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설교연구원 설교] 나답게 살아야 합니다
시편 139편 13-14절
중국의 4대 미녀
강상구의 《그때 장자를 만났다》에 보면, 중국의 4대가 미녀가 있다고 한다.
첫째 미녀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인 양귀비다. ‘경국지색’이란 ‘나라를 뒤집어 엎을 만한 미인’이라는 뜻이다. 양귀비는 꽃도 그 앞에 서면 부끄러워 고개를 돌린다고 해서‘수화(羞花)’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둘째 미녀는 삼국지에서 사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초선이다. 초선은 폐월(閉月)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폐월’이란 그 미모에 주눅 들어, 달이 구름 사이로 숨어 버린다는 뜻이다.
셋째 미녀는 한나라의 후궁이었지만 흉노의 후궁으로 끌려간 왕소군이다. 왕소군은 낙안(落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낙안’이란 왕소군의 미모를 보고 날아가던 새도 넋을 잃고 날갯짓을 멈추어서 떨어졌다는 의미다.
마지막 미녀는 월왕 구천이 오왕 부자를 손아귀에 넣기 위해 보낸 서시다. 서시는 ‘침어(沈魚)’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서시의 미모를 보고 물고기마저 넋을 놓고 헤엄치는 법을 까먹어 꼬르륵 잠겨버렸다는 뜻이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얼마나 예뻤으면 이렇게까지 표현을 했겠는가? 그런데 서시에게는 병이 있었다. 서시의 병은 보통 가슴이 아프고 얼굴을 찡그린다는 증세로 볼 때 위장병이었다고 추측한다.
재미있는 것은 서시는 아파서 찡그리는 것인데, 서시를 보는 동네 처자들의 눈에는 살짝 눈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그 눈웃음이 예뻐서 동네 처자들이 너도나도 다 따라했다.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서시가 할 때는 예뻤는데 가뜩이나 안 예쁜 처자들이 얼굴까지 찡그리니 동네 총각이 봐주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한단지보(邯鄲之步)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말이 있다. ‘본분을 잊고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다 본래 자신이 가졌던 것도 잃고 남의 흉내도 제대로 못 내게 되어 결국 두 가지 다 잃는다’는 뜻이다.
한단지보라는 말이 나온 유래를 살펴보면 이렇다. 중국 연나라 어떤 소년이 “조나라 수도인 한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걸음걸이처럼 경쾌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는 없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이 소년은 연나라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너무 촌스럽다고 생각하고, 한단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배우기로 마음먹고 한단 땅을 가게 된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십수 일 만에 한단 땅에 도착한 소년은 유심히 한단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관찰했다. 열심히 흉내도 냈다.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왜, 안될까?” 소년은 곰곰이 생각했다. 소년은 자신이 원래 걸었던 걸음걸이를 잊지 않고는 새로운 걸음걸이를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원래 걸음걸이를 잊으려고 했다.
동시에 더 열심히 한단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냈다. 그러는 동안 세월이 많이 흘렀다. 하지만 소년의 걸음걸이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소년은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다고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원래 걸었던 걸음걸이마저 할 수 없었다. 결국 소년은 슬슬 기어서 겨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남 흉내내지 말고 나다운 삶을 살라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서시를 흉내내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고, 자신의 걸음걸이도 모르면서 한단의 걸음걸이를 배우겠다고 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그저 남이 하는 게 멋있어 보이니까 한 것뿐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인지, 내가 해도 어울리는지는 생각하지 않은 결과다.
우리나라 속담에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항상 작아 보이고,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이 크게 보인다는 의미다. 내가 하는 일은 하찮아 보이고,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대단해 보인다는 것이다.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고 싶어서 시켰는데, 친구가 짬뽕을 먹는 것을 보니 짬뽕이 더 맛있어 보인다. 반대로 짬뽕을 시켜서 먹으면 짜장면이 더 맛있어 보인다.
남 흉내만 내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는 이런 충고를 한다. “분주한 자들은 하나같이 처지가 딱하지만, 그 중에서도 자기 일에 분주한 것이 아니라 남의 잠에 맞춰 자기 잠을 조절하고, 남의 걸음에 보조를 맞추고, 사랑과 증오에서 남의 지시를 받는 자들의 처지가 가장 딱하다. 인생에서 자신의 것이 얼마나 적은지 생각해 보라.”
철학자 하이데거도 ‘비본래적 삶’이라는 말을 했다. ‘비본래적 삶’이란 자기가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남들이 좋다는 것을 똑같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똑같이 싫어한다. 유행을 따라 남들이 입으니까 같이 입고 맛있다고 하니 그냥 따라 먹는 것이다.
‘비본래적 삶’이란 한마디로 줏대 없는 삶을 말한다. 우리는 줏대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가장 아름다운 삶은 남을 흉내내는 삶이 아니라 가장 나답게 사는 것이다.
사람은 신묘막측한 존재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3-14)”.
