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은보 옥한흠 목사 10주기에 만난 이동원 목사(上)
본지는 ‘제자훈련’을 통한 한국교회 갱신에 앞장섰던 故 은보 옥한흠 목사 소천 10주기를 맞아, 그를 비롯해 하용조·홍정길 목사 등과 함께 ‘복음주의 4인방’으로 불린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를 만나 옥한흠 목사와 한국교회, 그리고 현재 교계 이슈 등에 대해 대담을 나눴다. 해당 대담은 2회에 걸쳐 게재된다. -편집자 주
제자훈련 일깨운 분, 방법론은 다양하고 다른 것
제자훈련, 그리스도 닮아가는 인격과 삶의 문제
후배 목회자들, 하나님 나라 위해 연합·협력해야
-옥한흠 목사님 10주기를 맞았습니다. 소회가 어떠신지요.
“세월이 이렇게 빠른가 싶습니다. 시간이라는 게 빠르게 흐르는지. 아직 옆에 계신 것 같습니다. 안 계시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네요.
요즘 한국 사회도 교회도 어렵다 보니, 목사님 생각이 많이 나고 그리워집니다. 계셨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옥한흠 목사님이라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의 한국교회를 향해 뭐라고 외치셨을 것 같으신지요.
“회개하라고 하셨겠지요. 옥 목사님의 기념비적 설교가 2007년 상암 경기장에서의 평양대부흥 100주년 설교 아닙니까. 그때 설교 원고의 핵심이 회개였으니까, 한국교회가 회개해야 한다고 외치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결산할 때, 마지막이 가까워지면 마음에 얹힌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더 쏟아놓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옥 목사님도 떠나기 5-6년 전부터 회개를 가장 많이 외치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대로 가면 안 되고, 돌이켜야 한다고요. 세속화된 한국교회의 모습, 깨어 있지 못한 모습에 대한 질타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더하셨을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봤다면, 그분은 더욱 절규하듯 외치지 않으셨을까요.
2007년 설교 당시 에피소드가 있는데, 원고를 다 써놓고 제게 팩스로 보내셨어요. 검토해 달라고. 그래서 제가 읽은 뒤 ‘좋습니다. 더 이상 첨부할 게 없습니다’ 했더니 ‘안 봤구나, 자세히 봐라. 다시 봐라’ 하면서 다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원고를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옥 목사님의 부재가 가장 크게 느껴졌던 순간이나 경험이 있다면.
“지금 한국교회가 기둥이 될 만한, 중심이 될 만한 리더십이 부재한 상태 아닙니까. 사사 시대처럼 백가쟁명(百家爭鳴)하듯 각자 많은 소리를 하고 있지만,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중심을 상실한 시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옥한흠 목사님 같은 리더십이 지금 더 그리워지고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제게도 야단을 많이 치셨습니다. 하지만, 그 야단이 하나도 싫지 않았습니다. 정말 동생처럼 꾸짖으셨지요. 깊은 곳에 저를 향한 사랑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싫은 소리도 하고 꾸짖기도 하는 것이지요.
제가 조크(joke·농담)를 많이 하는 편인데, 옥 목사님이 제가 하는 조크를 아주 좋아하기도 하고 아주 싫어하기도 했습니다. 어떨 땐 ‘그런 조크 하다 큰일난다. 함부로 하지 말아라’ 그런 이야기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분은 아주 신중한 분이고 완벽주의자이셨지요. 이제 저를 꾸짖어줄 사람이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그리워질 때가 많습니다.”
-옥 목사님은 ‘경청’을 잘 하시는 편이었나요.
“충고를 잘 받아들이는 편이었습니다. 싫은 소리, 바른 소리를 많이 하시면서도, 본인을 향한 충고에 진지하게 반응하고 마음을 여시는 분이었습니다.
두 가지 생각이 납니다. 하나는 사랑의교회에서 일산에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했습니다. 친한 분들이 ‘근처 다른 교회들이 굉장히 민감하게 느낄 텐데, 별로 좋은 계획 같지 않다’고 했습니다. 저와 홍정길 목사님이 주로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씀드릴 때는 아무 소리 안 하고 가만히 계셨는데, 그 다음 주일에 개척을 그만두겠다고 하셨습니다. 계획을 다 세우고 모든 준비를 다 한 상황이었는데 엎어버렸습니다. 그만큼 다른 의견을 잘 듣고 수용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옥 목사님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지나가는 소리로 ‘한국 와서 보니 가장 늦게 은퇴하는 직업이 대학 교수(65세)이고, 나머지는 다 60세 되면 끝나는데 우리만 70까지 하면 너무 욕심 많은 목회자상으로 비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내 나이 안 돼 봐서 그렇지’ 하고 뭐라 그러셨어요(웃음). 저보다 6세 많으십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서 전화를 하셨어요. ‘당신 말에 일리가 있다. 나도 65세에 관둬야겠다’고요. 그리고는 진짜 65세 때 은퇴하셨습니다. ‘형님이 65세에 은퇴했으니, 저도 꼼짝없이 65세에 은퇴해야겠다’고 했더니, ‘너는 그러지 말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저도 결국 조기은퇴를 했죠. 그렇게 남 이야기를 상당히 진지하게 들으셨습니다.”
