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주민들에 자유 선물할 때까지… 6·25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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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지저스아미 2020년 6월호 발간사]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

최근 국민일보에서 매주 기획 연재되고 있는 6·25 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의 글들을 요약 발췌하였습니다.

▲새에덴교회 참전용사 초청행사에서 흥남철수작전을 지휘했던 故 에드워드 알몬드의 외손자인 토마스 갤로웨이 퍼거슨 씨가 명비에 새겨진 故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 故 밴 플리트 주니어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크투 DB

▲새에덴교회 참전용사 초청행사에서 흥남철수작전을 지휘했던 故 에드워드 알몬드의 외손자인 토마스 갤로웨이 퍼거슨 씨가 명비에 새겨진 故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 故 밴 플리트 주니어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크투 DB

올해는 6·25 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는 이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영적으로 반드시 끝내야 하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 공산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됐다. 지상군 약 18만명, 대포 400문, 소련제 탱크 242대 등의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남침 4일 만에 국군은 절반가량인 4만4000여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다. 서울도 함락되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6·25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에서 대한민국이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피 흘리며 싸운 국군과 UN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군은 한국을 위해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다. 미군은 6·25전쟁 3년 1개월 동안 178만명이 참전했다. 인천상륙작전, 낙동강 방어 전투, 장진호 전투 등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전사 5만 4,246명, 실종 8,177명, 포로 7,140명, 부상자 10만 3,284명 등 17만 2,847명이 희생됐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장관·장군 등 최고위층 아들 142명이 참전해, 그 중 35명이 전사했다는 사실이다.

하버드 대학의 교내 예배당 벽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2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월터리드 미 육군병원에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중상을 입은 용사 수십 명이 아직도 병상에 누워 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소련제 T-34 전차. ⓒ지저스아미

▲1950년 6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소련제 T-34 전차. ⓒ지저스아미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40여일 만에 낙동강 이남인 대구 부산 마산 등 몇몇 지역을 제외한 남한의 전 지역이 북한 공산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대한민국은 낙동강 방어선만 뚫리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때 한국교회는 하나가 되어 부산 초량교회, 중앙교회, 항서교회, 광복교회, 구 경남도청, 부산 구덕운동장, 해운대 백사장 등 여러 장소에 모여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특히 초량교회에는 전국에서 피난 온 250여명의 목회자와 장로들이 모였다. 이들은 한상동, 박형룡, 박윤선 목사를 중심으로 8월 말에서 9월 중순까지 2주 동안 국난 극복을 위한 구국기도회를 열었다.

그렇게 초량교회에서 밤낮없는 회개기도가 있은 지 3일 후, 인간적으로 볼 때는 성공할 확률이 5,000분의 1도 되지 않는다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

1950년 8월 말부터 부산 초량교회에서 시작된 통회자복기도회에는 250여명의 목사 장로가 모여 절체절명의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1950년 8월 말부터 부산 초량교회에서 시작된 통회자복기도회에서는 250여명의 목사 장로가 모여 절체절명의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1950년 8월 말부터 부산 초량교회에서 시작된 통회자복기도회에서는 250여명의 목사 장로가 모여 절체절명의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의 양상을 뒤바꾼 대역전 드라마였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 시점은 영등포 부근 한강 방어선을 처음 시찰한 1950년 6월 29일이다.

이날 한강변에서 호를 파고 경계하던 병사와 대화를 하면서, 조국 수호 결의에 가득 차 있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통해 반드시 한국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날 밤 도쿄의 숙소로 돌아온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군사전술 책을 밤새도록 읽었다. 책을 읽은 후 성경을 꺼내 읽고 기도를 했다.

그리고 “이것 말고 한국을 건질 작전은 없다”고 확신한 후에 자리에 누웠다고 자신의 회고록에 적고 있다.

인천 앞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가 9m나 되기 때문에, 밀물 때 2시간 안에 상륙하지 않으면 3.2㎞나 되는 갯벌을 엄폐물도 없이 전진해야 한다.

갯벌에서는 전차나 차량은 당연히 이동할 수 없고, 도보도 사실상 어렵다. 상륙할 장소는 해변의 모래사장이 아니라 방파제와 축대였다. 상륙함을 정박시킨 후에 사다리로 올라가야만 한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지저스아미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지저스아미

상륙작전으로서는 그야말로 재앙이 될 만한 모든 조건을 다 갖고 있었다. 그래서 참모들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률이 5,000분의 1밖에 안 된다고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반대했다.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 셔먼 해군참모총장, 미 합참에서 모두 반대했다.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해야 적군의 숨통을 제대로 끊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한 의지를 나타냈고 마침내 관철시켰다.

