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그리스도인: 이정일 작가의 독서노트 (2)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지난해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로 단숨에 주목받은 이정일 교수님이 새해부터 ‘책 읽는 그리스도인’으로 격주마다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 책은 크리스천투데이 ‘올해의 책’에 선정됐습니다. 이정일 교수님은 신앙과 묵상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인문학 책을 중요한 인용과 함께 소개하며, 부드럽지만 깊이 있게 생각할 부분들을 정리해 주실 것입니다. 2주 전 <아몬드>에 이어, 이번에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입니다. 교수님의 안내에 따라, 2021년 우리 함께 독서의 세계로 빠져들어 ‘책 읽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편집자 주
‘여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이 소설
좋은 문장 하나만 찾아도 우리 삶 단단해져
이로써 삶의 어려움 수월하게 이기게 하신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 왕은철 역 | 현대문학 | 574쪽 | 13,500원
처음에는 이 소설의 제목이 예뻐서 읽었다. 작가의 이름이 할레드 호세이니(Khaled Hosseini)여서 눈여겨봤다. 미국 작가인데 이슬람 이름을 가졌고, 출신지는 아프가니스탄이었다. 게다가 직업은 의사여서 호기심이 일었다. 뉴스로만 듣던 아프간 사람들의 삶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2007)』은 6년 뒤 한국에 소개된 『눈물의 아이들(2013)』과 맞닿아 있다. 이 책의 작가 에이브러햄 버기즈(Abraham Verghese)는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났지만 인도계이다. 후일 미국에 와서 의사가 된 후 에티오피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다. 피로 얼룩진 에티오피아의 현대사에 휩쓸린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두 소설은 닮았지만, 소설을 읽기 전까지 아프가니스탄은 내게 자살 폭탄 테러 뉴스가 전부인 먼 나라였다. 에티오피아도 시바의 여왕 전설과 커피의 원산지라는 상식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아마 독자들도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게 되면 그 먼 나라가 사마리아 여인처럼,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다.
오늘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으려 한다. 이 소설은 두 여인―마리암(Mariam)과 라일라(Laila)―의 이야기이다.
배경은 196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이다. 마리암은 사생아로 태어나 삶이 평탄치 않았다. 라일라는 온전한 가정에서 잘 자랐으나 전쟁으로 엉망이 되었다. 둘 다 자신을 지켜주는 울타리 같던 엄마와 부모를 잃으면서,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어쩔 수 없이 라시드(Rasheed)라는 구두장이의 아내가 되었다. 그는 카불에 산다. 원래 아내와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죽었다.
그 후 마리암과 결혼을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마리암은 본처이고, 라일라는 후처이다. 이야기 초반에 둘은 서로 반목하지만, 곧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된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번역본으로 563쪽이나 된다. 긴 이야기이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책을 내려놓치는 못할 것이다. 감정을 고르기 위해 멈추는 것 빼놓고는 말이다.
두 여자의 삶―전쟁과 탈레반의 압제 속에서도 싹트는 두 여자의 우정―이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국제관계의 민낯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마리암
소설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마리암의 이야기이고, 2부는 라일라의 이야기이다. 3부는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이고, 4부는 이야기의 결론이다. 1부 11장에 보면 작가는 마리암이 결혼을 한 뒤 남편을 따라 카불이란 곳에 온 모습을 묘사한다. 마리암은 부르카를 입는 연습을 하고 있다.
망사를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게 낯설었다. 마리암은 부르카(burka)를 입고 방 안에서 걷는 연습을 하다가 끝자락을 밟아 계속 넘어졌다. 망사는 한쪽에서만 볼 수 있는 창문 같아서 시야가 좁았다. 주변을 볼 수 없기에 걸을 때도 음식을 먹을 때도 불편했다. 하지만 여자들은 완전히 몸을 가리고 다녀야 했다.
마리암은 부르카가 싫었지만, 어쩌면 자신의 과거를 감추는 것 같아 위로도 되었다. 사생아였기 때문이다. 사생아는 마리암의 삶을 예표하는 단어다.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 손님처럼 찾아왔다. 외톨이 마리암에게 도시 아버지는 그야말로 판타지였다. 영화관을 운영하는 아버지에게 빠져드는 딸에게 엄마 나나가 경고했지만, 마리암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사실 아버지에겐 정실부인이 세 명이나 있었고 엄마는 식모였다. 헌데 엄마가 임신을 하자 친정아버지는 떠났다. 그래도 마리암은 1959년에 태어났지만, ‘하라미’로 불렸다. 사생아, 곧 아무도 원치 않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마리암은 자신이 사랑, 가족 같은 것들에 대한 권리를 가질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달았고, 이걸 엄마가 확인시켜 주었다.
