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그리스도인: 이정일 작가의 독서노트(3) 『배움의 발견』
지난해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로 단숨에 주목받은 이정일 교수님이 2021년 ‘책 읽는 그리스도인’으로 격주마다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 책은 크리스천투데이 ‘올해의 책’에 선정됐습니다. 이정일 교수님은 신앙과 묵상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인문학 책을 중요한 인용과 함께 소개하며, 부드럽지만 깊이 있게 생각할 부분들을 정리해 주실 것입니다. 교수님의 안내에 따라, 2021년 우리 함께 독서의 세계로 빠져들어 ‘책 읽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편집자 주
인생이든 직장생활이든 기본이 제일 중요하다
꿈이 많을수록 먼저 자신을 잘 추슬러야 한다
이 책은 자신을 아는 것이 특권임을 알려준다
배움의 발견
타라 웨스트오버 | 김희정 역 | 열린책들 | 513쪽 | 18,000원
『배움의 발견』은 독특한 책이다. 자서전이지만, 소설처럼 읽힌다. 500여 쪽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타라(Tara)이다. 타라는 아이다호 주 외딴 산골짜기에서 살고 있다. 엄마 아빠가 있고, 7남매 중 막내딸이다.
책은 타라가 5살이 되던 때의 기억부터 시작한다. 연방정부 요원들이 타라의 집을 공격하고 있다. 총성과 고함이 들리고 불을 끈 채 모두들 부엌에 숨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실제 타라의 삶은 다르다. 타라는 7살이지만, 자신의 가족이 다른 가족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도 학교에 가지 않고, 출생증명서가 없고, 다쳐도 병원에 가지 않는다.
이들은 요한계시록 속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해가 빛을 잃고 달이 피로 물드는지를 살피면서 살고 있다. 가족 모두 돈이 생기면 식량, 비상용품, 무기와 연료를 비축하는데 쓴다. 잘 때도 머리맡에 피신용 가방을 두고 잔다.
아버지는 모르몬교 근본주의자이다. 조울증에 과대망상이 있어 공교육과 현대의학을 불신했다. 지식을 배우는 것을 창녀가 하는 짓이라고 욕했다. 그래서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위험한 폐철 처리장에서 일을 시킨다. 이 일이 주 생계원이다.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 모두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는데, 어느 날 셋째 오빠 타일러(Tyler)가 대학에 가겠다고 선언하고 집을 나간다. 이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이야기는 1986년생이 겪은 실화이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바바라 킹솔버의 『포이즌우드 바이블』과도 연결된다. 이걸 한국 버전으로 읽는다면 박혜란의 『목사의 딸』이 되고, 이슬람 판으로 읽는다면 『나는 말랄라』, 『이단자』, 『사막의 꽃』,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가 될 것이다.
어느 책을 읽든, 자신의 생각을 갖게 돼야만 맹신과 폭력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배움의 의미
“배움이란 일생 동안 알고 있었던 것을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200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이 한 말이다. 소설 『네 개의 문이 있는 도시(1969)』에서 나온다.
배움에 대한 정의가 여럿 있지만, 필자는 레싱의 정의를 가장 사랑한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심장이 콩닥거리는 걸 느꼈고, 독서를 다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시골 소녀 타라가 먼저 세상에 나간 오빠의 격려로 배움에 호기심을 갖는다. 호기심의 씨가 떨어지자, 타라는 대학에 갈 꿈을 꾸게 된다. 열여섯 살까지 학교에 가본 적 없던 소녀가 케임브리지 박사가 된다.
그 여정에서 타라는 배운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이 결국엔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힘이 그 자신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381쪽).
7남매 중 4명은 부모를 따라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는 걸 선택했고, 셋(타일러, 리처드, 타라)만이 세상 밖으로 나갔다. 삶의 선택에 정답은 없지만, 4명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폐쇄적인 가족 안에서 자란 탓에 다들 아버지의 권위에 순응했고 억압받는 삶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화자 타라가 꿈틀꿈틀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내비칠 때 응원하게 된다.
인상적인 부분
타라는 예방접종 한 번 하지 않은 채 자랐다. 주일날 교회에 가는 걸 제외하면, 그녀에겐 가족과 산이 전부였다. 읽어본 책이라곤 성경과 모르몬 경전밖에 없다.