시편 139편은 다윗의 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내장 곧 오장육부를 만드셨고, 어머니의 모태에서 자신을 만드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심히 기묘하게 지으셨음에 대해 감사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심히 기묘하다는 것을 ‘신묘막측(神妙莫測)’하다고 표현했다.‘신묘막측’하다는 것은 인간의 내부구조와 그 절묘함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신비함이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놀랍다는 의미다.
사람은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이다
사람은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원숭이가 진화되어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흙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째날 인간을 만드시고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만드셨지만 너무 잘 만드셨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현재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세계 최고가의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라고 한다. 그림 값이 얼마인지 아는가? 현재 추정가로 40조원 정도 된다고 한다.
사람이 만든 최고의 미술작품도 이 정도의 가치가 있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이다. 최고의 예술가이신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이 바로 사람이다.
다윗은 그것을 깨달아 알았기에,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만 신묘막측하게 만드셨는가? 저와 여러분도 신묘막측하게 만드셨다.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드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동일한 상품으로 만들지 않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작품으로 만드셨다. 각기 다른 작품으로 만드셨다.
작품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마트에 가면 상품이 있고, 미술관에 가면 작품이 있다. 상품은 비교 대상이 된다. 같은 가격이면 질 좋은 상품을 선택한다. 같은 질이면 가격이 더 싼 상품을 선택한다.
요즘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젊은이들은 오프라인 매장에 가서 직접 물건만 확인하고, 인터넷에서 더 싸게 구입한다고 한다. 상품은 비교 대상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작품은 이 세상에서 유일한 것이다. ‘모나리자’라는 작품이 40조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최고의 작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최고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작품이다. 겨울이면 하늘에서 셀 수 없는 눈이 내려온다. 그 수많은 눈들 중에 결정체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해변에는 수많은 모래들이 있다. 그 수많은 모래들 가운데 똑같은 것은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
나답게 사는 것이 줏대 있는 삶이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었다. 지금도 살고 있고,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이 있다.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일란성 쌍둥이조차 다른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은 사람이다. 하나님이 걸작품으로 만들어 주셨다면 상품이 아니라 걸작품으로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살려는 것은 상품의 삶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나답게 사는 것이 걸작품으로 사는 것이다.
나답게 사는 것이 줏대 있는 삶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상품의 삶이 아니라 나답게 사는 걸작품으로 살아야 한다.
비교하지 마라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부모의 잔소리다. 부모의 잔소리 중에서도 제일 싫어하는 잔소리가 무엇인지 아는가? 누구랑 비교해서 하는 잔소리이다.
‘니 집 아들은 이번에 등수가 몇 등이 올랐다고 하더라’, ‘걔는 그렇게 하는데 너는 도대체 뭐하느냐’ 아이들 나름대로 삶이 있고 속도가 있는데, 부모들은 그것을 용납을 못한다. 공부 머리가 없으면 다른 머리가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솔직히 부모 된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비교당하는 걸 싫어하지 않는가? 남편들이 제일 싫어하는 남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옆집 아저씨다. 옆집 아저씨라면 사이가 좋아야 할 것 같은데, 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아내 때문이다. 아내가 늘 옆집 아저씨와 비교하기 때문이다.
“옆집 아저씨는 돈도 잘 벌어오고 가정적이기까지 한다는데 당신은 도대체 뭐하냐? 제대로 하는 것이 뭐가 있냐?”고 따진다. 어쩌면 아내들도 옆집 아줌마가 제일 싫을지 모른다.
다른 사람과 늘 비교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없다. 행복할 수가 없다. 왜 그런가? 항상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나다운 삶을 살려면, 남과 비교하면 안 된다.
전 문화부 장관 이어령 선생께서 쓰신 ‘일등을 시키려면’이라는 글이 있다. “같은 방향으로 뛰면 일등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나 동서남북으로 뛰면 네 사람이 일등을 해요. 360도 둥근 원으로 뛰면 어때요? 360명의 일등이 나오잖아요. 왜 꼭 그 학교라야 하나요? 왜 꼭 그 직업이라야 하나요? 판사, 검사가 아니라도 의사, 변호사가 아니라도 길은 많아요.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내 아이만의 재능, 그것이 경쟁에서 일등을 할 수 있는 지름길이예요. 남들이 남쪽으로 뛰어갈 때 혼자서 동쪽으로 가고 싶어하면, 그곳으로 뛰게 하세요. 거기 아무도 먹지 않은 탐스러운 과일이 열려 있어요.”
결국 이어령 선생의 이야기도 하나님께서 주신 아이의 재능대로 살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교육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맡겨주신 달란트대로 살라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온다. 주인은 타국으로 떠나면서, 세 명의 종에게 각각 달란트를 맡기고 갔다. 주인은 종들에게 주고 싶은 대로 달란트를 준 것이 아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
주인은 각각 그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겼다. 한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은 그 종에게 한 달란트의 재능이 있다는 의미다. 다섯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은 그 종에게 다섯 달란트의 재능이 있다는 의미다.