“너 같은 계집애를 학교에 보내 어디다 쓰려고? … 너는 그런 데서는 쓸모 있는 걸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거야. 너나 나 같은 여자한테 유일한 기술흔 타하물 참는 것이다. … 그게 우리 팔자다 … 그것이 우리가 가진 전부다(30쪽).”
엄마에겐 딸이 삶의 전부였는데, 그런 딸이 위선적인 아버지의 말을 더 신뢰하게 되자 자살을 한다. 그 이후 엄마라는 보호막을 잃은 마리암은 힘든 삶을 살게 된다.
결혼 후엔 더 힘들었다. 한 번은 남편이 밥을 먹다가 돌을 씹었다. 남편은 그녀의 입을 벌리고 모래와 자갈을 씹게 해 어금니가 깨지도록 만들었다.
마리암은 새댁이지만 겨우 15살이다. 하지만 60살이 넘는 남자에게 시집가서 빨래하고 밥하고 청소하고 유산까지 한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마리암에게 산다는 것은 삶이 주는 상처를 하나 더 얻는 것이었다. 자신이 태어난 목적을 모르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을 것이다. 마리암이 그랬다. 라일라를 만나기 전까지는.
라일라
1978년생 라일라는 마리암과 반대다. 부모가 있었고, 특히 교사인 아버지가 딸을 살뜰히 챙겼다. 아버지는 딸에게 결혼을 늦출 수 있어도 교육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하며 “너는 원한다면 뭐든지 될 수 있어”, “여자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면 사회는 성공할 수가 없는 거다(155쪽)”라고 말한다.
공산주의를 싫어했지만, 그래도 잘한 게 있다면 교육이라고 여겼다. 카불 대학 학생 중 3분의 2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란했던 가족의 행복은 소련이 침공하면서 뒤틀리게 된다. 두 오빠가 무장 투쟁에 나섰다가 전사했다. 이로 인해 살 이유가 없어진 엄마가 변해버리고 만다.
라일라는 엄마를 어떻게든 살도록 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엄마가 살려는 이유는 혼자 남은 딸 때문이 아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소련군이 패망하는 모습을 보려는 것이다. 그것이 전사한 두 아들들의 원수를 갚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이런 모습을 보며 괴로워했고, 이런 슬픔을 남자 친구 타리크(Tariq)가 위로해주었다.
카불은 너무 위험했다. 헌데 엄마는 탈출을 죽은 두 아들이 치른 희생에 대한 모욕이요 배반으로 여겼다. 힘겨운 설득 끝에 마음을 바꾸었지만, 탈출하는 날 포탄이 날아와 부모는 즉사하고 라일라는 코마에 빠져 버렸다. 가까스로 의식을 차린 라일라는 라시드와 결혼을 선택한다. 임신을 했고, 부모란 보호막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위기
우리가 어느 시대 어느 곳을 살건, 개인의 삶이 시대의 역사와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마리암과 라일라가 살아낸 세월은 개인사에 속한다.
헌데 개인사를 펼쳐 보면 무지막지하게 끼어들어온 시대의 씨줄 때문에, 자신들이 원하는 삶의 무늬를 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마리암과 라일라의 입장이라면 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상상을 하게 된다.
마리암은 처음엔 라일라를 미워했지만, 곧 서로를 의지하게 된다. 1996년 9월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하면서 삶은 더 힘들어졌다.
