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죄의 은총, 개인 넘어 국가에도 필요
3.1운동 비폭력 무저항, 산상수훈에서
이승만, 자유민주주의자였기에 물러나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는 ‘나라를 위한 기도모임: 말씀과 순명’ 첫 기도회 설교 앞부분에서 목회자들에게 ‘사죄의 은총’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젊은 날 주님의 초청 앞에 마음을 열었던 그 시간을 지금도 어제같이 생생하게 기억한다. 모든 것은 다 잊었어도 그 밤을 잊을 수 없다”며 “나 자신도 나를 용납하지 못할 때 그 분이 나를 용납해 주셨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됐다”고 말했다.
홍 목사는 “세월이 흘러도 죄의 유혹 앞에 순간 순간 넘어지는 나, 하나님 없이 살고 싶어하는 나의 가증한 모습을 본다. 그래서 요즘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하루 일과를 모두 내어놓고 잘못들을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고 있다”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내가 죄를 짓지 않았을 때보다 더 가깝게 만나주셨다”고 했다.
그는 “동역자들이여, 사죄의 은총을 잃어버린 때가 언제부터인가? 설교들을 들어보면 사죄의 은총이 강조되지 않는다. 주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용서해 주시고 믿기만 하라는데, 왜 그리 못 믿는가. 믿기만, 받기만 하라는데”라며 “사죄의 은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그 품에 뛰어드는 놀라운 영광을 경험한다”고 당부했다.
이와 함께 “목회자들이 사죄의 은총의 깊이를 알 때 심령은 변화되고, 그 말씀은 하나님 사랑의 현장이 된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이를 위하여 내어주신, 그 하나님을 만난다”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자식을 키우면 안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왜 이 말에 감동을 잃어버렸나. 사죄의 은총 없이, 하나님의 아들 주심을 내 것으로 소유하지 못한다. 이 사죄의 은총은 개인뿐 아니라, 한 국가와 민족에게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홍정길 목사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장로가 ‘내가 아간이다’ 외치기 시작했다. 이후 회개의 기도와 고백이 끊어지지 않고 며칠이고 계속됐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이 땅에 성령을 기름 붓듯 부어주셨다”며 “이것이 지난 2,000년 동안 가장 수많은 사람에게 한꺼번에 성령이 감동한 거대한 평양 대부흥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이것이 우리에게 성공과 승리를 안겨다 준 것이 아니다. 1910년 일제 식민지가 돼 고통을 경험했다. 9년 뒤 민족 대표들이 고종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의논하는데, 분노에 찬 민족 지도자들이 무력 항쟁하자고 외쳤다”며 “이때 월남 이상재 선생은 ‘아니다. 이 싸움은 진리로 싸워야 하는 싸움’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게 뭐냐고 묻자, 선생은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비폭력 무저항’을 말했다”고 설명했다.
홍 목사는 “2,000년 전 주님께서 광야의 백성들에게 선포하셨던 비폭력 무저항은 부분적으로 수도원에서 잔존했지만, 시민운동으로 역사에 드러난 예는 3.1운동이었다”며 “일본 친구들이 작년 3.1운동 100주년 때 독립선언서를 읽고, 그 시대에 이렇게 격조 높은 글이 있을 수 있냐며 놀라더라. 그것이 다른 데서 나오지 않았다. 하나님 말씀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는 “십자가의 은혜로 충만했던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그 말이 터져나올 때, 죽창 들고 나가자고 외치던 동학 대표가 수긍하고 함께 비폭력 무저항으로 이리 밟히고 저리 죽는 수난의 역사를 경험했다”며 “그 수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담당하고 죽으신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총을 마음 속에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홍정길 목사는 “일제 통치가 30년쯤 지나자, 이광수와 최남선 같은 민족 지도자들도 ‘이 나라는 독립할 여지가 없다’고 포기하고 일본에 무릎을 꿇었다. 그 때도 꿇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며 “주기철·최권능·길선주·손양원 목사님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사랑하신다’고, 모든 사람이 도무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할 때 사랑의 하나님을 붙잡고 ‘우리나라는 독립된다, 하나님께서 해방을 주신다’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순교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고 했다.
홍 목사는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 사랑은 실망을 모른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절망이라는 것이 없다”며 “그 사랑을 깨달은 하나님 백성들, 회개를 통해 가장 가깝게 만난 사랑의 하나님께서 기어코 우리 민족에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주셨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게 뭔지 몰랐다. 어떤 분은 우리나라 망했다고 울었다고 한다. 기대하지 않았고, 우리가 일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지금 친일 청산해야 한다는 그들의 아버지들이 그때 뭘 했는지 물어봐야 한다. 대부분 자기 아버지를 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랬던 나라였다. 그런 때도 끝까지 견뎠던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역설했다.
홍 목사는 “6.25 남침 때도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갔을 때, 부산 초량교회에 목사들이 모여 오늘처럼 기도했다”며 “독립된 나라를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주신 것에 매몰돼 무엇을 더 가질까 외쳤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기 시작했다. 그럴 적에 유엔이 한국 파병을 결정하고, 이 나라를 다시 살려주셨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에 대해선 “그가 자유민주주의자였기 때문에, ‘백성이 반대하면 물러나야지’ 한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물러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라며 “이승만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양심이 있어 민심 속에서 하나님 음성을 듣고, 지팡이를 잡은 채 경무대를 나온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이 대한민국의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시작이 됐다. 틀렸을 때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또 “1987년 미국 메릴랜드 한 대학 캠퍼스를 빌려서 제2회 코스타를 열었을 때, 박종철이 죽었다는 비보가 들어왔다. 하던 것을 모두 제쳐놓고 그 밤을 온통 눈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했다”며 “그리고 귀국했다. 학생단체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더라. 데모 나가는 이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기도하고 자빠졌냐’고 하더라. 그래도 곳곳의 교회에서 믿음의 청년들이 기도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오피스에서 넥타이 매고 나온 사람들도 모두 쫓아나와서 함께 데모하던 그때를 기억한다. 이후 6.29로 대통령 직선제가 수용됐다”며 “직접선거로 노태우 대통령을 뽑고, 1992년 김영삼 대통령을 선출함으로써, 1948년 8월 15일 시작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말 그대로 실제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