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계 3:14~22)
예수님은 교회 사이를 거니시면서 교회의 행위를 보고 말씀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를 보고 아시는 예수님은 교회의 미지근한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 말씀 하십니다. 교회는 믿음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차가운 것도 아닙니다. 열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열정을 가지길 원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열정이 없는 상태를 유지한다면 토하여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뱉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뜨거움이 올라오지 않는 열정이 없는 믿음생활이 이렇게 심각합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감정적인 반응이 없는 상태입니다. 주님에 대해서 아무 감흥이 없는 것이지요, 주님에게 무관심 합니다. 감정이 그러니 믿음의 행위가 미지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 이라고 합니다. 무관심은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교회는 어쩌다 이렇게 미지근한 상태가 되었을까요? 성도들은 부자였습니다.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보이는 생활에서 갈급하고 애통할 일이 없으면 먼저 기도가 줄어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믿음생활이 무감각해 지면서 미지근해지는 코스로 갑니다. 그렇게 계속 가다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다시 기도의 자리로 나아와서 뜨거워 지거나 아니면 차갑거나 둘 중 하나의 감정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계 3:19).
교회는 '우리는 부자이고 부족한 것이 없이 풍족하다' 고 스스로 말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곤고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었고 벌거벗었다' 고 하십니다. 무엇이 부요이고 무엇이 가난인가, 사람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아주 다릅니다.
교회는 부자인데 예수님은 '가난하고 불쌍하다'고 하시며 예수님에게서 사서 채우라고 충고하십니다. '너희는 가난하니 나에게서 금을 사라, 너희는 입을 옷이 없어 벌거벗고 있으니 나에게서 흰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라, 너희는 보기 위하여 내게서 안약을 사서 발라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부자들의 교회인 라오디게아교회가 실상은 가난한 맹인 거지들의 교회가 아닙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를 상상해 봅니다. 성도들은 고급 명품 옷과 가방에 비싼 외제차를 타고 교회에 와서 세련되고 우아한 태도로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위에 가난한 맹인들이 속살이 보일 정도로 구멍 나고 다 헤어진 누더기로 벌거벗겨진 수치스런 모습으로 앉아있는 게 오버랩 됩니다.
어떤 게 진짜 일까요?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채워져야 진짜 부자라고 하십니다. 불과 같은 연단으로 단련 받은 정금 같은 마음이 있어야 부자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고귀하며, 예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야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후에 마지막 날, 정금과 보석으로 꾸며진 화려한 천성에 들어갈 때 다 헤어져서 속살이 보이는 너덜너덜한 누더기 맹인의 모습으로 결혼식장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계 21:9)?
지금 옷이 누더기면 빨리 벗고 흰옷으로 바꿔 입어야 합니다(계 3:19). 영적인 눈이 열려서 나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그래서 회개할 수 있다면 축복입니다.
진짜 부요함은 예수님으로 부터 공급받고 예수님의 것으로 채워 지는 것입니다(계 3:18). 그분이 내안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거하셔야 부요해집니다. 그 외에는 진짜 부자가 될 길이 없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서울 마라나타교회 이영은 목사(압구정 큐티선교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