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인의 아트독서 48] 절박함으로 독서하라
많은 사람들이 하는 질문이 있다. 그 질문은 다음 두 가지다.
1. “목사님은 과거 어떻게 독서하셨어요?”
2. “목사님은 지금 어떻게 독서하세요?”
필자가 과거에 독서를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지금 독서를 어떻게 하는지가 궁금한 것 같다.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 단어로 이야기할 수 있다. ‘절박함’으로 독서했다. 절박함으로 독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독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인생이 끝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떄문이다.
필자가 한 독서는 여력이 있어서 한 독서가 아니었다. 절망을 벗어나기 위한 독서였다. 그래서 절박함으로 했다. 이 절박한 독서는 필자의 욕망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열망에서 출발했다.
‘절박함’은 누구나 갖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가질 수 없는 마음이다. 절박함은 인간 환경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필자에게 절박한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절박한 마음으로 독서를 했다.
절박한 마음으로 10년 독서를 했다. 지금도 절박한 마음으로 독서를 한다. 앞으로도 절박한 마음으로 독서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절박한 마음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절박함으로 독서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까지 주셨기 때문이다. 이 절박한 마음으로 10년 동안 5,000권을 읽었다.
과거 10년간의 독서
과거 10년간의 독서는 절박함으로 읽는 독서였다. 그저 무턱대고 읽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절박함으로 책을 읽었다.
하루 10시간 전후 책을 읽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어릴 적 책을 읽지 않아 기본 지식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부족한 기본기를 채우기 위해 읽지 않았다. 읽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읽었다. 읽다 보면 부족한 기본기가 어느 정도 커버되리라는 신념으로 읽었다.
책을 몇천 권 읽으니, 사람들이 책을 쓰라고 조언했다. 그런 조언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읽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컸기 때문이다. 읽는 양이 채워지면 어는 순간 책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읽기만 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독서하는 이유를 근시안적이 아니라 원시안적으로 봤기 때문이다. 더 읽지 않은 상태에서도 책 몇 권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몇 권의 책을 쓰고자 했다면, 굳이 절박함으로 독서할 필요가 없었다. 평생 책을 쓰고자 독서를 했다.
책 읽는 방법이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방법도 중요하다. 세종대왕처럼 ‘백독백습’ 방법도 좋다. 하지만 책이 끝도 모를 정도로 쏟아져 나오기에, 방법이 아니라 그저 독서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독서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정독과 다독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독보다 정독이 중요하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필자는 독서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주목했다.
독서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정독보다 다독을 했다. 어느 정도 인풋이 된 후 정독해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 전략이 주효했다.
지금은 정독과 다독을 섞어서 한다. 그렇다고 그 때도 다독만 하지 않았다. 책에 따라 정독과 다독을 섞어서 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 없다. 아무튼 절박함으로 독서를 했다. 이 읽기가 지금의 필자를 있게 한 밑바탕이다.
지금의 독서
지난 10년간 읽기 위한 독서를 했다. 지금은 쓰기 위한 독서를 한다. 글을 쓰고 책을 쓰기 위해 독서를 한다. 밑바탕을 어느 정도 갈고 닦았으니 작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글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 중 하나다.
독서도 반드시 결과가 있다. 독서의 결과는 글쓰기다. 그렇다고 필자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드러나시기 위함이었다. 글을 통해 사람들이 치유와 회복 그리고 구원으로 인도되길 원한다.
글을 쓰기 위한 독서를 하고자 하면, 하루를 충실하게 살게 된다. 즉 삶의 작은 과정을 통해 삶이 더욱 소중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말 중 이런 말이 있다.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내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오늘 살고 있는 하루가 어떤 사람에게는 절실하게 살고 싶어한 것이었다. 그 하루를 소중히 간직하며 살고 싶다. 하루의 가치를 느끼고 하루의 삶의 만족을 누리며, 하나님과 동행의 맛을 보는 삶을 살기 위해 글을 쓴다.
미래의 독서
미래의 독서는 ‘만들기’가 아니라, ‘되기’의 독서를 하고자 한다. 독서하는 이유 중 하나가 뭔가를 ‘만들기’위한 독서다. 하지만 미래의 독서는 ‘만들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되기’ 독서를 하고자 한다.
‘되기’ 위한 독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간,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이 때 독서는 내용 파악만이 아니라 독서의 맛을 음미하는 독서다. 책을 음미하는 독서란 책을 소화시키며 읽는 것을 뜻한다.
결과물을 만드는 독서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독서는 만만치 않다. 하나님의 사람다운 독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독서여야 되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라는 말이 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미래 독서를 할 때는 인생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열정으로 살아가는 시기가 아니라, 내려놓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결과물 ‘만들기’는 독서가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 되는 것이 미래 독서의 꿈이다.
독서의 결과물!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한다. 이는 자기 삶에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 또한 세상의 삶도 소망이 있어야 한다. 소망을 주는 것이 독서다. 즉 독서를 하면 소망 가득한 삶을 살게 된다.
절박함으로 독서한 결과물은 책이 되어 나온다. 절박한 독서가 책이 되어 나오는 것은, 넘치는 것을 풀어내게 되기 때문이다. 좋은 책을 쓰고 안 쓰고는 그 다음 문제다.
읽어서 가득 채워진 것을 책으로 풀어내야 한다. 풀어내는 순간 하나님의 비전을 품게 된다. 하나님의 비전이 품어지는 순간,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
필자는 설교자들에게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삶’과 ‘성장’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다운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그러려면 성장해야 한다. 설교자가 성장하는 만큼, 청중이 성장한다. 성장은 세상 지식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원하심만큼 자라는 것이다.
독서는 ‘삶’과 ‘성장’을 이루게 한다. 그러려면 설교자는 삶과 독서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 말씀을 읽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절박함’의 자세가 이룬다.
김도인 목사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