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얼마나 ‘쫄깃쫄깃’한지, 문학 통해 맛보세요”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 펴낸 이정일 목사

성경 읽기의 문제점, 결말을 다 알고 있다는 것
결말 상정하고 가늠하고 연습하는 시간 필요해
문학이라는 도구 사용해 성경 이야기하고 싶어
문학 소재로 비기독교인들과 자연스러운 소통

▲푸른 가을날, 이정일 목사가 좋아한다는 괴테 동상 앞에 섰다. 그는 책에서 &ldquo;우리는 흔히 과거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지만, 미래는 맡기지 못하고 자신이 결정할 때가 많다.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rdquo;이라며 &ldquo;오직 자신의 미래를 주님께 맡기는 사람만이 &lsquo;믿음의 창&rsquo;을 던질 수 있다&rdquo;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푸른 가을날, 이정일 목사가 좋아한다는 괴테 동상 앞에 섰다. 그는 책에서 “우리는 흔히 과거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지만, 미래는 맡기지 못하고 자신이 결정할 때가 많다.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오직 자신의 미래를 주님께 맡기는 사람만이 ‘믿음의 창’을 던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 밑줄을 긋는 일이 아니다. 생활에 밑줄을 긋는 것이다. 생활에 밑줄을 그으려면 자기의 민낯을 읽어야 하고,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한국교회엔 문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고결한 생각의 씨앗을 심고 키울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생각을 삶으로 드러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는 “문학을 알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된다”고 말한다. “문학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성경을, 자신을 보는 눈을 문학으로 더 크게 뜨고 열 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저자의 첫 저서인 이 책에는 밑줄 그을 글들이 빼곡하다. 책에서 소개하거나 인용하는 작품 목록만으로도 배부를 것이다.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처럼, 다양한 소재로 무용(無用)해 보이는 문학의 효용(效用)을 이야기한다.

코로나 사태로 많은 성도가 교회를 빠져나갔고 다시 회복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퍼지는 이 때, 왜 문학을 읽어야 하는지 저자 이정일 목사에게 자세히 들어봤다.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
이정일 | 예책 | 396쪽 | 20,000원

-책을 쓰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오랜 고민의 결과물 같은 느낌입니다.

“우연히 도서관에 갔다가 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1년에 문구점이 1,200개씩 사라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주인의 하소연이 38년 된 병자나 사마리아 여인의 말처럼 들렸습니다. 이 땅에서도 성경 속 사건들이 이렇게 일어나는데,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수없이 듣지만, 정작 우리에게 이웃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져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문 닫는 가게들, 주인이 계속 바뀌는 가게들이 보였습니다.

한 번은 아내가 떡볶이를 주기적으로 많이 사오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거기가 너무 장사가 안 돼서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한 번씩 방문해서 주인과 이야기도 하고, 기도도 해주고, 용기를 갖고 살 수 있도록 격려한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저 자신에게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맞는지. 다른 사람에게도 함께 설명하고 싶었고, 그때부터 글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학술 논문을 썼습니다. 성경 이야기가 하나의 교훈으로 끝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깊고 학문적으로도 중요한 이슈가 있는지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학문하는 사람이니, 막연히 ‘착하게 살자, 열심히 살자, 기도하자’ 이렇게 설명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삶의 모습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점검하고 심도있게 고찰한 다음, 성경과 연결지은 깊은 사고를 설명해 주고 싶었습니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사는 것보다, 조금 고되더라도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시는 맛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담고 있는지, 그것이 우리 내면 속에 제대로 이해됐을 때 얼마나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좋은 기회가 되는지…, 그런 눈을 많은 사람들에게 열어주고 싶었습니다. 학술논문처럼 강도 높고 깊이 있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맛은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문구점 뉴스 하나를 통해서도, 성경이 우리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구 중 하나가 바로 ‘문학’입니다. 성경은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문학도 수만 명 중 한 사람의 삶을 선택해서 이야기를 펼쳐갑니다. 그 한 사람을 이해하면서, 수만 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중 속에 있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지만, 그 속에 있는 한 사람이 나와 관련돼 있으면 돕게 됩니다. 그 한 사람이 다른 누가 아닌 나 자신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데, 문학에서는 그것을 개연성이라고 합니다.

문학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모두의 죽음이고 나의 죽음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우화와 예화를 통해 우리를 가르치셨는데, 다 문학 아닙니까? 그것을 읽는 방법을 확장시켜 주고 싶었습니다. 현실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성경 이야기가 재현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문학 이야기를 하다 신앙과 성경 이야기가 그야말로 훅 들어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둘은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둘을 분리하는데, 그게 어떻게 분리가 될까요? 그래서 일부러 논문 제목에도 썼습니다. ‘춤과 춤추는 이를 구별할 수 있는가?’ 이 둘은 엄밀하게는 구분이 안 됩니다.