9월 15일, 드디어 병력 7만 5,000명을 태운 미 7함대의 함정 261척이 인천 앞바다로 향했다. 미 해병대 병력이 탑승한 17척의 상륙정과 전차 9대를 적재한 전차 상륙함이 녹색 해안으로 명명된 월미도 해변을 향해 일제히 전진했다.

오전 6시 30분, 상륙정들은 무사히 해안선에 도착해 병력을 상륙시키는 데 성공했다. 긴박한 순간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썰물로 인해 함대는 후방으로 물러났다.

오후 밀물 시기 후속 주력부대가 상륙하기 전까지, 월미도에 상륙한 선발대는 적 지역에 고립됐다. 적의 반격을 차단하기 위해 함재기들이 출동해 월미도로 향하는 도로를 맹폭격하며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오후 5시 33분 밀물 때가 되자 해병 제5연대가 월미도 건너편 만석동 적색 해안으로 상륙하였다. 동시에 해병 제1연대가 인천항 남측의 낙섬 인근 해안에 설정된 청색 해안에 상륙했다. 이들 두 연대는 9월 16일 새벽까지 인천 도심을 누비며 시가지를 완전히 장악했다.

성공적인 인천상륙작전에는 21명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로페즈 중위다. 그는 상륙작전 당시 미 해병대 1사단 제5해병연대 장병들이 만석동 적색 해안에 상륙할 때 선봉에 서서 방파제를 넘으며 부대를 진두지휘했다.

▲로페즈 중위가 인천상륙작전 당시 사다리를 타고 만석동 적색 해안에 상륙하고 있다. ⓒ지저스아미

▲로페즈 중위가 인천상륙작전 당시 사다리를 타고 만석동 적색 해안에 상륙하고 있다. ⓒ지저스아미

로페즈는 선두에서 수류탄을 던져 적의 진지 한 곳을 파괴했다. 그리고 적의 다른 진지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려는 순간, 적의 기관총탄이 그의 가슴과 오른쪽 어깨를 관통했다.

치명상을 입은 로페즈가 손에서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선발대 전체가 위험에 처하자 로페즈는 “수류탄이다!”라고 외치고 온몸을 던져 수류탄을 감싸안고 장렬히 전사했다. 그는 그렇게 많은 전우의 목숨을 구하고 24살의 나이로 산화했다.

6·25 전쟁의 전세를 뒤집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결코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다. 월미도 앞바다에서 적의 포격에 의해 전사한 스웬슨 중위부터 로페즈 중위에 이르기까지, 21명 젊은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전쟁 역사에 길이 빛날 전투로 ‘독 안에 든 쥐’가 된 공산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혼비백산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전세는 역전됐고 9월 28일 빼앗겼던 서울을 되찾았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9월 29일 낮 12시, 수도 서울의 환도식(還都式)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이승만 대통령 각하가 영도하는 대한민국 정부에 돌려드립니다. 오늘의 승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제 서울시민들은 공산군의 압제에서 해방돼 자유와 인권을 되찾았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중 미군이 공산군의 포탄을 맞고 사망한 스웬슨 중위의 수장식을 함정에서 거행하고 있다. ⓒ지저스아미

▲인천상륙작전 중 미군이 공산군의 포탄을 맞고 사망한 스웬슨 중위의 수장식을 함정에서 거행하고 있다. ⓒ지저스아미

이승만 대통령도 맥아더 장군의 손을 잡으며 “대한민국을 되찾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박윤선 목사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다. “9·28 서울 수복이 있기 전 초량교회당에서 열렸던 피난 교역자 부흥회를 나는 잊을 수 없다. 사흘째 되던 날 새벽으로 기억되는데, 그 시간에 참석한 교역자들 거의 대부분이 크게 통회하며 자복하는 회개를 시작했다.

