들어가고, 관심도 많이 쏟아야 하고, 찾아다녀야 하는 일입니다. 목회하던 시절 못지 않게 바쁩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할 일이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은퇴하신 분들이 왜 그렇게 허전해 할까요. 자꾸 설교 못하는 것에 대해 미련을 갖지 말고, 여분의 인생을 선용할 생각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준비 없이 내려놓으니, 허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 희망재단 사역들을 목회 동안 미리 준비하셨나요.
“목회하면서 빚진 마음을 가진 부류가 둘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교사들입니다.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이 아이들을 이끌고 선교지로 나가신 분들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이지요. 이들을 후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는 작은 교회 목회자들입니다. 옆에는 큰 교회가 있고, 자신은 조그만 교회에 있으니 얼마나 자괴감이 들겠습니까. 사역은 뜻대로 되지도 않고, 아이들은 커가는데, 미래에 대한 전망도 없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그 마음들을 상쇄시킬 수 있는 자존감을 심어주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은퇴하면 이런 분들을 섬기자고 마음먹은 것이 주된 준비였습니다. 그래서 평소 재정을 아껴 쏟아부었고, 은퇴금도 쏟았고, 외부 사역에서 주어졌던 사례금도 전부 쏟아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나누고 함께 세우는 일을 하니 행복합니다. 목회할 적에는 몰랐는데, 이후 작은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왜 이런 모습을 진작 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목회할 때 진작 불러서 식사라도 하며 격려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작지만 그 분들을 섬기는 일을 하고 있어 행복합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에게 빚진 심정
큰 교회도 힘들지만… 행복한 고민
유학 갓 끝낸 신진 신학자들도 격려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은퇴 목회자들과 비교하면, 희망재단 사역은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저만 해도 목회를 행복하게 한 편입니다. 하지만 큰 교회 목회자들이 다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힘들고 벅찬 일이고, 조직을 끌고 나가는 일도 보통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겪는 어려움보다는 행복한 고민이지요. 그게 제가 느끼는 미안함입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을 보면 미안한 마음, 빚진 심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어떻게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큰 교회 목회만이 목회가 아니고, 작은 교회 목회도 하나님 함께하신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아닐까요.
젊은 신학자들을 격려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 소속된 학자들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전세금 빼 유학 가서 공부하고 갓 돌아온 신진 학자들은 셋방살이도 힘듭니다.
공부는 하고 돌아왔는데 신분도 보장되지 않고, 정기적으로 일할 장소도 없다 보니, 당장 생활도 어렵습니다. 거기에 논문도 써야 하면 얼마나 힘들까요. 그들도 작은 교회 목회자들처럼 조금이라도 도우면 힘이 되겠다는 발상에서 시작했습니다.”
현실과 미래, 언제나 암담하고 불안한 법
30년·10년 전에도, 10년·30년 후에도 같아
하나님은 상황 불확실할 때 역사하시는 분
-2020년을 살아갈 성도와 목회자들에게 덕담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언제나 현실과 미래는 암담한 법입니다. 현실을 보면, 소망적인 게 별로 없을 것입니다. 미래는 더욱 그렇습니다.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업들도 예전에는 5개년, 10개년 계획을 세웠지만, 요즘에는 2년간 계획 세우기도 힘들다고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지난날 목회자들이 행복했었다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30년 전에도 상황은 똑같았습니다. 1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도 같을 것입니다. 언제나 현실과 미래는 불확실하고, 암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확실할 때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가나안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는 불확실했습니다. 가나안은 그들에게 믿을 수 있는 근거지가 아니었습니다. 막막한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지만, 구체성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 땅을 구체적으로 알았다면, 모세를 그렇게 괴롭혔겠습니까? 모세는 ‘약속의 땅이 분명하니 앞으로 가자’고 했지만, 현실은 가도 가도 물이 없는 광야뿐이었습니다. 막막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작년이나 금년이나 똑같이 불확실하고, 막막합니다. 지금 우리 심정도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처럼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인들도 그 막막함을 헤치고 살아가는데, 우리 목회자들이야 그 불확실성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이들 아닙니까.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모세의 심정을 가지고, 담대하게, 그리고 실감나게 가나안을 보여주고 증거해 주면서 가야 하지 않을까요. 특별히 이 시대에는 목회자들에게 그런 안목이 필요하고,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더 암담한 건 성도들입니다. 목회자는 일터가 있고 할 일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무섭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5G’가 뭔지, ‘AI’가 뭔지 구체적으로 알겠습니까. 목회자 과세 문제도 아직 피부로는 못 느낍니다.
생존 경쟁 역시 성도들이 훨씬 심각합니다. 그들은 내일 해고당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목회자들은 그 세계를 모릅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습니까? 현기증 날 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오늘날의 5분이, 이집트 시대의 12년과 변화 속도가 같다’고 했습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황제의 명령이 변방까지 가는데 5년이 걸렸지만, 오늘은 세계적으로 국경이 사라져 가고 뉴스는 그 순간에 다 전파됩니다. 세상의 변화가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회자들은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비켜나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지금 교회에 모여 있고, 그 흐름에서 비켜나 있는 목회자들이 설교를 전합니다. 이게 맞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목회자들이 자꾸 현실성 없는 설교를 자꾸 하게 되고, 성도들은 매력을 못 느낍니다. 젊은이들이 안 나오는 이유가 거기 있다고 봅니다.
위로와 격려 후 예언자적 메시지 전파를
이후 그럼에도 ‘하나님의 소망’으로 격려
인생도 ‘성스러움 잃지 않고’ 마감하고파
우리 목회자들도 2020년을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면 막막하겠지만, 성도들이 더 큰 막막함 속에 살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의 메시지 속에는 반드시 위로와 격려가 들어가야 합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한 다음, 예언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로와 격려, 그리고 예언자적 메시지’가 핵심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메시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소망이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런 메시지를 통해, 어려움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020년 새해에 목회자들이 힘 주어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목사님도 지금은 건강하시지만, 목회의 마무리뿐 아니라 인생의 마무리도 생각하고 계실텐데요.
“나이가 들어가고 목회를 마무리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목회자 출신이기 때문에, 마지막 마무리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부분에 상당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게 주어진 이 일을 계속 하다가, 마지막 때가 찾아온다면, 그 마지막 모습을 통해 우리 후배들에게, 그리고 교계와 성도들에게 ‘성스러움을 잃지 않았던 분이었다’는 모습으로 마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제게 남은 책임입니다.
그러기 위해 마지막까지 건강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건강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고 유념하고자 합니다. 미래지향적인 생각과 믿음의 안목을 갖고, 마지막 순간까지 내게 주어진 몫을 다한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사역하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떠나고 싶습니다. 살아갈 날보다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그렇게 마무리한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교계와 신문사에 당부하실 말씀은.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시대입니다. 지금은 미디어의 세계요 시대이기 때문에, 이 일에 충실해 주길 바랍니다. 기독교 언론계가 열악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크리스천투데이는 사실 행복한 것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구독자가 있다는 게 행복 아니겠습니까. 수단이나 방법적인 것은 지양하고, 지금처럼 묵직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일이 앞으로 계속됐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교계도 그동안 너무 안일했는데, 조금씩은 변화되지 않을까요. 위기의식을 느끼는 건 좋은 일입니다. 위기를 타개할 해법이 가까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