우리 신앙도 일상과 분리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중세는 그 둘을 분리시킨 시대였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한국도 중세 시대처럼 둘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열심히 외치지만, 우리 안에는 그 당시 타락한 현실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현실을 짚어주고 싶었습니다. 쓰면서도 저 자신의 모습인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쓴 만큼 신실하지 못하다’고 쓴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다양한 관점에서 문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셨는데, 덜 좋게 말하자면 체계적이진 않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책을 쓸 때 처음부터 끝가지 외길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요즘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기 때문에 어디를 펴도 알 수 있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도, 아무데나 펴서 한 장이라도 읽어 신앙적 자극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눈도 가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처음에는 관통하는 맥이 있었는데, 너무 무거워져서 덜어냈습니다.”

-책 제목처럼, 문학이 정말 신앙을 더 깊게 만들 수 있나요.

“제가 깊어졌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스무 살 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많이 다릅니다.

그때 기형도 시인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신춘문예에 당선됐던 시를 우연히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1980년대는 평론가들의 시대여서 기형도 시인을 알게 됐고, 사후에 나온 시집 속 ‘우리 동네 목사님’ 한 구절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라.’

이 구절을 읽으면서, 성경의 많은 메시지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생각하게 됐습니다. 성경에서도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했습니다.

교회는 어느 순간 메시지를 전하는 걸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중요시하고, 메시지를 전부 검증합니다. 제품이 나오면 인터넷에 후기가 수없이 달립니다. 사람들은 후기들로 그 제품을 평가합니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어떻습니까? 형편 없습니다. 문학이라는 매체를 통해, 품위 있고 세상 속에서 당당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진짜 메시지를 가진 유일한 존재인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한국의 정치 현실도 그렇지만, 좌파든 우파든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이 문자 메시지에 목을 맨다는 것입니다. 근본주의 신앙의 오류이기도 합니다. 문학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문장의 진정한 의미는 문자가 아니라, 문맥이 결정한다.’ 우리는 그 문맥을 읽는 힘이 너무 약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엄하게 꾸짖으신 것도, 문자에 매여 문맥을 몰랐기 때문 아닙니까? 그 문맥을 계속 알려주고자 하셨는데, 우리는 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을까요. ‘안식일의 주인이 나’라고 하신 것이 바로 문맥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각종 조건과 상황으로 시야가 너무 좁아져 있습니다. 문학을 하나의 예로 이것을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성경 속 사건이 우리 삶에서 이런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문학에서는 이것을 개연성으로 설명하는데, 그 모습이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문학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지 않나요.

“‘구원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지요. 문학이 하는 일은, 항상 주님이 어디 계신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도스토옙스키가 ‘(양)파 한 뿌리 이야기’에서 너무 잘 설명합니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다 못 읽더라도, 이 ‘파 한 뿌리’ 이야기만은 읽어보세요.

문학이 대단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보는 눈을 끝없이 열어준다는 것입니다. 자꾸 자기를 속이려 할 때마다, 문학은 ‘양심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문학이 말씀처럼 질문을 던지고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그야말로 ‘대리만족’에 그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끝나는 건 문학을 하나의 스펙이나 교양으로 읽을 때입니다. ‘나 이 정도 책 읽었어’. 이렇게 읽으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러면 시간낭비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매년 시상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을 읽어보시나요? 또 프랑스 공쿠르 문학상과 영국 맨부커상 등 세계 3대 문학상, 우리나라의 문학상 수상작들을 1-2권이라도 읽는다면, 우리가 어떤 사회를 살고 있는지에 무심해질 수가 없습니다.

너무 유명한 소설 ‘난쏘공(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나면,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그것을 읽고 나면, 성경 속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 안에 얼마나 뿌리 깊게 내려와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학을 그렇게 잘못 읽을 수 없습니다.

어떤 문학서적을 읽느냐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은행에서 위조지폐 감별법을 설명할 때는, 항상 진짜 돈에 대해서만 설명한다고 합니다. 그것만 터득하면, 가짜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문학작품, 좋은 문학작품들을 읽는 것이 답입니다.

세계문학전집 속 몇 작품만 읽어봐도, 형편없다고 느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 작품들을 읽을 여유가 없기 때문에, ‘쓰레기 같은 작품들’을 읽는 것 아닐까요? 진짜가 있는데, 왜 가짜에 목숨을 걸겠습니까.

같은 노래를 불러도 가수들마다 차이가 있지 않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임영웅 씨가 부르면 뭔가 다르지 않습니까. 좋은 문학을 읽는 법을 터득하면, 신앙도 잘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학을 입시용으로 읽고, 요약본으로 읽습니다. 누가 썼고 주제가 뭐고…, 제목은 알지만, 감동은 없습니다. 성경도 개론서를 읽거나 몇 번 읽었나 세면서 통독 중심으로 읽으면, 우리 삶 속에 와서 부딪치는 경험이 적습니다. 문학을 읽으면 그런 경험들이 왜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문학을 ‘몇 번 통독했다’는 걸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나요?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책에 등장하는 고전이나 위대한 작품들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SF 작품이나 허무맹랑한 이야기, 나아가 무협지나 만화, 반기독교적 소설까지도 괜찮은가요.