여자들은 항상 집에 있어야 했다. 부르카를 입어야 했고, 화장이나 장신구는 금지되었다. 상대방이 말을 걸지 않으면 말해서는 안 되었다.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밖에서 일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제 모든 시민은 하루에 다섯 차례씩 기도를 해야 했다. 모든 남자는 수염을 길러야 했고, 노래와 춤, 연날리기, 책, 영화, 그림 그리기, 새를 키우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런 가운데 라일라의 삶은 라시드와의 전쟁으로 변해갔다. 라시드의 비열함을 견디질 못했기 때문이다. 화가 나 라일라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모습을 보고 마리암이 폭발했다.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이 남자의 악의와 구타를 계속 감수해야 했는가? 그가 아플 때 간호해주지 않았던가? 그와 그의 친구들을 위해 음식을 대접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모든 게 끝나면 설거지와 청소를 하지 않았던가? 이 남자에게 내 젊음을 바치지 않았던가(473쪽)?”
마리암은 남편의 폭력을 말리다, 결국 그를 죽이게 된다. 두 여자를 향해 살기를 품은 라시드를 향해 삽을 내리치는 순간, 작가는 마리암의 생각을 간결하게 설명한다. “그녀는 … 처음으로 자신의 삶의 행로를 결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476쪽).”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비록 폭력이란 형태를 띠긴 했지만, 자신의 의지를 처음으로 표출하였다.
마리암은 한 번도 자신의 생각을 펼쳐 보이지 못했다. 인생의 고난에 늘 끌려 다니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바뀌었다.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스스로 남는 쪽을 선택했다.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 마지막 순간 마리암의 속마음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녀는 쓸모없는 존재였고,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불쌍하고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잡초였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을 하고 사랑받은 사람으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이자 벗이자 보호자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어머니가 되어, 드디어 중요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마리암은 이렇게 죽는 것이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505쪽).”
고향
이 소설을 읽게 된다면, 3부까지 읽은 후 4부에선 잠시 멈춰보길 권유한다. 아마 이야기가 주는 먹먹함에 중간에 여러 번 멈추게 되었을 것이다.
나 역시 3부를 읽고 난 뒤 먹먹함이 수그러들지를 않아 며칠 책을 놓은 기억이 난다. 독자도 며칠간 쉬면서 내가 작가라면 어떻게 이야기를 마무리하였을지 상상해보기 바란다.
4부에서 작가는 숨가쁘게 펼쳐졌던 이야기가 정리한다. 작가는 51장을 “가뭄이 끝났다”로 시작한다. 이제 사람들은 카불이 다시 푸르러지길 원한다고 말을 한다.
라일라는 아들 아지자의 말 더듬는 버릇이 없어지고 있고 무자헤딘 로켓의 빈 탄환에 꽃이 심겨져 창턱에 놓여 있는 것을 본다. 사람들은 그걸 로켓꽃이라고 부른다.
라일라는 삶이 평온하고 안정되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지만, 그것이 기억되는 모습은 다를 것이다.
식물은 자신이 심겨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동물은 자신이 태어난 영역을 지킨다. 하지만 인간은 떠난다. 재촉하는 이가 없어도 떠난다. 떠날 땐 떠난다고 생각하고 떠난 게 아니다.
어떤 이는 꿈을 찾아 고향을 떠났지만, 라일라는 살기 위해서 떠났다. 고향에서의 삶은 조금씩 어긋났다. 그런데도 돌아갈 결심을 한다.
한 사람의 삶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장소들이 필요할까? 문학은 바로 이 ‘알 수 있었던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소설 덕분에 등장인물이 놓쳤거나 힘들게 깨달은 것을 안전하게 체험한다.
하나님은 ‘나’라는 한 사람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신다.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달라고 했을 때(열왕기하 2장 9절), 하나님은 허락하셨다.
엘리사가 살아갈 시대는 엘리야의 시대보다 갑절이나 힘들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엘리사를 위해 엘리야를 준비하셨듯, 우리의 인생에 많은 걸 문학으로도 준비하고 계시다.
소설을 읽다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놓으신 소설이 있다. 문제는 그걸 찾아내어 누리고 살며 감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좋은 문장 하나만 찾아도, 우리 삶은 단단해진다. 그리고 더 건강해지고 풍성해진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준비하여, 내가 삶의 어려움을 좀 더 수월하게 이겨내게 하신다.
이정일 교수
미국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석사를 받았다. 신학을 하기 전엔 영문학을 공부해 문학박사를 받았다. 박사 후 뉴욕주립대 영문과에서 미국 현대시를, 세계문학연구소에서 제3세계 작가들을 연구했다. 대학에서 세계문학과 영어를 가르치며 전방 포병대대 교회에서 군(軍) 선교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