그녀는 나폴레옹과 장발장 중 누가 역사적 인물이고 누가 허구의 인물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OMR 카드를 사용하는 법도 몰라서 물어야 했고, 대학수업 땐 블랙홀, 홀로코스트란 단어의 뜻을 물었다가 분위기가 싸해지는 경험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몇 년생인지 확인한 기억이 난다. 1986년생 미국 출생 아이가 겪은 실화라고 쓰여 있는데, 그걸 저자가 진짜 겪은 일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탈레반이나 I.S., 보코하람 같은 극단적인 이슬람 공동체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배움과 가족과 자아를 생각했고, 가정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답습되고 교육되는지 보게 되었다.
이것이 허구가 아니라 실화라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에, 이야기가 주는 무게감은 다르다. 부모는 나를 위험에서 구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위험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게다가 아버지나 가족 구성원은 잘못된 여성관을 갖고 있고, 특히 오빠 숀(Shawn)은 화가 나면 폭력을 썼다. 여동생 타라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폭력을 당했을 때 타라가 보이는 반응이다.
오빠 숀이 여자친구에게 습관적으로 시키는 일이 있다. 물 한 잔 달라고 했다가 가져오면 얼음을 원했다. 얼음 넣은 물을 가져다주면 우유를 원했고, 그런 다음 다시 물, 얼음물, 얼음 들지 않은 물, 주스 등으로 말을 바꿨다.
그러다 집에 없는 것을 원하면 여자 친구는 읍내까지 나가서 그것을 사왔다. 사오면 오빠는 다른 것을 요구했다. 그 일을 오빠가 타라에게 한 것이다. “물 한 잔만 가져와라(179쪽).” 타라는 오빠 머리에 물을 부었다.
화가 난 숀은 타라의 머리카락을 잡았고 손목도 꺾어서 사과를 받아냈다. 오빠가 가자, 타라는 목욕탕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본다. 울고 있다.
타라는 폭력에 굴복한 자신이 미웠다. 손이 꺾였기에 통증에 어쩔 수 없이 사과를 했지만, 그런 자신이 싫었다. 아프지 않았다면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돌’이라고 세뇌시킨다. 타라는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몰랐다.
타라는 고통을 느끼는 자신이 싫어서 나를 지우려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지워지고 나면 그 자리를 무엇이 메우게 될까? 아마도 세뇌가 된 생각일 것이다. 그 일을 언니 오드리(Audrey)가 겪었다.
동생이 오빠에게 맞은 것을 알고도 언니는 모른 척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지내는데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한다. 타라는 이후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나를 찾아가는 길
카메라가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19세 소녀에게 앵글을 맞춘다. 아직 초보 티가 역력하지만 삽질을 하고 건축자재를 준비한다. 학교 대신 공사현장에 나와서 일을 한지 1년이 넘었다.
자신보다 겨우 한 달 전에 목수 일을 시작한 아빠와 함께 일한다. 초보목수 이아진의 이야기인데, 나는 KBS 다큐 ‘인간극장(2020년 11월 23-27일 방송)’을 통해 그 사연을 보게 되었다. 아진은 왜 목수가 되었을까?
중학교 2학년 때 호주에 유학을 갔다. 친구들하고 잘 지냈고 공부도 잘 따라갔다. 헌데 가끔 마음 한쪽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걸 잘 하고 있나’, ‘내 꿈이 뭐지’란 생각이 들 때면 아득해졌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공부하는 기계가 된 것 같아, 자퇴하고 귀국했다. 그때 우연히 목수 일을 시작한 아빠를 따라 건축 현장에 왔다가 노가다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
“집이 한 채 올라가는 건축 과정이 눈으로 보이니까 그거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뿌듯해요.”
아진이 느낀 이 감정을 타라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대학 진학을 통한 배움이란 버전으로 느낀다. 타일러 오빠의 격려로 대입 자격시험을 치렀고, 16세까지 학교를 한 번도 다녀보지 않았던 그가 결국엔 케임브리지 대학교 박사가 되었다.
이런 엄청난 결과를 이루어낸 첫 시작은 호기심이었다. 이 호기심을 다른 말로 바꾸면 ‘고민하는 힘, 생각하는 힘’이 된다. 그걸 화자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약하지만 그 나약함 안에 힘이 들어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살겠다는 확신. … 확실히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휩쓸리길 거부한 것은 내가 그때까지 한 번도 나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은 특권이었다.
그때까지의 내 삶은 늘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서술되어져 왔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강하고, 단호하고, 절대적이었다. 내 목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만큼 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311-312쪽).”
타일러 오빠가 대학에 간다고 말했을 때, 타라는 오빠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생각이 자기 생각이었고 아버지의 두려움이 자신의 두려움이었지만, 그걸 몰랐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자기가 믿는 생각을 강요해도 그저 순응했다. 생각하는 힘이 없었기 때문인데, 그 힘은 글자를 통해 다른 이의 생각을 내 속에 받아들일 때부터 작동된다. 책을 읽자 그가 경험한 세상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과 너무나 달랐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것은 별개이지만, 이 폐쇄된 가정에선 이 둘이 하나였다. 타라가 고민하게 되면서 조금씩 아버지와 갈등이 생긴다.