“각자 내공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제 책에서도 SF 소설 한 권을 인용했습니다. 가상현실이지만 실현될 가능성이 높고, 부분적으로 실현된 이야기입니다. 허무맹랑하지만, 그 이야기가 가진 인간의 본질에 대한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부분들을 흘려보낼 수 있지만 본질은 다릅니다.

드라마 <도깨비>를 봅시다. 허무맹랑하거나 비기독교적 요소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간 중간에 신앙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내용들도 나옵니다. 걸러서 들으면 됩니다.

물론 비기독교적 요소를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다 포용할 순 없습니다. 그런데 문학은 ‘인간다움’을 말합니다. 인간다움을 잃으면, 성경 속 많은 메시지도 기계적으로 적용하게 됩니다. ‘안식일에 왜 병자를 고치는가’ 하고요.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부드러운 사고가 필요합니다.

뉴욕 브루클린에 빌 윌슨이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주일학교가 있는데, 토요일에 모입니다. 한국이었다면, 주일에 안 모인다고 비난받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곳은 토요일 말고는 모일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책에도 썼지만, 더 중요한 건 왜 그 일을 하게 됐는가에 있습니다.

문학이 대단한 건 아니지만, 미처 생활에 치여서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줍니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설레는 이야기입니다. 생각에 자극을 받고 따라가게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도 의무적으로 읽지 않습니까? ‘성경 1독이 목표’라고 하는데,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데 의무적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설레임 아닙니까. ‘오늘부터 두 시간 동안 사랑해야지’, 이게 가능할까요? 주님을 사랑하는 설레임이 있어야 할텐데, 우리는 너무 의무적으로 뭐든 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곧바로 일어서서 나가버리듯 말입니다.”

-정답은 없겠지만, 마치 기도가 어려운 것처럼, 문학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결말을 보기 위해 끝까지 읽는 경우가 많지요.

“결말을 보는 것과 함께, 결말 어떻게 될까 예측하면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세계문학 수업 중 짧은 4부가 더 있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교재로 썼을 때, 학생들에게 3부쯤에서 ‘더 읽지 말고 결말을 추론해 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한 번의 경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성경 읽기의 문제는, 우리가 결말을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부분을 긴장감 있게 읽어야 하는데, 끝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고, 모세가 지도자가 되지 않겠다고 갈팡질팡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뒷이야기, 결말을 모르고 그 상황에 처했다면 어땠을지 상정하고 가늠하고 연습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을 봅시다. 나이는 들어가고 아이를 가질 수도 없는데, 하나님은 계속 약속하시지만 현실은 변한 게 없을 때, 신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까요? 문학은 그런 연습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걸 몇 번 경험하면 불이 확 켜집니다. 그 어려운 길을 이 분들은 왜 이렇게 걸어갔을까, 왜 자주 갈팡질팡했을까 등을 경험하면, 우리 신앙에도 다시 불이 붙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라면, 드라마나 영화로도 그런 경험이 가능할까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요즘 유튜브도 많이 봅니다. 지금은 한 사람의 개인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개인’이 발견된 것이 근대입니다. 자아가 생기고 발전했습니다. 칸트가 이를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지금은 철학적 자아에서, 사회적 자아로 바뀌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러 논란이 있지만) ‘가짜 사나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틀만에 조회수가 1천만이었습니다. 방송국도 못하는 일 아닙니까. 별 배경도 없던 몇몇 사람들이 해낸 것입니다.

저는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성경만 갖고는 어렵습니다. 성경이 못한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지금 교회를 불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로는 가능합니다.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도, 사실은 성경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문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성경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문학을 읽다 보면, 그들이 성경도 읽을 삶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요?”

▲이정일 목사는 책에서 &ldquo;하나님은 사소한 것은 즉답하시는데 반해, 정작 중요한 일에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rdquo;며 &ldquo;하지만 이러한 불면의 밤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성숙해지고 깊어지는 것&rdquo;이라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이정일 목사는 책에서 “하나님은 사소한 것은 즉답하시는데 반해, 정작 중요한 일에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며 “하지만 이러한 불면의 밤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성숙해지고 깊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요즘 성경 속 인문학, 인문학적 성경 읽기 등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이와 관련이 있나요.

