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박사 기독문학세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 주님, 우리는 내일 전투에 나갑니다. 주님, 양손에 총과 성경을 들고 싸우게 해 주십시오. 만약 적의 손에 죽게 된다면 그 곳이 바다이든 땅이든 주님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두렵지 않습니다. …”
“… 주님, 저희는 감사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당신의 은총과 축복에 감사합니다. 저는 도망쳤지만, 제 가족과 친척은 아직 노예 신분입니다. 오늘 밤 당신의 축복이 필요합니다. 내일 저희가 죽게 된다면 가족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모든 압제와 싸우다 죽었다는 것을,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 이어서 절제된 세 마디의 언어, 나의 주님, 영광, 찬양 받으소서.”
그렇다. 1989년에 개봉된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영화 ‘Glory’이다. (우리말 제목은 <영광의 깃발>이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최초의 흑인 연대인 매사추세츠 54연대의 전투 이야기이다.
백인인 로버트 굴드 쇼는 최초로 흑인들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이 된다. 그 당시는 군복을 입은 흑인 포로와 지휘관은 사살한다는 남부 연합의 포고령이 내려진 상황이다.
의회의 승인도 얻지 못한 채 만들어진 흑인 지원병 부대는 무지와 인종차별의 장벽을 헤치고 마침내 난공불락의 요새 포트 와그너(Pt. Wagner)에 이른다. 그들 예배는 전투 전날 밤의 일이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병사들의 외침은 목숨을 구해 달라거나 승리, 명예를 구하는 기도가 아니었다. 그 이상의 어떤 것을 그 들은 열렬히 갈망하였다. 그 갈망의 열정은 너무나 뜨거워서 모두를 태우고, 나까지 불타게 하였다. 그 순간 가슴은 멍하고 통증이 느껴졌다. 눈물이 났다.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물론, 덮쳤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기란 지금도 쉽지 않다.
단지 그 예배는 강보다 깊은 살아가는 에너지로 가득찼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찬양은 산보다 높은 갈망으로 폭발 하고, 가슴들은 끊임없이 뛰고 있었다. 내 가슴도 빠른 속도로 뛰었다.
음속을 단위로, 우리는 드럼처럼 리듬을 두드렸다. 아무도 멈출 수 없었다. 오직 감사가 있을 뿐, “하나님의 영광”만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그 너울 치던 바다를 누가 멈추어 서게 할 수 있을까.
그 밤의 예배를 마지막으로 영화 ‘Glory’의 흑인 부대 병사들 대부분은 포트 와그너에서 목숨을 잃는다. 이상 하게도 나는 그들의 죽음 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는 듯 하였다. 그토록 갈망하던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십자가의 산물이라고, 병사들은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내가 깨달은 것은 뭐랄까…, 영광은 내가 만들어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고난을 수반하고 자기 희생이 전제되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기에, 오직 십자가의 산물이다.
내가 감사함으로 그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이 창출해 내는 결과물, 그것이 영광이다. 예배는 감사를 담는 또 하나의 그릇이고 형식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예배는 기독교의 예배일 수 없다는 생각… 이었다.
그로부터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영화 ‘Glory’의 추억은 마치 암묵적 기억(implicit memory)처럼,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다. 예배를 숙고하게 만들어 마음과 태도를 가다듬어주고 있다.
예배의 몸짓이-과정이나 방식이나 때론 방향이 다르다 할지라도, 결국 예배의 속살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놀라운 전율로 늘 새롭게 발견되는 ‘하나님자신’이시다.
예배할 때 나의 지성과 감성이 활짝 열려 이처럼 관능적인 감응을 보일 때, 참으로 행복하다. 어쩌면 나는 예배를 통해서 밀턴이 말한 에덴 동산의 ‘가이 없는 행복(Enormous Bliss)’을 탐하는지도 모른다.
성경은 이것들을 일러 ‘영원을 사모라는 마음’이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영원을 사모하는 내 속살을 담아내는 그릇과 같다. 내가 하나님과 맛물릴 때 튀는 섬광, 이것이 나의 예배이다.
송영옥 박사(영문학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