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느낀다는 것: 소설 『아몬드』가 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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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그리스도인: 이정일 작가의 독서 노트 (1)

지난해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로 단숨에 주목받은 이정일 교수님이 새해부터 ‘책 읽는 그리스도인’으로 격주 주말마다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 책은 크리스천투데이 ‘올해의 책’에 선정됐습니다. 이정일 교수님은 신앙과 묵상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인문학 책을 중요한 인용과 함께 소개하며, 부드럽지만 깊이 있게 생각할 부분들을 정리해 주실 것입니다. 교수님의 안내에 따라, 2021년 우리 함께 독서의 세계로 빠져들어 ‘책 읽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편집자 주

스스로 결정해보고 빠져보고 느껴본 적 없다면,
소설은 우리에게 정말 좋은 훈련 도구가 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신앙인이 고민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아몬드
손원평 | 창비 | 263쪽 | 12,000원

올 한 해 코로나19로 힘겨워 하는 성도들에게 위로가 된 소설이 있다.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이다.

작가의 첫 소설이고 청소년 문학임에도 2017년 출간된 이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누구든 일단 읽기 시작하면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는 윤재라는 소년의 홀로서기에 빠져든다. 윤재가 친구를 만나면서 공감이란 것을 힘겹게 느껴가며 성장하는데 그 모습이 아름답다.

이 책을 읽지 않았어도 어디선가 무표정한 얼굴을 한 표지를 보았을 것이다. 표지가 인상적이지만, 제목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아몬드와 무표정한 얼굴이 서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엔 연관관계가 있다. 사람의 머릿속엔 편도선이 있는데, 아몬드를 닮았다. 그런데 윤재는 그 크기가 작아서 감정을 잘 모른다. 무표정한 표정을 짓는 것도 편도체가 정상인보다 작기 때문이다.

병명 알렉시티미아(alexithymia)의 의미가 심상치 않다. ‘영혼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음’이다. 이 병은 1970년대에 처음 보고된 정서적 장애다. 정서라고 말했지만 감정적 장애다. 같은 말이지만 학계에선 ‘정서’를, 일상에선 ‘감정’을 더 선호한다.

삶은 여러 맛을 지녔지만, 안타깝게도 윤재는 그 맛을 느끼지 못한다. 윤재는 이성적인 판단은 하지만, 감정적인 판단은 잘 못한다. 그래서 차가 와도 피할 줄 모른다. 두려움이란 감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뭘까. 우리는 잘 모른다.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나 역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감정을 느끼는 편도체가 고장나서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의 이면을 읽어내지 못하고, 두려움과 아픔도 모르는 것에 대해 전해준다. 엄마는 어떻게든 아들이 사람들 눈에 괴물로 비춰지지 않기를 바라기에 세상 속에 녹아드는 법을 가르친다.

“차가 가까이 온다→ 몸을 피하거나, 가까워지면 뛴다
사람이 다가온다→ 부딪히지 않도록 한쪽으로 비켜선다
상대방이 웃는다→ 똑같이 미소를 짓는다(33쪽)”.

윤재의 홀로서기

창세기 12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홀로서기를 본다. 아브라함도 가나안에 도착한 뒤 기근을 만났다. 분명 기도를 했을 테지만 그가 응답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홀로서기가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선택한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다. 작가도 윤재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 감정을 느끼지 못해 힘겨운 아이에게 작가는 그보다 더 큰 위기 속으로 조용히 밀어낸다.

윤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태어났다. 그런데 생일날 비극을 겪게 된다. 퇴직 후 삶이 풀리지 않아 비관하던 한 남자가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엄마와 할머니를 이유 없이 망치로 내리치고 칼로 찌른 것이다.

유서에 보니 그는 세상을 원망했고, ‘오늘 누구든지 웃고 있는 사람은 나와 함께 갈 것입니다(63쪽)’라고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죽었고 엄마는 살아남았지만 식물인간이 되었다. 이제 윤재의 울타리가 사라진 것이다.

윤재 엄마의 꿈은 소박했다. 자기 아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윤재에게 삼시세끼 아몬드를 많이 먹인 것도 이유가 있다. 아몬드의 모양이 머릿속 깊은 곳에 있는 편도체와 모양이 비슷하다.

엄마는 아몬드를 많이 먹으면 편도체가 더 자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엄마가 기댈 수 있는 몇 안 되는 희망 중 하나였다. 소설 속 엄마의 삶도 고달프다. 엄마의 반대에도 사랑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으로 윤재의 아픔을 배우게 된다.

엄마의 삶도 고달팠다. 집을 나가 칠년 가까이 엄마와 연락을 끊고 살았다. 그러다 임신을 했는데 아이가 정서장애가 있다. 자기 혼자선 감당이 안 되어서 SOS를 보냈고, 그래서 할머니, 엄마, 윤재 셋이 작은 헌책방을 운영하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 운명은 이 셋을 갈라놓았다. 할머니는 죽었지만, 엄마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뇌사 상태로 다시 깨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이제 윤재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윤재의 성장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 어마어마한 우주가 있다. 나태주 시인은 시 ‘풀꽃’에서 이것을 보여준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시인이 포착한 발견의 의미를 『아몬드』를 읽으며 이해하게 되었다. 윤재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윤재는 이것을 두 친구―곤이와 도라―를 통해 배운다.

