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설교연구원 설교] 눈치가 아니라 믿음으로 돌파하라
본문: 창세기 12장 10-20절
신앙의 정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신앙은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야기 해 보면, 사람마다 신앙을 정의하는 것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는 “신앙이란 되돌이표 되는 죄의 악순환을 깨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신앙은 죄가 되돌이표로 반복되는 악순환을 끊는 것이다.
사람은 오늘 기분 좋으면, 내일도 기분 좋길 원한다. 지난 주 설교에 은혜 받았다면, 다음 주에도 설교에 은혜 받기를 원한다. 작년에 잘 풀렸던 인생이 평생 지속되길 바란다.
문제는 죄다. 즉 인간의 악이다. 인간의 악이 어제 좋은 기분 오늘 좋게 만들지 못한다. 전 주에 설교를 통해 받은 은혜 이번 주 은혜를 받지 못한다. 악, 탐욕 등이 선순환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죄와 악은 언제나 악순환을 만든다. 즉 사람은 선순환이 아니라 악순환 만들기 명수다.
주식 시장이 내리막길이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길을 갈 것이라고 난리다. 얼마 전만 해도 강남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최근 5억 이상 떨어진 곳도 있다. 인간이 하는 행동은 선순환은 못 만든다. 오직 악순환을 만들 수밖에 없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중국, 한국, 이태리, 이란, 프랑스, 미국 등으로 끝을 모를 정도로 확산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악순환을 만드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인간인 악순환을 만드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이 격언이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인 세 살에도 욕심이 끝이 없다. 악순환 만드는 버릇이 죽을 때까지 간다.
이럴 때 인간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분이 있다.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악순환이 아니라 선순환을 만든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죄의 고리를 끊는다. 불법에서 떠나게 만든다. 즉 악의 고리는 끊고 생명의 역사가 발생한다.
우상은 악순환을 만든다
악순환의 대표적인 것이 우상이다. 우상은 죽을 때까지 악순환의 고리를 연결한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 때부터 여러 민족의 신들을 만나고 우상숭배 하다가 망하고,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우상은 구약과 신약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는 악은 질김과 악순환은 끝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성경 열왕기상 18장 21절에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과 우상 중 양자택일하라고 한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을 지니라(왕상 18:21)”.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고 머뭇거리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게 된다. 머뭇거리면 악에 선택할 확률이 커진다. 인간 자체가 죄악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눈치 보지 않아야 한다. 믿음으로 돌파해야 한다. 믿음으로 돌파해 신앙의 악순환이 끊어야 한다. 우상의 악순환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예수님은 선순환을 만든다
신앙인은 악순환이 아니라 선순환이 만드는 사람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선순환을 만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신앙의 선순환을 만들려면 보물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두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육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영적인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나아가 땅의 보물을 쫓지 않고 하늘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을 쫓아야 한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그리스도인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한다. 그럴 때 악순환이 아니라 선순환을 만들며 살 수 있다.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쫓으며 살 수 있다. 눈치가 아니라 믿음으로 돌파할 수 있다.
보물을 땅에 쌓지 않아야 한다
우상은 보물을 자기 안에 쌓아두라고 한다. 우상은 악을 만드는 자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 중심이다. 보물을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쌓아두라고 한다. 세상을 대표하는 철학 중 하나는 노자사상은 보물을 자기 안에 쌓으라고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인간이 쌓을 보물 세 가지를 이야기 한다. 그 세 가지는 첫째, 사랑과 자비인 자애다. 둘째, 비움과 절제인 검소다. 셋째, 천하에 앞서지 않는 공손과 겸손이다.
이 세 가지 보물을 쌓아두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애로우면 능히 용감할 수 있다. 둘째, 검소하면 능히 넓어질 수 있다. 셋째, 천하에 앞서지 않기 때문에 능히 완숙한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노자 사상은 인간에게 쌓아두는 것을 고결하게 말한다.
귀티 나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부자들이다. 잘 먹고 잘 입으니 귀티가 나게 만든다. 이 부자들도 보물을 창고에 쌓아둔다. 그것이 누가복음 12장 16-18절이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눅 12:16-18)”.
한 창고에만 쌓는 것이 아니다. 창고를 짓고 또 짓는다. 끝없이 보물을 땅에 쌓아둔다. 보물이 많으니 물질적으로는 풍요롭다. 반면 영적으로는 궁핍하다.
보물은 하늘에 쌓아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보물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두어야 한다. 하늘에 쌓으면 하늘에 쌓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더 쌓으라고 보태어주신다(말 3:10). 우리가 보물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고자 하는 순간, 악순환도 선순환으로 바뀐다.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이다. 뭐든지 기본기가 중요하다. 태권도 배울 때도 기본기를 가장 중시한다.
제식훈련을 받을 때도 기본기를 강조한다. 요리연구가이지 기업인이 백종원 대표도 요리하는 사람에게 기본을 요구한다. 요리하는 사람의 기본이 있다. 청소, 음식물 관리, 신선도 등이다.
