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진 선교사, 해방 후 북한 지하교회의 역사를 쓰다
당국 감시 피해 신앙 이어온 ‘그루터기 신앙인들’
이야기 넣어 북한 공산화 이후 시대별 역사 정리
평양에서 예배드린 의사, 수용소 잡혀간 청년 등
최근 북한교회사를 정리한 강석진 선교사(충주 양의문교회)는 북한에 비록 종교의 자유가 없음에도, 지하교회에서 당국의 감시와 박해를 피해가며 기독교 신앙을 면면히 이어온 ‘그루터기 신앙인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강석진 선교사는 <북한 교회사>에서 종교의 자유가 사라진 해방 이후 북한 지하교회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지난 1992년부터 북한 선교를 시작한 그는 통일된 한국교회사 정립을 위해, 자료가 빈약한 북한 교회사의 자료 발굴과 정리 필요성을 느끼고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저자의 <북한 교회사>는 북한 교회 역사를 한국 근현대사라는 통사의 배경을 통해 객관화하고, 그 교회사와 통사의 실체를 성경적 관점으로 해석하기 위해, 남북 분단과 공산화를 이스라엘의 남북 왕국사와 대비해 서술하는 독특한 사관(史館)을 보여준다.
또 로마 박해 시대에 신앙을 이어갔던 초대교회 성도들과 대비해 북한 지하교회 행전 사례들을 소개하고, 암흑적 역사로 인식되는 북한 지하교회 역사를 ‘교회 중간사’적 의미로 해석했다. 이와 함께 북한 전역에 흩어진 지하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지금의 한국교회사와 공존하고 있음을 고려해 동일선상적 관점을 유지했다. 다음은 강 선교사가 전하는 북한교회 이야기.
“공산화 이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 북한 그루터기 신앙인들의 신앙과 활동, 수없이 많은 지하교회 교인들의 순교 이야기, 직접 듣고 얻은 여러 편지와 증거물들은 북한 교회사에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물입니다. 이를 토대로 북한 공산화 이후 시대별로 교회 역사가 어떻게 진행돼 왔는지 정리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6.25 이후 북한 교회 역사는 없어졌고, 기독교는 소멸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그루터기 신앙인들이 지하교회를 유지해 왔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강석진 선교사는 1953년 휴전 이후에도 그 땅에서 극소수 기독교인들이 은밀하게 예배를 드려왔다는 사실을, 예배드린 장본인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다. 다음은 강 선교사의 증언.
“2002년 북한에서 친지 방문차 중국으로 건너온 당시 60대 초반 의사에게서 놀라운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 분은 칠골교회에서 주일학교까지 다녔는데, 폭격으로 교회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공산화 전 교회 풍금 연주자였습니다. 당시 칠골교회는 조그만 곳이었고, 김일성 어머니 강반석이 다녔다고 합니다. 실제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이 어머니와 교회에 다녔고, (김일성의 외종조부) 강양욱이 목사로 사역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직접 주일학교에 다녔고 강양욱 목사에게 유아세례를 받은 당사자가 그분이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는 강 목사와 아주 친해서 신앙상담도 하고, 집안 어려움이 있으면 상담도 하고 기도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자신이 평양 지하교회 조직원이며, 지금도 예배를 드리고 있고, 그 조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도 믿기 어려워서, 소상히 이야기해 달라고 했습니다. 공산화된 지 50년이 넘었는데, 그것도 평양에서 어떻게 지하교회가 유지될 수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평양 지하교회 조직 최고 책임자가 세브란스 의전을 나온 초량교회 교인이었는데, 6.25 전쟁 때 납북됐다고 합니다. 납북당한 많은 전문가들 중 한 사람이었지요.
평양 의과대학 학장과 김일성 주치의를 지냈다고 했습니다. 북한에서 그 정도 위치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평양 상류층 권력자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더 안전했다는 것이지요.