오랜 후에 주인은 집으로 돌아와 종들과 결산을 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종과 두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이 맡긴 만큼 달란트를 남겨 둘 다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한 달란트 맡은 자는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기만 해서 책망을 받았다. 책망 받은 정도가 아니라,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을 당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한 가지는 다섯 달란트 맡은 자와 두 달란트 맡은 자가 똑같이 칭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마 25:21, 23)”.
주인은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칭찬했다. 이 말은 한 달란트 맡은 자도 한 달란트를 남겼다면, 똑같이 칭찬을 받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주인이 원하는 것은 한 가지다. 주인이 맡겨준 달란트대로 사는 것이다. 나답게 사는 것이다. 주인은 한 달란트 맡은 자에게 다섯 달란트를 요구하지 않는다. 한 달란트 맡은 자에게 한 달란트만 요구하고, 다섯 달란트 맡은 자에게 다섯 달란트를 요구하신다.
우리는 달란트를 비교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 나보다 많은 달란트 가진 자를 부러워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맡겨준 달란트대로 열심히 살면 된다.
역할대로 살라
피타고라스는 인생을 올림픽에 비유했다. “인생은 올림픽이다. 어떤 사람들은 선수로 오고, 어떤 사람은 관객으로 오고, 어떤 사람들은 장사하러 온다.”
올림픽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한다. 금메달을 따기 위해 선수로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 코칭스태프로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 장사하기 위해 참석하는 사람도 있다. 한몫 챙기려고 소매치기도 참석한다.
국가원수가 자국 선수단을 응원하기 위해 참석하기도 하고, 군중들이 운동경기를 보기 위해 참석하기도 한다. 경기를 생생하게 중계하기 위해 방송에 관련된 사람들도 참석한다.
올림픽에 참석하는 사람은 누구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선수로 참석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내 몫은 코치일 수도 있다. 관중일 수도 있고, 방송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어떤 역할인지 알고, 그 역할을 잘 감당하면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고 잘 감당하면 된다. 피타고라스는 사람이 스스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 무엇이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를 때 비극은 시작된다. 내가 어떤 역할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모르면, 불평하고 불만을 갖게 된다. 내가 누군지 모르면서 열심히 하면 할수록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색다르다 & 남다르다
‘색다르다’와 ‘남다르다’는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색다름’은 나만의 색깔에서 나오고, ‘남다름’은 남과 다름에서 나온다.
색달라지려 노력하는 사람은 어제의 나와 비교하고, 남달라지려 노력하는 사람은 남과 비교한다. 색달라지려 노력하는 사람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 되려 한다. 하지만 남달라지려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와 비교해서라도 최고가 되려고 한다.
남들처럼 살지 않고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해야 한다. 진정한 최고는 ‘Best one’ 아니라 ‘Only One’이다.
‘Best one’은 남과 비교해서 이루어지는 최고지만, ‘Only One’은 오로지 자신의 재능을 찾아 유일함을 추구하는 최고이다.
카피라이터 정철 씨는 이런 말을 했다. “남을 이기면 일등이 되고, 나를 이기면 일류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남다르기보다 색다르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개성을 주셨기 때문이다.
나답게 사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진정 나답게 산다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나답게 사는 것은 나를 깊이 파고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했다. 나를 깊이 파고 들여다본다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나답게 사는 것이라고 함석헌 선생은 말했다.
결국 그리스도인에게 나답게 사는 것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또 이렇게 말했다. “생각하고 생각해서 내 뜻이 뭐고 내 뜻을 넘어서 정말 하늘의 뜻이 뭔지 그 하늘의 뜻을 찾아가고 알아가는 것이 참된 기도이고 생각이다. 하늘의 뜻으로 살아야 세상도 잘 되고 나도 잘 되는 거다.”
나답게 당당하게 살라
예수님은 이 땅 가운데 오셔서 가장 나답게 사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답게 사셨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도 당당하셨다. 총독 빌라도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으셨다.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셨다.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우리를 다시 데리러 오실 것이다.
목사가 되기 전에는 목사가 되려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했다. 목사가 되고 나니 목사가 너무나 많았다. 수많은 목사가 있지만, 똑같은 목사가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가 다르다.
예전에는 다른 목사들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적도 많았다. 지금도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재영 목사답게 살려고 많이 노력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삶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쓰임 받은 믿음의 선배를 보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쓰시지 않으셨다. 그들에게 맞게끔 그들을 사용하셨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여러분도 여러분답게 살길 바란다. 누구 흉내만 내고 비교하면서 살지 마라. 다른 사람 부러워하며 열등감을 가지고 살지 말라.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대로 나답게 살라. 맡겨주신 달란트대로 살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는 분이시다. 인간의 기준으로 실패작인 것처럼 판단해서 그렇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 가운데 실패작은 없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나를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드셨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당당할 수 있다. 주눅들지 않을 수 있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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