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설교연구원 설교] 함께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본문: 사무엘상 22장 1-2절
사일로 효과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국 기업의 소통을 가로막는 벽이 무엇인가?’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설문조사에서 32%로 1위를 차지 한 것이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개인과 부서 이기주의’였습니다. 이렇게 조직 내 각 부서들이 서로 소통하지 않고 자기 부서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부서 간의 이기주의 현상을 경제학 용어로 ‘사일로 효과’라고 합니다.
사일로(silo)는 곡식이나 사료를 저장해 두는 굴뚝 모양의 창고를 의미합니다. 굴뚝 모양 창고인 사일로는 따로 서 있다 보니 물품이 섞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서로 소통할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워크맨과 카메라로 세계 전자업계를 평정했던 소니는 사내 경쟁을 통해 기업의 역량을 키우고자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소니는 일본 기업 최초로 1994년 부서별 ‘독립채산제’를 도입했다.
‘독립채산제’란 기업 내 지방자치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이 방식은 부서 간 경쟁을 유발해 부서 이기주의를 만들었습니다. 부서 간 소통을 가로막았습니다. 심지어 각 부서마다 독자적으로 제품을 개발하다 보니, 각기 다른 스마트폰이 개발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기업의 부서 간 이기주의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도 점점 이기주의적 성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1인가구들이 늘어나면서 이런 성향이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작년(2019년) 9월 파주시에 있는 연립주택 2층에 살던 30대 남성이 죽은 지 13일이 지난 후 발견되어 경찰에 신고 되었습니다. 13일이 지난 후에야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 동안 아무도 이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다 보면 다른 사람과 함께할 것인가, 아니면 내 이익을 최우선으로 취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종종 놓일 때가 있습니다.
이런 순간에 보이는 사람들의 선택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인간은 그 자체가 이기적인 존재’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은 천성적으로 이타적인 존재’라고도 말합니다.
어느 쪽이 됐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타적인 사람도 이기적인 사람도, 절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과 함께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혼자서 살아갈 수 없음을 아셨기에,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함께 살게 함으로써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만드셨고, 그 이후 사회라는 국가라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함께 더불어 살게 하셨습니다.
세상은 다 연결되어 있다
이 세상을 가만히 보십시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결국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연과 자연이 연결되어 있고, 자연과 동물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물과 동물이 연결되어 있고, 동물과 인간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연결되어 있는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단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단절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러시아 출신 지리학자이자 철학자인 크로포트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연의 거친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은 종은 공격성이 가장 강한 부류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 돕고 힘을 합칠 줄 아는 종들이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급반 인생이 되라
어떤 것을 배울 때 보통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으로 나누어집니다. 최윤희 씨라는 분은 인생에도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이 있다고 말합니다.
초급반은 ‘척생척사’입니다. 척에 살고 척에 죽는 인생을 말합니다. 있는 척, 아는 척, 잘난 척하면서 사는 한심한 사람은 초급반 인생입니다.
중급반은 ‘땀생땀사’입니다. 땀에 살고 땀에 죽는 인생을 말합니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중급반 인생입니다.
고급반은 ‘공생공사’입니다. 이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곧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곧 고급반 인생은 ‘공생공사’ 정신으로 이웃과 더불어 나누며 사는 위대한 인생을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인생의 초급반과 중급반을 넘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고급반 인생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은 함께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다양합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사랑은 함께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려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고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것 없이 그냥 함께 하는 것 자체도 사랑입니다.
이웃의 기쁨과 슬픔, 인생의 성공과 좌절을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물질로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몸으로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 미치광이 짓을 한 다윗
사울의 시기로 도망자의 신세가 된 다윗은 살기 위해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도망을 갑니다. 살기 위해 간 것인데, 오히려 죽을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했던 그 다윗이라고 아기스 왕에게 보고를 합니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다윗은 죽을까 심히 두려워서, 대문짝에 자신의 몸을 긁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치광이 짓을 했습니다. 겨우 목숨을 건진 다윗은 유다 땅으로 다시 돌아와 가드와 베들레헴 사이에 위치한 아둘람 동굴에 몸을 숨겼습니다.
아둘람 동굴로 와서 밤을 보내는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참 비참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골리앗을 물맷돌로 물리친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용맹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살기 위해 미치광이 짓까지 했습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다윗은 어쩌면 마음이 굉장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다윗
이 힘든 상황 가운데 있을 때, 다윗에게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먼저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형제와 아버지와 일가친척들이 찾아왔습니다. 어쩌면 다윗의 가족들은 사울의 손에 죽을까 다윗을 찾아왔는지 모릅니다.