-말씀하셨듯 현재 한국교회에는 한경직 목사님 같은 ‘어른’이 보이지 않고, ‘어른’이 있더라도 그들의 권위에 고개 숙이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같은 분이 역할을 해 주셔도 좋을 텐데요.
“저는 그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옥 목사님 같은 분이 하셔야지요. 저는 ‘그분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합니다. 옥 목사님은 그만큼 특별한 그릇이셨어요. 모든 교파를 막론하고, 그분이 말씀하시면 들을 수 있는 그릇이셨습니다.
사실 옥 목사님은 교회 정치를 멀리하셨지만, 마지막에 한국교회가 너무 답답하고 어려우니 한목협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는 각 교단에서 뜻있는 젊은 목회자 그룹들을 세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래서 ‘침미준’을 세웠지요. 각 교파가 모인 한목협이 가능했던 것도 그분의 영향력이 교단을 넘어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저희는 그저 목회만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고, 소위 정치적 성향의 모임에는 일체 얼굴을 안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옥 목사님이 한목협을 만드셨고, 만들었기 때문에 ‘각 교단에서 바른 소리를 하자, 그래서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생각과 목소리를 모아보자’는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비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각 교단에서 올바른 방향을 잡는 데 일조하는 운동이 만들어졌습니다.”
-옥 목사님 하면 제자훈련이 떠오르는데, 그 사역이 이 시대 교회와 다음 세대에 어떻게 계승되고 있다고 보시나요.
“저는 옥 목사님이 제자훈련에 대한 생각과 의지를 일깨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자 그대로 깨웠던 분입니다. 하지만 제자훈련의 방법론은 굉장히 다양하고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떠나시기 전에 많이 의견을 나눈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셀교회 운동도 일종의 제자훈련이다. 셀교회는 좀더 포스트모던 시대에 맞는 제자훈련’이라고 했습니다.
옥 목사님의 제자훈련이 유일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옥 목사님을 통해 제자훈련에 대한 목회자들의 생각이 일깨워졌고, 평신도들도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옥 목사님께서 제자훈련을 통해 한국교회에 가장 크게 기여하신 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각자 시대에 맞는 좀더 다양한 제자훈련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자훈련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첫째는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이 되는, ‘Being’에 있습니다. 작은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Doing’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삶의 한복판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임팩트, 영향력을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제자훈련의 핵심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소개해 주신다면.
“저는 옥 목사님을 ‘고결한 완벽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오해하지 말 것은, 완벽주의자라고 해서 완벽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분도 나름의 약점이 있었습니다. 완벽주의자의 삶을 지향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분이셨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킬 줄 알았고, 상당히 자기 자신 앞에 정직하고 투명했습니다.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꺼리지 않았습니다.
매달 만나던 때도 있었습니다. 함께 점심을 먹고 대화를 나눴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일종의 우리를 향한 제자훈련이기도 했습니다(웃음).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있었고 이런 게 기도제목인데, 당신들은 어떠냐’고 먼저 물어보셨습니다. 일종의 나눔이었지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어떤 성경공부 제자훈련 팀의 여자 집사가 자꾸 눈에 밟히고 생각날 때가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당신들은 그런 생각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고 물으셨지요. 남자로서 자신에 대한 욕망, 관리, 이런 부분까지 오픈해서 이야기할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복음주의 4인방으로 불리시던 목사님들이 모두 은퇴하셨습니다. 주목하고 계신 후배 목회자들이 있으신지요.
“훌륭한 분들은 여기저기 있습니다.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그분들이 함께 연합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교제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저희가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옥 목사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우리 만나자, 모이자’ 하면 열 일 제쳐두고 모였습니다.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고, 리더이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역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시면 같이 했습니다. 누가 시작하든 같이 도왔습니다. 그렇게 이뤄진 것이 해외 유학생들을 위한 코스타(KOSTA) 운동부터 미션 코리아, 학복협, 한목협 등 여러 운동들을 함께 했습니다.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누가 시작했든 하나되어 같이 도왔습니다. OM선교회도 돕자고 하셔서 함께 도왔습니다.
그런데 후배들 중에는 탁월하고 뛰어난 개인들이 많지만, 형제애로 묶여 함께 일하고 돕는 부분들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성향과 케미가 있고 혼자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걸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연합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만나기 싫어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고 세계 선교를 위한 일이라면, 협력할 것은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교파와 생각이 다르지만 함께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옥 목사님은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물론 총신 계통 합동측이었기 때문에 개혁주의에 대해서도 열정이 있었지만, 개혁주의를 뛰어넘어 포괄하는, 더 큰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나름의 신념이 있었습니다.
저는 복음주의란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야 한다고 보는데, 옥 목사님이 거기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옥 목사님은 생의 마지막에 순복음의 조용기 목사님과도 교류하셨고, 기장의 강원용 목사님을 학복협 강사로 모시기도 했습니다.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었지요. 사회복음주의부터, 오순절 계통까지 다 끌어안고 경청하셨고 같이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학복협 안에 기장도, 순복음도, 침례교도 다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게 옥 목사님의 영혼의 크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보수주의, 개혁주의자들은 너무 개혁주의를 강조하다 보니, 그리스도 안에서 거의 동일한 신앙고백을 가진 형제들을 끌어안지 못하고 파편화되고 파벌화되는 경향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옥 목사님이 더 그리워집니다. 옥 목사님 이후 그런 일들이 잘 안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