“곤이가 고통, 죄책감, 아픔이 뭔지 알려 주려 했다면 도라는 내게 꽃과 향기, 바람과 꿈을 가르쳐 주었다(174쪽).”

곤이는 거칠지만 감정이 풍부한 아이다. 윤재는 곤이를 만나면서 감정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남들은 곤이를 문제아라고 부른다. 하지만 윤재는 곤이를 착한 아이라고 말한다.

윤재는 곤이가 자신이 만난 사람들 중 가장 투명했다고 말한다. “아무도 곤이를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171쪽)”라는 윤재의 말은, 뭔가를 느끼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변화는 도라라는 여자친구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도라는 곤이와 정반대 쪽에 서 있는 아이다. 도라는 거친 곤이와 다른 방식으로 윤재의 감정을 자극한다. 윤재는 곤이를 통해서 감정이 뭔지를 이해하고 싶어했다면, 도라를 통해서는 그런 감정이 자연스레 솟아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도라와 윤재는 때론 오해도 하지만 서로에게 ‘왜 달리는지’,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같은 이유를 묻는다. 이런 질문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며 둘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간다.

곤이와 윤재 둘은 혼자만의 세상에 익숙해져 있다. 곤이도 윤재만큼 아픔이 많은 아이였다. 곤이는 윤재에게 엄마가 있다가 없어지는 거랑(윤재의 경우), 애초에 기억에도 없었던 엄마가 갑자기 나타나서 죽어버리는 것(곤이의 경우)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불행한 것일까, 묻기도 한다.

곤이가 윤재를 만나는 것도, 윤재는 곤이를 겉만 보고 낙인찍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곤이의 아픔을 보면서, 윤재는 할머니가 느꼈을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도라 역시 자주 책방에 놀러왔고, 그 애가 올 때마다 윤재는 등줄기가 욱신거렸다. 영화 <헐크>에서 로버트 브루스 배너(Robert Bruce Banner) 박사가 헐크(Hulk)로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려는 징후였다.

윤재가 평범하지 않은 아이로 태어나면서, 엄마도 윤재도 곤이도 도라도 바뀐다. 윤재의 장애가 없었다면, 엄마도 곤이도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윤재 덕분에 모두들 인생을 배워간다.

소설과 신앙

이 소설을 읽은 성도들이 많을 것이다. 다들 공감이 왜 중요한지, 감정이 왜 중요한지 윤재를 통해서 느꼈을 것이다.

윤재가 없었다면 ‘알렉시티미아’라는 질병은 그저 정보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윤재 덕분에 그 질병은 나의 아픔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왕따나 편견 혹은 차별로 아픔을 겪는 주변의 누군가를 돌아보게 한다. 그래 설까 소설에서 윤재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245쪽).”

윤재는 조금씩 자기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느낌을 갖는 것은 신앙인에게도 중요하다. 자기 느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노래 잘 하는 사람들이 많다. 흥이 많은 문화를 가졌기에 저마다 노래에 대한 자기 나름의 주관이 있다. 이것은 신앙과도 이어진다. 자신만의 느낌의 데이터베이스가 충전된 사람은 노래이든 신앙이든 타인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주변에선 신앙서적도 추천하고 좋은 영화도 추천한다. 다들 코로나19로 자투리 시간이 생겨 신앙서적을 읽거나 성경을 필사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도 읽어보자. 윤재처럼 서툴더라도 공감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해보고 빠져보고 느껴본 적이 없다면, 소설은 정말 좋은 훈련 도구가 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신앙인이 공감의 빈곤을 고민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인지 모른다는 걸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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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의 저자 괴테 동상 앞에 선 이정일 교수. ⓒ크투 DB

나만의 소설 리스트가 없다면, 『아몬드』를 읽어보길 권유하고 싶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면, 파우스트 박사는 무한한 지식과 세속적인 쾌락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마귀에게 넘긴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가 파우스트에게 내건 유일한 계약조건―아름다운 것, 경이로운 것을 보되 감탄하지 말 것―만 지킨다면,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를 영원히 노예로 부릴 수 있다.

파우스트는 쉬운 조건에 서슴없이 계약을 한다. 그는 끝부분에 가서야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경이로움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가를 깨닫는다. 노을을 보고 감탄하지 못하는 것,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감탄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가를 안 것이다.

경이로움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윤재는 파우스트와 같은 선택을 한다. 부딪혀 보기로 한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259쪽).”

이런 선택이 비극이 될지 희극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에게 감정이 없다면, 이 세상은 무채색이 지루한 곳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공감의 힘 덕분에 감정이라는 영혼의 색깔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등장인물과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다 보면 어느새 성숙해진 자신을 보게 된다. 문학을 읽다 보면 키가 자라듯이 감정도 자란다는 걸 느낀다. 『아몬드』가 그걸 알려준다.

이정일 교수
미국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석사를 받았다. 신학을 하기 전엔 영문학을 공부해 문학박사를 받았다. 박사 후 뉴욕주립대 영문과에서 미국 현대시를, 세계문학연구소에서 제3세계 작가들을 연구했다. 대학에서 세계문학과 영어를 가르치며 전방 포병대대 교회에서 군(軍) 선교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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