카페에 갔는데 조금 지저분했다. 이는 카페 운영의 기본기가 안 되어 있다는 반증이다. 지저분하면 가는 것이 망설여진다. 저도 설교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기본기를 강조한다. 시간 지키기, 과제 해오기, 일상에서 자기 관리 등을 잘 해야 좋은 설교자가 된다.
아브라함은 눈치로 나아갔다
오늘 아브라함은 신앙의 기본이 되어 있지 못하다. 하나님께서 그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 말은 하나님의 별도 말씀이 있을 때까지 가나안 땅에 살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가나안 땅을 떠난다. 눈치를 본다. 하나님의 눈치를 보았다. 하나님의 눈치를 본 뒤 애굽으로 내려갔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가나안 땅까지 왔다. 믿음으로 가나안 땅에 뼈를 묻어야 하는데 기근이 들자 믿음이 아니라 눈치로 살기로 한다. 믿음으로 사는 길을 선택했어야 하는데 불신으로 사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으로 돌파하는 삶이다. 만약에 믿음으로 돌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퇴보하거나 잘 해야 제자리걸음이다.
‘붉은여왕 효과’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이는 발전하지 못하면 도태, 즉 후퇴한다는 말이다. 발전이 없는 삶은 이미 퇴보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믿음은 성장해야 한다.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면 퇴보한다. 퇴보하는 순간 딛지 않을 곳에 발을 딛는다.
‘링반테롱 현상’이란 것이 있다. 링반테롱은 야간이나 악천후로 산에서 길을 잃으면 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도, 원을 그리며 계속해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래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해도 실패를 반복할 때 링반테롱 현상에 빠졌다고 말한다. 아무리 힘을 써도 제자리걸음 한다는 것이다.
신앙에서도 ‘붉은여왕 효과’와 ‘링반테롱 현상’은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세상 눈치를 보는 순간 믿음으로 돌파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돌파하지 않는 순간 퇴보 혹은 제자리걸음 신앙생활하게 된다.
눈치가 아니라 믿음으로
오늘 아브라함이 그러했다. 그가 기근을 믿음으로 돌파해야 했다. 하나님의 뜻을 고수해야 했다. 하지만 눈치를 봤다. 결국 애굽으로 내려갔다. 눈치가 아니라 믿음으로 돌파해야 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돌파하지 않으니 생각지 못했던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치껏 하면 좋은 결과로 이어질 줄 알았다. 도리어 위기를 만났다. 그것이 11절부터 13절이다.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창 12:11-13)”.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자, 복병이 기다리고 있다. 곧 ‘범을 피하니 이리가 기다리고 있는 격’이다. 기근이 없는 곳에서 잘 먹고 잘 살 줄 알았다. 아내 미모가 문제가 될 줄 몰랐다. 아내의 미모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웠다.
기근은 믿음으로 돌파해야 한다. 눈치가 아니라 정공법으로 나아가야 했다. 눈치로 나아가니 사라 때문에 죽느냐 사느냐 상황이 되었다.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눈치를 살피면 산 넘어 산을 만난다. 더 높은 산이 기다리고 있다.
믿음으로 돌파해야 한다
우리가 치할 행동이 있다. 난관을 만나면 믿음으로 돌파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난관의 때에 기근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더 믿음으로 돌파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들이 취할 전략은 ‘우월전략’이다. 이 전략은 자신의 입장에서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한 전략이다. 우리가 ‘우월전략’을 취하면, 우리 입장아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최고의 결과를 얻게 된다.
이번 사건은 아브라함에게는 오히려 약이 되었다. 이후부터는 눈치가 아니라 믿음으로 돌파한다. 조카 롯과 땅을 분배할 때 조카에게 선택권을 먼저 준다. 즉 앞으로의 상황을 믿음으로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인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 즉각적으로 믿음으로 돌파한다.
여기서는 믿음으로 돌파하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다 선택했다. 눈치를 보는 사람은 결정 기준이 영적이지 않다.
믿음으로 돌파하는 사람은 결정 기준이 영적이다. 아브라함이 영적인 기준을 가졌다면 애굽에 가려고 하기 전에 먼저 기도했을 것이다. 영적이지 않으니 기근만 눈에 보였다.
믿음의 사람들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기도를 한다. 오늘 아브라함은 기도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브라함도 가나안 땅의 기근이 닥치자 고민 많이 했다.
가나안에 남을 것인가? 애굽으로 떠날 것인가? 하지만 그는 고민에 그쳤다. 기도로 니어지지 못햇다. 그가 눈치를 보는 고민만 했기 때문이다.
유진소 목사는 그의 책 <기도는 거룩한 고민입니다>에서 ‘생각이 고이면 고민이 된다’고 했다. 영적으로 고민하면 반드시 기도로 연결된다. 고민이 육적이니 애굽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 가 눈치만 살폈다.