아버지는 타라의 성장을 막는 훼방꾼이었고, 어머니는 방관자였다. 자기 말만 맞는다고 여기는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 순응하는 어머니의 방관, 이 둘 사이에서 타라는 제대로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온전히 사랑할 수도 없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 자기 발견의 여정이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지를 실감한다.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 밖에 없다(301쪽). 이것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고민하기 시작하면 자기를 비하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삶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 결과 타라는 아버지가 기른 소녀와 배움을 통해 다시 태어난 지금의 자신이 공존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들이 있었다. 타라는 그것이 자신의 생각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배움을 시작하고 보니, 자신에 관한 생각들이 실은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머리에 심어진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공부를 하면서 고민하는 힘에 근육이 붙자, 타라는 어느 순간 진짜 나로 살아가라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특권임을 깨닫게 된다.
공부하는 이유
서울 아파트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 엄청나게 올랐다. 그 여파가 얼마나 큰지 ‘영끌’이라는 신조어가 부동산 기사마다 등장한다. 영끌(영혼까지 끌어 쓴다는 뜻)로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제 한국인은 살기 위해 집을 사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집을 산다. 집은 ‘스위트홈’이 아니라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경제적 위기로부터 나와 가족을 지켜줄 물질적 보루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가치란 말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가치가 뒷전으로 밀려나면 어떻게 될까? 보이는 것이 전부인 인생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대화에 자주 나오는 말은 복음이나 가치가 아니다. 주식, 비트코인, 투자, 경매, 건물주 같은 말이 더 많다.
이렇게 되면 가치 있는 사람보단 성공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성공은 원하지만, 그걸 못 이룰 땐 무능한 자신에게 화가 난다. 대개는 자기를 비하하거나 남을 비하하면서 화를 푼다.
재산이 없는 사람은 사는 게 힘들다. 힘들면 아프고, 아프면 슬프고 피곤하다. 인생이든 직장생활이든 기본이 제일 중요하다. 이루고 싶은 꿈이 많을수록 자신을 잘 추슬러야 한다.
타라의 인생이 보여주듯, 그 사람이 매일 하는 생각과 말이 그 사람의 인생을 만든다. 가진 게 없어도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다면 공부해야 한다. 이때 공부란 탁월한 업적을 내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이 사는 목적을 깨닫는 생각의 자극을 뜻한다.
지식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속에 있는 것과 섞이게 된다. 이때 자극은 외부 지식이 내 것으로 흡수되도록 돕는 촉매 역할을 한다. 이 자극이 한 가지 주제를 두고 진행될 때 ‘고민하는 힘’이 만들어진다.
이런 고민하는 힘이 없이 자신이 느끼는 것을 토로하면, 그건 자기합리화나 감정 배설이 되기 싶다. 공부는 고민하는 힘을 체계적으로 키워주는데, 이때 문학은 그 힘이 내 삶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배움의 발견』을 펴면, 울프와 듀이의 인용문과 저자의 말이 나온다. 그 뒤에 프롤로그가 나오는데, 그 글이 자서전 같지 않다. 필자에게는 소설처럼 느껴졌다.
화자는 산에서 부는 돌풍을 “마치 산꼭대기가 숨을 내쉬는 것” 같다고 묘사한다. 바람이 야생밀밭을 지나갈 때 “수백만 명의 발레리나들은 똑같은 동작으로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인다(11쪽)”고 묘사한다. 이런 묘사를 읽으며 무엇을 느끼는가?
타라는 이야기의 배경인 집과 산을 묘사한다. 독자는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풍경 묘사를 읽으며 빠져든다. 벅스피크(Buck’s Peak) 산의 풍경은 타라의 내면을 보여주는 사진이 된다. 풍경을 오랫동안 바라보다 보면 처음엔 보지 못한 새로운 풍경이 보인다.
풍경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을 때가 많다. 배움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타라의 인생이 그것을 보여주는데, 그 첫 힌트가 풍경 묘사다.
이정일 교수
미국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석사를 받았다. 신학을 하기 전엔 영문학을 공부해 문학박사를 받았다. 박사 후 뉴욕주립대 영문과에서 미국 현대시를, 세계문학연구소에서 제3세계 작가들을 연구했다. 대학에서 세계문학과 영어를 가르치며 전방 포병대대 교회에서 군(軍) 선교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