이들 외에도 오늘 본문 2절에 보니까 환난당한 자들과 빚진 자들과 마음이 원통한 자들 400명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폭정을 행하였으면 이들이 아픔을 안고 다윗을 찾아왔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당시 다윗이라면, 400명이 찾아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이들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숫자가 많다는 것은 유익한 부분도 있지만, 불리한 부분도 많습니다. 지금 다윗의 입장에서는 훨씬 불리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다윗을 찾아온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다윗에게 힘이 되기보다 짐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훈련된 병사들이 아니었습니다. 다 마음이 상하고 찢기고 지쳐서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사울의 군대가 쳐들어오면 힘도 쓰지 못하고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쫓기는 입장에서 한 사람이 몰래 숨어서 지내는 것이 안전하지, 떼거지로 모여서 지내면 금방 들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실제로 다윗은 이 사람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갔다가,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중에는 결국 블레셋으로 망명합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다윗은 그들을 맞아들입니다.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자신도 어렵지만 더 어렵고 힘든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어려운 상황은 함께 견디고 이겨나가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를 비롯한 온 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가 조금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온 시민들이 코로나19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힘든 시간은 혼자서 이겨낼 수 없습니다. 이 어려운 상황을 혼자 견뎌낼 수 없습니다. 함께 견디고 이겨나가야 합니다.
대구의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던 지난 2월 25일, 대구시 의사회 이성구 회장은 전국에 있는 의사들에게 이렇게 호소의 글을 전했습니다.
“존경하는 5,700명의 의사 동료 여러분, 지금 대구는 유사 이래 엄청난 의료 재난 사태를 맞고 있습니다. 선별 검사소에는 불안한 시민들이 넘쳐나는데다 의료 인력은 턱없이 모자라, 입원 치료 대신 자가 치료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모두 생명을 존중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선후배 형제로서, 우리를 믿고 의지하는 사랑하는 시민들을 위해 지금 바로 선별 진료소로, 대구 의료원으로 격리병원으로 그리고 응급실로 와 주십시오. 한 푼의 대가, 한 마디의 칭찬도 바라지 말고 피와 땀과 눈물로 시민들을 구합시다.”
저는 이 호소문을 읽는데 눈물이 그렇게 나더라구요. 이성구 회장의 이 호소문을 읽은 많은 의료진들이 대구로 달려와, 묵묵히 이름도 없이 환자들을 돌보며 자신의 일들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환자 이송을 위해 전국에 있는 119 구급대원들이 차를 끌고 대구로 모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19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또한 최전선에 일하는 의료진들과 봉사자들을 위해 여러 가지모양으로 후원하는 손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저력입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어야 한다
옛날 시골에 살 때 보면 어르신들이 다 익은 감을 따면서, 가장 높은 곳에 달린 감 한 두개는 꼭 남겨두었던 기억이 납니다. 따기가 힘들어 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먹이를 구하기 힘든 추운 겨울에 새들이 먹도록 남겨둔 것입니다.
그리고 씨앗을 심어도 꼭 3개를 심었습니다. 하나는 하늘의 새들이 먹고, 또 하나는 땅속의 벌레가 먹고 나머지는 싹을 틔워 훗날 열매를 맺을 것을 기대하며 씨앗을 심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농사를 짓지 않았습니다. 자연과 새와 벌레까지도 위할 줄 알았고, 그것이 다시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인 것도 알았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이런 지혜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하나님의 백성들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찾아온 무리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이 늘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같이 아파해 주시고 울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도 힘들지만 우리보다 더 힘든 사람들과 같이 아파하고 울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함께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것은 아닙니다. 말로만 함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하기 위해 해야 할 일
첫째,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곧 우리는 ‘나 하나쯤이야 어때’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만 괜찮으면 돼’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입니다.
하지만 자기만 소중히 여기고 자기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소중하면 다른 사람도 소중이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기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그들을 생각했습니다.
링겔만 효과
우리는 보통 혼자가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하면 더 빨리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많은 경우 그렇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가 늘어날수록 개인의 생산성이 떨어지는 현상을 ‘링겔만 효과’라고 합니다. 막시밀리앙 링겔만 교수는 링겔만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줄다리기 실험을 보여 주었습니다.
개인이 가진 힘을 100으로 봤을 때, 2명이 줄을 당기면 한 사람이 100의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각각 93만큼의 힘을 썼습니다. 3명이 줄을 당기면 각 사람이 85만큼의 힘을 썼고 8명이 줄을 당기면 겨우 64정도의 힘밖에 쓰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8명이 줄을 당기면 8명분의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5명분의 힘만 쓴 셈이었습니다. 이 결과를 보면 인원이 많아질수록 개인의 노력은 오히려 감소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혼자서 일할 때보다 공동체 속에서 함께 일할 때 노력을 덜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나 하나쯤 힘 좀 덜 쓰면 어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만이라도 편해야 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링겔만 효과는 비단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하세가와 교수는 그토록 부지런한 개미도 ‘30퍼센트는 논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함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함께한다 해도 오히려 마이너스의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습니다. 나도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 생각할 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공감하라
둘째, 공감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입장에 공감했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박사는 상대를 치유해주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공감’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상담학을 공부할 때 가르쳐 주신 교수님도 상담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들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을 공감해 주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들어주기만 해도 50% 이상 상담하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는 ‘공감 박물관’이 있다고 합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인디언의 속담에서 나온 ‘A mile in shoes’라는 체험활동이 있다고 합니다. ‘A mile in shoes’는 “이웃 사람의 모카신을 신고 이틀 동안 걸어보지 않고서는 그를 판단하지 마라”는 뜻입니다.