생각이 고이면 고민이 된다. 하지만 믿음이 고이면 기도가 된다. 아브라함은 기도로 돌파해야 하는 데 기도로 돌파하지 않았다. 믿음으로 돌파해야 하는 데 믿음으로 돌파하지 않았다.
현실은 믿음 대신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문제가 생기면 믿음으로 돌파해야 한다. 그럼 왜 문제가 터지면 믿음으로 돌파해야 하는가? 신앙인의 삶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현실적인 모습은 어떤가? 믿음 대신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간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엘리멜렉도 그러했다.
룻기 1장에 보면 엘리멜렉이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피신한다. 믿음으로 돌파했어야 했는데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결국 엘리멜렉은 물론 결혼 한 두 아들도 죽었다.
믿음으로 돌파하지 않으면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불행한 일이 생긴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살 때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믿음으로 돌파해야 한다. 예수님처럼 믿음으로 돌파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로마인들이나 유대지도자들 반응을 살피지 않았다. 오로지 믿음으로 돌파했다.
믿음으로 돌파하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뒤 믿음으로 살았다. 그 결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구약에서 믿음으로 돌파한 사람이 있다. 바로 욥이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고난을 돌파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단의 시험에 의해 자녀들이 죽임을 당한다. 그 동안 모아 둔 소유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믿음을 잃기는커녕 더욱 견고해졌다. 그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믿음으로 돌파했다. 그가 믿음을 돌파한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욥 1장 21-22절이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오늘 아브라함은 달랐다. 믿음으로 돌파하지 않고 눈치를 살피다 망신살만 당했다. 믿음이 아니라 상황을 살폈다. 눈치를 살피니 아브라함 때문에 애굽 왕까지 하나님께 혼쭐이 났다.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까지 내리셨다. 애굽 왕은 당하지 않아도 될 재앙을 아브라함 때문에 당했다(17절).
믿음으로 돌파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신앙생활이란 나 때문에 주위에 피해를 당하게 하는 게 아니다. 나 때문에 주위가 도움을 받게 하는 것이다. ‘코로나19’를 통해 교회가 세상에 피해를 입히면 안 된다. 이는 믿음으로 돌파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럴 때는 피해주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국가 시책에 동참해야 한다.
기근으로 인해 애굽까지 간 것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한 것은 믿음으로 돌파하지 않은 것이다. 기근은 생명과 연결될 수 있다.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생명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믿음으로 돌파해야 했다. 우리는 믿음으로 돌파해야 할 때 눈치를 보기에 문제다.
‘눈칫밥’이란 말이 있다.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얻어먹는 밥’을 말한다. 아브라함은 아내 문제는 눈치로 해결하면 안 되었다. 믿음으로 해결해야 했다.
문제가 터지면 남에게 문제의 근원을 떠넘긴다. 아니다. 자기가 만든다. 더욱이 하나님께 떠 넘기면 안 된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만들기 때문이다.
C. S. 루이스가 그의 책 <고통의 문제>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의 문제 5분의 4는 사람으로 인해 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만든다. 눈치 보다가 만든다. 저도 저의 문제를 대부분 제가 만든다. 믿음이 아니라 눈치보다가 만든다.
우리는 문제를 만날 때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 안에서 풀어가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풀어가려면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또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믿음으로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 저는 아트설교연구원 회원들에게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있다.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라”.
단, 믿음으로 돌파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자기 한계를 돌파하지 못했다. 환경의 한계에서 눈치만 봤다. 그 결과 애굽 왕에게 창피를 당했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창 12:18-19).”
반면 에스더 왕비와 모르드개는 달랐다. 민족의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믿음으로 돌파한다. 그들은 온 민족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믿음으로 온 민족이 함께 기도했다. 그 결과 총리 하만이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부림절 잔치를 벌였다.
우리는 믿음으로 돌파해야 한다. 눈치로 살면 안 된다. 인생에는 두 가지 인생이 있다. ‘역적의 인생’과 ‘역전의 인생’이다.
조선 시대에는 신하가 왕을 배반하면 역적이 되었다. 그럼 3족이 멸문을 당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삶이다. 그럼 하나님께 역적이 된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믿음으로 살면 ‘역전의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떤 것도 역전시킬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는 죽음을 생명으로 역전시켰다. 바울은 하나님께 역적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뒤 역전의 삶을 살았다.
역적 인생은 세워진 것을 무너지게 만든다. 역전 인생은 무너진 것도 세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역적이 아니라 하나님 덕분에 역전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눈치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시편 127편 1절이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편 127:1)”.
나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야 한다. 가정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야 한다. 민족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도록 하려면 눈치 보는 삶이 아니라 믿음으로 돌파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믿음으로 돌파하려면 내가 앞서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앞서주셔야 한다. 내가 앞서면 하나님께 역전이 된다. 하나님께서 앞서면 역전의 인생이 된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 역전의 인생이 될 줄 알았는데 사라와 애굽 왕에서 역적의 인생이 되었다. 그러므로 눈치를 살아가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문제는 늘 생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눈치가 아니라 믿음으로 돌파하는 신앙생활을 하길 축복한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