그 뼈아픈 회개는, 각자가 과거 일제의 핍박 시에 신사참배를 한 그 죄로 인한 것이었다. 나도 단 한 번이지만 신사참배를 한 범과가 있으므로 언제나 그 일로 인해 원통함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때 그 죄를 회중 앞에 고백했던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은, 이처럼 교역자들의 통회 자복의 회개가 있은 후에 유엔군이 승리하고 공산군은 38선 이북으로 물러가게 된 사실이다. 회개의 사건에 뒤이어서 승전한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도와주신 결과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기도로 승리한 영적 전쟁이었고, 하나님이 이루신 기적이었다.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지체없이 북진을 해야 한다”고 했으나,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의 38선 돌파 권한이 없다”며 난색을 보였다. 이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엔이 결정할 때까지 장군은 휘하 부대를 데리고 기다릴 수 있지만, 국군이 밀고 올라가는 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아니요. … 우리 국군은 북진할 것이요.”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할리우드 배우 리암 니슨이 맥아더 장군 역할을 하고 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할리우드 배우 리암 니슨이 맥아더 장군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9월 30일 육군 수뇌부를 호출했다. “정일권 국군참모총장은 38선에 도달한 우리 국군에게 어찌해서 북진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소.”

정 총장은 “38선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정 총장은 맥아더로부터 미국 정부가 명령할 때까지 단 1명도 38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장군들을 이렇게 꾸중했다. “38선이 어찌 됐다는 것인가. 무슨 철조망이라도 쳐 있다는 말인가.” 정 총장은 이 대통령이 그때처럼 노여워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정 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대한민국 국군입니다. 유엔군과의 지휘권 문제가 있습니다만, 각하의 명령을 따라야 할 사명과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품 안에서 명령서를 꺼내 정 총장에게 건넸다. “이것이 나의 결심이요, 나의 명령입니다. 대한민국 국군은 38선을 넘어 즉시 북진하라. 1950년 9월 30일 대통령 이승만.”

이 대통령으로부터 북진하라는 명령을 받은 정 총장은 김백일 장군에게 38선 돌파 명령을 내렸다. 김 장군은 백골부대인 3사단 23연대장 김종순 대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귀 연대에 북진 명령을 내린다. 38선을 돌파하라. 38선은 이 순간부터 없어진다.”

▲1950년 9월 국군이 38선을 통과하고 있다. 유엔군이 역사적인 돌파를 기념해 세운 푯말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지저스아미

▲1950년 9월 국군이 38선을 통과하고 있다. 유엔군이 역사적인 돌파를 기념해 세운 푯말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지저스아미

한국군 3사단 23연대는 이렇게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부대가 됐다. 23연대가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한 것은 1950년 10월 1일 오전 11시 25분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논란 끝에 38선 돌파를 결정했다.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3일 ‘유엔군은 10월 3일 0시를 기해 38선 이북의 북한에 작전을 연장한다’는 일반명령 제2호를 발표했다.

국군 제1사단은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도착했다. 10월 19일, 국군과 유엔군 5개 사단은 포위망을 형성해 평양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제1사단 15연대는 대동강 상류에서 도하 작전에 성공하고 곧바로 모란봉을 공격했다. 오후에는 마침내 평양 시내 깊숙이 진입해 주요 건물에 태극기를 게양하며 평양 입성의 개가를 울렸다.

국군이 38선을 돌파한 날은 대한민국 국군에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38선 돌파에 앞장섰던 국군 제3사단의 북진을 기념해, 1956년 9월 14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국군의 날’을 대통령령으로 제정·공포했다. 이때부터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키게 된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첫 전투는 아말렉 민족과 르비딤에서의 전투였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투에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겼고,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겼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붙잡았고, 여호수아가 지휘했던 이스라엘 군대는 기도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일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출 17:14)”.

▲이용희 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국가기도연합 제공

▲이용희 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국가기도연합 제공

최근 국민일보에서 매주 기획 연재되고 있는 김재동 목사님의 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는 한국교회의 회개와 기도로 기적적으로 소생했던 6·25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6·25전쟁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나라를 살려주신 6·25전쟁 이야기를 ‘귀에 외워 들리’도록 반복해서 얘기해줘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이 민족의 살 길이다.

6·25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6·25 전쟁 이야기를 읽고 귀에 외워 들리도록 들은 우리 자녀들이 마침내 6·25 전쟁을 끝내고, 2천 5백만 동포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는 복음통일을 이뤄야 한다.

#에스더기도운동 #에스더기도운동본부 #국가기도 #이용희교수

이용희 교수
(에스더기도운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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