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설교연구원 설교] 침묵은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본문: 사도행전 7장 30-38절
보이는 결과가 다가 아니다
우리는 성과지향주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곧 보이는 결과를 요구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에 결과가 보이지 않으면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은 여깁니다.
하지만 일을 해서 그 결과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단시간엔 절대로 교육의 성과를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교육이란 하루아침에 성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곧 당장에 그 효과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장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상을 상상할 때가 많습니다. 병이 고쳐지거나 문제를 해결받거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릴 때, 하나님께 일하셨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실 때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일을 안 하고 계신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십니다.
아인슈타인의 인생의 성공법칙
아인슈타인은 인생의 성공법칙을 A=X+Y+Z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A는 인생의 성공을 의미하고, X는 일을 의미하며, Y는 노는 것을 의미입니다. 그러면 Z는 무엇일까요? 침묵입니다.
성공하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 일도 열심히 하고 노는 것도 잘 놀아야 하지만,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침묵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침묵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말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고 합니다.
침묵은 가장 강력한 언어다
어떤 부인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더는 남편과 살지 못하겠어요. 그 사람은 너무 신경질적이고 잔소리가 심해요.” 의사는 한참 고민하다가 처방을 내렸습니다.
“우리 병원 옆에 신비한 샘이 있습니다. 샘물을 한 통 길어서 집으로 가져가세요. 남편이 귀가하면 샘물을 한 모금 머금으세요. 그런데 머금기만 해야지, 절대 삼키면 안 됩니다. 처방대로 하시면 금방 효과가 있을 겁니다.”
부인은 처방대로 샘물을 길어 돌아갔습니다. 그 날도 밤늦게 귀가한 남편은 평소처럼 짜증과 잔소리를 아내에게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부인도 맞받아쳐 싸웠을테지만, 그 날은 처방대로 신비한 물을 입에 머금었습니다. 물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을 꼭 다물었습니다.
얼마 시간이 지나자 남편은 잠잠해졌습니다. 그 날 하루가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 날부터 남편이 잔소리를 시작하면 부인은 어김없이 신비의 샘물을 입에 머금었습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남편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신경질 내는 것이 줄었고, 아내를 함부로 대하던 행동도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신비한 효과에 깜짝 놀란 아내가 의사를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신비한 샘물이 너무 좋더군요. 우리 남편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의사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분이 변한 것은 물이 아니라 당신의 침묵 덕분입니다.”
신비한 샘물은 그냥 물이었습니다. 물을 입에 머금고 있으니, 말을 할 수도 없고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이 신경질 내고 화를 낼 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남편을 서서히 변화시켰습니다.
막스 피카라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침묵이란 단순히 말의 포기, 그 이상의 것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침묵이란 결코 수동적인 표현 방식이 아니라, 어쩌면 가장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의 방식일 수 있습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가장 ‘강력하게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숙성시키는 시간이다
모세의 생애는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이집트 왕자로써 40년 동안 살았던 삶입니다. 두 번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을 치면서 양치기로 보냈던 40년 동안의 삶입니다. 세 번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써 하나님께서 쓰임 받았던 40년 동안의 삶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쓰임 받는 시간보다 준비하는 시간이 배나 더 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40년 동안 사용하시기 위해, 80년이라는 시간을 숙성시키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가 80세가 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내용이 하나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3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 그에게 보이거늘(행 7:30)”.
‘사십 년이 차매’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40년 동안 기다리셨다는 말씀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만 40년을 기다리신 것이니, 왕궁 생활 40년까지 하면 80년을 기다리셨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왕자의 자리에서 도망쳐 나와 하나님께 아마 수없이 물었을 것입니다. ‘왜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때 자신을 사용하지 않느냐’고 소리치기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집트의 왕자인데 양치기로 살아야 하느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어떤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 모세는 점점 모난 부분들이 다듬어져 갔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모세가 다 숙성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드디어 모세를 떨기나무 가운데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해 80년이라는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하셨기에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숙성된 사람이 좋은 맛을 낸다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온 세계가 힘들어하고 있지만, 2003년도 사스(SARS)가 중국에서 발생해 아시아 전역으로 퍼졌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사스는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엄청난 공포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감염이 되고 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만 감염자가 거의 없고 감염자들조차 모두 회복해 사망자가 없었습니다. 해외 언론들은 이것을 보고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한국인들이 김치를 먹어 사스에 감염되지 않았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로 겨울을 나기 위한 우리 식품인 김치가 세계적 건강식품이 되었습니다. 서울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세계김치연구소가 주최하는 ‘김치학(Kimchiology)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김치가 제 맛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숙성이 잘 돼야 합니다. 잘 숙성이 되지 않은 김치는 맛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겨울 잘 이겨내며 잘 숙성된 김치는 얼마나 맛이 있는지 모릅니다.
숙성이 잘 되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숙성된 사람이 좋은 맛이 납니다. 숙성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리더는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아프리카에 건기가 오면 수만 마리의 물소 떼가 목숨을 걸고 물을 찾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한다고 합니다. 이 먼 거리를 많은 물소 떼가 이동하려면 리더하는 소가 필요합니다.
많은 소들을 리더해 가는 소는 과연 어떤 소일 까요? 가장 힘센 소일까요? 아니면 가장 빠른 소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을 리더하는 소는 물이 있는 방향을 정확하게 아는 소입니다.