이 체험활동은 곧 모르는 사람과 신발을 바꿔 신고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신발을 바꿔 신으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 신발이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할 것입니다.
남의 신발을 신는 다는 자체가 참 불편한 일입니다. 이 체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렇게 낯선 사람의 신발을 신은 채로 서로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듣습니다. 이 시간이 다 끝나면 자신의 신발을 다시 신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고 나면 낯선 사람이지만 상대방을 잘 이해하게 된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정혜신 박사는 공감을 해주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어떨 때는 저의 삶의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제가 아무런 생각 없이 삶의 자리를 벗어나고 싶겠습니까?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죽고 싶은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만 그렇겠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서 정혜신 박사는 우선적으로 그 마음을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그러니 당신 마음은 옳다고 공감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말은 모두 그 말 이후에 하라는 것입니다.
동정과 공감의 차이
동정과 공감은 차이가 있습니다. 동정은 상대방을 나의 입장과 생각대로 이해하는 것이라면 공감은 내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과 생각대로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동정은 결과에 이끌리지만, 공감은 과정에 충실합니다. 동정은 상대방의 마음에 부끄러움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지만, 공감은 그의 아픔과 상처를 감싸고 보듬어 줍니다.
동정심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동정심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일 사람들에게 동정심이 사라진다면 버스나 지하철의 노약자석은 사라질 것입니다.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동정을 넘어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같이 아파하고 울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배려하고 희생하라
셋째, 배려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공감했으면 공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배려해야 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공감했기 때문에 자신을 기꺼이 희생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것은 그들을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살아도 그들과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영국 이얌이란 마을에는 14세기에 유행했던 흑사병이 다시 창궐한 적이 있었습니다. 1665년 9월, 양복점을 하던 비카스(Viccars)는 런던에서 온 천을 인수합니다.
받은 옷감이 축축해서 그는 그걸 펼쳐 불 앞에서 말렸는데 그 안에는 흑사병을 유발시키는 벼룩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주일만에 사망했습니다. 이후 곧바로 마을에 급격히 흑사병이 번지면서 사람들은 공포에 빠져 감염원 없는 청정지역으로 피신하려 했습니다.
그때 그 마을의 두 목회자인 몸페슨과 스탠리 목사는 공동 설교를 하며 마을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이웃 마을로 이 병이 확산되지 않도록 스스로 마을 전체를 격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설교에 감동한 마을 주민들은 스스로를 격리하기로 결정합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 전체에 돌담을 쌓아 스스로를 봉쇄했습니다. 외부인들이 음식과 생필품을 전달하면, 물과 식초가 담긴 우물에 동전을 넣어 소독된 돈으로 그 값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14개월을 지내게 됩니다. 마을 사람 중에 비극을 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중 엘리자베스 헨콕이라는 여성은 남편과 6명의 자녀를 8일 만에 모두 잃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직접 가족들의 시신을 묻는 고통스런 경험을 합니다.
흑사병으로 인해 이얌 마을에서는 몸페슨 목사의 아내를 포함해 마을 사람 2/3가 죽었고 총 350명이던 주민들 중 90명만 살아 남았습니다.
이렇게 희생을 택한 마을 주민들의 숭고한 죽음으로, 인근 어떤 곳에서도 이 병에 걸리는 사람 없이 이 전염병은 1666년 11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얌 마을 사람들은 흑사병이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격리했습니다. 기꺼이 희생했습니다.
이런 이얌마을 사람들과 신천지를 비교해 보면 너무나 비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함께 하기 위해서 기꺼이 배려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원수까지도 배려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20)”.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풍습을 잘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으라’는 어떤 뜻일까요? 원수의 머리가 다 타들어가도록 그 머리에 숯불을 쌓으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빵을 굽는 화덕의 불을 완전히 끄지 않고 다음날 요리를 위해 항상 약한 불씨를 남겨두었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잿더미 속에 남아 있는 작은 불씨를 이용해 다시 불을 지펴서 사용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그렇게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화덕 관리를 잘못 해서 불씨를 아예 꺼드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을 합니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머리에 화로를 이고 이웃집에 숯불을 구하러 가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으라”는 말씀은 원수가 머리에 이고 온 화로에 숯불을 차곡차곡 쌓아 주라는 것입니다. 곧 성경은 원수도 배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위기 상황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이 위기 상황은 혼자서 이겨나갈 수 없습니다. 함께 이겨 나가야 합니다. 함께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지만 함께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버릴 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동정을 넘어 공감할 때 함께할 수 있습니다. 배려하고 희생할 때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