“성경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문학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으면 ‘쫄깃쫄깃한지’ 샘플로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인문학이라는 것은 좀 막연합니다. 인문학은 ‘각주’를 붙일 수 있어야 합니다. 각주를 붙일 수 없다면, 좀 아쉽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되는 서구권 인문학 신학 서적에는 각주가 빼곡합니다. 내가 하는 말에 어떤 근거가 있는지,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각주가 없으면 무시할 수 있습니다. 각주는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을 검증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훈련돼 있지 않다 보니, 우리가 공개 석상에서 실수를 많이 합니다. 시대가 바뀌어, 이제 사람들이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회도 바꿀 수 있는 시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문학은 그 시대가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게 하고, 철학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를 바라보고 미래로 나아가게 합니다. 반면 문학은 현재를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것이 인문학, 문사철(文史哲) 아닙니까.

각주처럼 근거를 갖고 이야기한다면, 교회를 불신하는 사람들도 확 밀어내기 힘들어집니다. 제 책은 비신앙인들을 위해서도 썼기 때문에, 각주를 붙였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에 문학이 필요하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국교회에서는 문학을 접할 기회가 적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은 성경만 읽으라고 하시고, 신앙 서적 읽기만 해도 바쁩니다.

그러다 보면, 사회 생활에서 안 믿는 사람들과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앙 서적을 전혀 모르고 성경도 안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소통 대신 논쟁을 하게 됩니다. 논쟁을 하면, 전도가 안 됩니다.

하지만 문학을 이야기하면 그들과 대화가 잘 됩니다. 그 중간 중간 우리 생각을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이 전도할 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학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신앙 이야기를 꺼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테에 대해 설명하다 보면, 신앙 이야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이런 이야기는 마음 문을 열고 듣습니다. 기독교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우리는 너무 경직돼 있고 일방적입니다. 선포보다는 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신앙을 권유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믿으라고 하다 보면 그들이 교회와 담을 쌓아버릴 수 있습니다.”

-책 읽기를 시작하려는 분들이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요.

“감동이 있는 책을 읽으면 좋겠습니다. 한복만 입다가 양복를 입으면 불편하지 않습니까?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고요. 일단 편안한 옷을 입어야 하는데, 재미있고 감동적인 책부터 읽는 것이 좋습니다.

가려낼 수 있는 법은, 서평을 후기처럼 미리 보고 읽는 것입니다. 소개 글 몇 줄만 봐도, 읽을 책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내 마음을 흔드는 한 문장’이 있으면 읽으라고 권하는 편입니다. 그런 문장이 없으면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글을 쓸 때 항상 목표로 삼는 것이 ‘어려운 것은 보다 쉽게, 쉬운 것은 보다 깊게, 깊은 것은 보다 재미있게’입니다. 문학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문학이 필요합니다. 깊은 내용인데,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야기로 설명해내는 것이 문학입니다.

-비전이 있으시다면.

“사회로 들어가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 부드럽고 깊이 있는 사유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 하면 ‘앞뒤 꽉 막혀서 시대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말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기독교인 하면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인생이 힘든 것은 정답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정답대로 사는 것이 힘들기 때문 아닌가요? 정답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세우는 것이 비전입니다. 그런 하나의 샘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가 틀린 게 아니지만, 다양한 경험도 필요합니다.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새로운 변화를 위협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어떤 것이 위협으로 느껴진다면, 삶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믿음으로 나아가겠다고 이야기하지만, 대다수는 익숙한 일들만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게 싫습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들은 불확실성 속에 자기를 던진 것 아닌가요?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기도하지만, 익숙한 것들만 붙들고 살아갑니다.”

저자 이정일 목사는

미국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석사를 받았다. 신학을 하기 전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후 뉴욕주립대 영문과에서 미국 현대시를, 세계문학연구소에서 제3세계 작가들을 연구하였다. 대학에서 세계문학과 영어를 가르치며, 전방의 포병대대 교회에서 군(軍) 선교사로 섬기고 있다.

평생 문학을 공부했고 박사 후 신학을 공부했지만, 스스로 문학과 인생 속에 파묻힌 하나님의 이야기를 캐내는 광부라고 생각한다. 왜 신앙이 좋아질수록 삶이 바빠지는지, 왜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생각이 좁아지는지, 왜 성숙이 아니라 성공을 목표로 하는지, 말씀을 캐며 물었다.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지만 ‘구원 이후의 삶’을 제대로 살려면 자신만의 관점이 있어야 하며, 믿음은 다르게 살 수 있는 용기지만 이것도 배워야 한다는 걸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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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웰비 대주교

英성공회 수장, 교단 내 ‘아동 학대 은폐’ 논란 속 사임 발표

영국성공회와 세계성공회 수장인 저스틴 웰비(Justin Welby) 캔터베리대주교가 아동 학대를 은폐했다는 스캔들 속에 사임을 발표했다.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에 따르면, 웰비 대주교는 12일(이하 현지시각) 영국성공회 웹사이트에 게재한 성명에서 “찰스 3세의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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