물이 있는 방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곳까지 가장 빠른 경로를 찾는 능력을 가진 소가 팀의 리더가 됩니다. 이 소는 먼 거리에서도 물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후각이 이 발달된 소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리더의 결정적 필수 요건은 침묵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수천 킬로미터를 갈증을 참고 걸어온 소떼가 불과 몇 킬로 앞에서 물을 감지하면 본능적으로 뒤에 있는 소들에게 사인을 보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진맥진한 소떼는 일순간 흥분해 조금이라도 먼저 먹으려는 충동으로 질서가 깨지고 페이스가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가 넘어지면 그 뒤를 따르는 소들이 계속 넘어져 살아남는 소는 절반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소떼의 리더는 물 냄새를 잘 맡고 빠른 길로 안내하며, 잘 달릴 뿐만 아니라 물 냄새를 맡고도 본능적으로 보내는 신호를 억제할 수 있는 소여야 합니다. 리더의 침묵이 수많은 생명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무관심이 아니다
침묵이 중요하지만, 침묵하는 것이 쉬울까요? 쉽지 않습니다. 말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우리가 침묵하는 것이 힘들다면 하나님도 힘드십니다.
우리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힘듦은 생각하지 않고,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따질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평소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이해되지는 상황들과 사건 앞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많이 힘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방관자가 되어 우리를 관망하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시 83:1)”. 시편 기자는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판을 치고 주님을 믿는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하는데 가만히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싶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어가는 시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침묵을 통해 더 많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순교의 피가 필요하셨기에 침묵하신다
일본 대표적 현대 소설가인 엔도 슈사쿠가 쓴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17세기 일본의 천주교 박해 상황을 배경을 쓴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중심 내용은 이렇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침묵하고 계시느냐?’ 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우리는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해 보신 적이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껏 주님 앞에 와서 예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볼 수는 있지만 그것을 피부로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 때문에 박해 당했던 때에는 “도대체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죽어져 가는데 왜 침묵하고 계시는 가?”라는 의문을 그리스도인들이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해답을 찾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배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침묵>이라는 소설에서도 결국 주인공인 신부가 예수님의 성화를 발로 밟고 배교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고통당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보면서 구경꾼으로 아무런 말씀 없이 구경만 하고 계신분이셨습니까? 아닙니다. 복음의 생명력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순교가 피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것을 눈으로 확인한 세대들입니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복을 받고 한국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선배들의 순교의 피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순교의 피가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침묵하셨습니다.
침묵보다 아름다운 언어는 없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현명한 대답일 때가 있습니다. 때론 침묵이 더 많은 말을 우리에게 건넬 때가 있습니다.
길거리에 가면 가장 많이 만나는 것이 안내표지판과 신호등입니다. 이것들은 말이 없습니다. 항상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우리에게 정확하게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빨간불은 “건너가지 마시오”라고 말을 해줍니다. 녹색불은 “이제 건너가라”고 말을 해줍니다.
안내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 방향을 안내하는 안내판은 침묵으로 서울이란 글자와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우리에게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쪽 방향으로 가면 서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침묵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여전히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 보니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침묵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아니거든 말을 하지 말라.” 이 말은 침묵보다 더 아름답고 깊은 언어가 없다는 말입니다.
가끔씩 산행을 하다 보면, 주위에 있는 있는 햇빛도 산도 바람도 제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습니다. 아무 말도 안하고 자연 만물이 침묵만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침묵 속에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강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숙성된 사람을 높이신다
3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행 7:37)”.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나와 같은 선지자라고 표현을 하고 계십니다. 곧 이 말씀은 모세는 하나님처럼 백성들을 이끄는 선지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보다 사람을 더 높이는 칭찬을 하실 수 있을까요? 어떻게 감히 피조물이 창조주와 같다는 칭찬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냥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 한 마디만 들어도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데, ‘나와 같은 선지자’라는 칭찬을 받는 다면 그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를 이렇게 같이 칭찬하시면서 세워주시는 것일까요? 모세는 80년이라는 숙성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같은 지도자 모세를 만드시기 위해 80년을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우리 인간에게는 너무 힘든 시간일 수 있습니다. 벽을 향해 기도하는 것 같을 때, 기도의 소리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때 참으로 힘든 시간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침묵 속에서 조용히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가장 힘든 이 시간에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지만,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소리 없이, 그러나 가장 강력하게 응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포기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기다림입니다.
침묵 속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비겁하게 도망치다가 로뎀 나무 아래서 “나를 죽여 달라”고 소리치다가 지쳐 쓰러진 엘리야를 향해 침묵하셨습니다.
그 순간은 하나님께서 어쩌면 그를 향하여 가장 많은 책망과 훈계의 말을 쏟아 놓아야 할 순간이었습니다.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엘리야의 본성이 그야말로 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순간, 그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그냥 보아 넘기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단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엘리야를 조용히 어루만지시며 음식을 먹이실 뿐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강력한 위로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들려준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나는 너의 고통과 연약함을 깊이 이해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또한 “너를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흐르는 핏방울이 되도록 주님은 이 잔을 내게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에 침묵하셨습니다. 그 침묵은 십자가를 지라는 의미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는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때도 하나님은 침묵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셨기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은혜가 메마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은혜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인내하고 견뎌야 한다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침묵의 의미를 알았다면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이 지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견뎌내야 합니다.
모세는 왕자였지만 하루아침에 양치기가 되었습니다. 왕자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 양치기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도 처가살이를 하면서 말입니다. 모세는 그 시간을 견디어 냈습니다. 견뎠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침묵을 깨시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 믿음을 가장 혹독하게 시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침묵의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부서뜨릴 것처럼 위협함으로 우리 믿음을 오히려 세워주십니다.
하나님과 전에 없던 막막함과 메마름이 있을 때,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침묵 안에서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터퍼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간을 잘 맞춘 침묵은 말보다도 좋은 웅변이다.” 하나님의 침묵은 어떤 말보다도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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