본인을 포함해 어렸을 때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고 전도 활동도 하고 성탄예배도 드렸다는 것입니다. 자체적으로 목회자를 양육해 지하교회에 목사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 60대 남성은 중국에서 의료 활동으로 경제생활을 하면서 지내다 돌아갔는데, 한 번은 12월이 되자 강 선교사에게 ‘성탄트리’를 주문하기도 했다. 돌아간 후 몇 개월간은 전화도 주고 받았지만, 이후 교류가 단절됐다고 한다.
“그분은 지하교회 2세대 신앙인에 해당하는 성도로서, 주일성수와 절기예배까지 드리는 조직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하교회를 부인하려야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 이후 신의주에서 탈북한 청년에게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1960년대생이던 그 청년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기독교인이었다.
“어떻게 믿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밀수꾼들을 통해 성경과 교재가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밀수꾼들에게 돈을 쥐어주고, 기독교 서적과 성경, 라디오 등을 들여보낸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우연한 기회에 성경을 읽었고, 라디오를 들으며 스스로 하나님을 믿게 됐다고 했습니다.
본인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성경과 기독교 책자들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조직이 만들어졌고요. 동요나 북한 노래에 가사를 붙여 복음성가처럼 부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절될 수밖에 없는 북한의 현실 속에서도 지하교회 성도들이 자생적으로 신앙의 끈을 이어가고 있음을 직접 듣게 하셨습니다.”
강 선교사는 그 청년을 새 세대 지도자감으로 여기고 성경을 좀 더 깊이 가르치고 싶었는데, 그 청년은 북한으로 돌아가길 원했다고 한다. 중국에 더 이상 있는 것은 의미가 없고, 많은 것을 배우고 체험했으니 돌아가서 북한 동료들에게 전수하겠다는 것이다.
그 청년은 강 선교사에게 라디오 한 대를 사 달라고 부탁했고, 밀수선을 타고 돌아갔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이야기는 비극이었다. “붙잡혀서 총살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물었더니, ‘믿음에는 만일이라는 것이 없다’며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천군천사가 지켜주시는 것을 믿고 돌아가겠다고요.”
이후의 이야기는 비극적이었다. 강석진 선교사는 몇 개월 뒤 신의주 친지를 방문하러 북한으로 들어가는 지인 편에 그 청년과 병원에서 일하는 누나 주소를 적어줬다고 한다. 그 지인이 찾아갔을 때, 청년의 집은 폐쇄돼 못질이 돼 있었다. 이웃집에 물어보니 ‘묻지도 찾지도 않는 게 좋을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누나가 있다는 병원을 찾아갔더니, 의사인 누나가 울면서 ‘우리 집은 동생 때문에 모든 식구들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저만 출가외인이라 화를 면했다’고 털어놓더라는 것이다. 북한에서 기독교인으로서 활동하다 밀고당해 붙잡힌 것이었다. 이것이 ‘종교의 자유’가 있는 북한의 참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그 청년의 생명을 지켜 주셔서 더 많이 활동할 수 있도록 긍휼을 베푸시지 않고, 왜 잡혀가게 두셨는지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그 청년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석방됐는지 남아있는지 확인할 길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북한에 그루터기 신앙인들을 남겨두셨고, 그 수는 알 수 없지만 죽음까지 불사하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직접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아합 왕 시대에 직접 7천인을 남겨두신 것처럼 북녘 땅에도 믿음의 사람들을 남겨 두셨고 그 믿음을 이어 나가고 계심을 알게 됐습니다.”
전문 역사가도 아니지만, 강석진 선교사가 근현대사로 읽는 <북한 교회사>를 저술한 이유다. “책을 쓰면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북한 교회 역사를 우리 교회사적 측면에서 인정하고, 역사의 맥을 이어가면서 통일의 그 날 공산 치하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교회를 이끌어온 것을 인정하면서 교회 역사를 함께 재건해야 합니다.”
강석진 선교사는 청년기 영락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북방 선교의 비전을 품고 1991년 중국 조선족 교회들을 순회 사역하다, 1992년 10월 단둥 방문을 계기로 북한선교를 시작했다.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돌아온 2012년까지 식량 지원을 비롯해 라디오 보급, 성경 전달, 제자 양육과 파송 등의 사역을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