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다림, 막연함 아닌 ‘기도하며 준비하는’ 것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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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설교연구원 설교] 기다림은 사랑이다

본문: 누가복음 15장 11-24절

사랑, 세상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

사회학자 피티림 소로킨은 ‘사랑의 방식과 힘’이란 저서의 서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유물론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은 사랑의 힘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것을 아예 환상으로 여기면서 망상, 이성을 마비시키는 아편, 관념, 비과학적인 착각으로 단정짓는다.

현대인들은 사랑의 힘이 인간의 행동과 성격에 긍정적인 힘을 발휘하고 생물적, 사회적, 도덕적, 심리적 진화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역사적 사건의 방향을 변화시키며 사회적인 제도와 문화의 틀을 결정짓는다는 이론을 철저히 외면한다.”

이렇게 서문을 시작한 소로킨은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토대로, 사랑의 힘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현대인들의 적나라한 실상을 폭로합니다.

소로킨은 현대인들이 사랑의 힘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은 유물론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현대인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믿는 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기다림의 사랑은 힘든 사랑이다

세상에 사랑에 대한 정의는 너무나 다양합니다. 사람마다 사랑에 대한 정의도 다다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랑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방법들도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로 사랑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어떤 사람은 글로 사랑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행동으로 사랑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말없이 든든히 옆에서 지켜줌으로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을 하는 방법에 있어 가장 힘든 사랑이 어떤 사랑일까요? 이것에 대한 대답도 다 다를 수 있겠지만, 그 힘든 사랑 중에 하나가 기다림의 사랑입니다.

삶 자체가 기다림이다

‘빨리빨리’ 문화가 발달해 있는 우리나라에서, 기다림의 사랑을 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기다림의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송정림 작가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우리의 삶은 여러 가지 감정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뻐하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 사람들과 만나고 부대끼면서 이렇게 여러 가지 감정을 가지고 사는 게 인생입니다.

하지만 이 감정들은 우리의 생활 전체로 놓고 볼 때 겨우 1%만 차지할 뿐이라고 합니다. 나머지 99%는 결국 ‘기다림’입니다. 행복이 오기를 바라고, 사랑이 오기를 바라고, 소식이 오기를 바라고… 긴 기다림의 복도를 지나 다가오는 행운의 발자국 소리…,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일이죠.

만남의 순간은 오랜 기다림 끝에 오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오기도 하고, 찰나로 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다림의 순간은 늘 설렙니다. 기대감에 부풀고 행복합니다. 아침이 온다는 것은, 그 발자국 소리가 하루의 길이만큼 더 가깝게 다가왔다는 기쁜 증거입니다.”

우리의 삶은 1%를 뺀 99%가 기다림이라는 말에 공감이 되지 않으십니까?

사랑하기 기다릴 수 있다

무슨 일이든 누구에게든 기다림이 필요한데, 기다리는 시간은 답답하고 초조하고 힘이 듭니다. 기다림은 외롭고 고독한 시간입니다.

믿음으로 기다리고 소망 가운데 기다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림 속에 경험하는 고독감과 쓸쓸함, 불안은 우리를 많이 힘들게 만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습니다.

남녀가 사랑해서 결혼을 하면 아기가 생깁니다. 아기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을 때 부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만끽합니다. 배가 불러오면서 태어날 아기를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여자에게 배가 불러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삶입니다. 아이를 낳는 해산의 고통은 엄청납니다. 하지만 아기를 기다리는 설렘과 아기를 향한 사랑이 있기에 그 고통을 이겨냅니다.

기다림의 사랑은 위대하다

한 젊은이가 지혜를 얻기 위해서 한 현인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스승은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불만에 찬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저에게 왜 아무것도 안 가르쳐 주십니까?”

스승은 제자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저기 벽돌 뒤에 많은 금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돌 벽으로 막아두었으니 어떻게 꺼낼 수 있겠느냐?”

제자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망치로 돌 벽을 깨뜨리고 꺼내면 됩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러면 하나 더 묻겠다. 여기 있는 이 닭의 알에서 생명을 꺼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제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품어주고 따뜻하게 해주고 기다려줘야 합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품어주고 사랑해주면 그 안에서 생명이 자라서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게 된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망치로 껍질을 깨는 줄 알지. 물론 망치로 껍질을 깰 수는 있다. 그러나 망치로 깨서는 단 하나의 생명도 건질 수 없단다.”

기다림의 사랑이 위대한 것은 그것으로 인해 생명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기다림의 사랑을 보여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의 사랑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려 주시지 않고 우리가 잘못했을 때 망치를 드셨다면, 우리는 장애인으로 이 세상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기다려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를 떠나간 둘째 아들

탕자의 비유 말씀에서 실제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둘째 아들보다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는 그 사랑이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케니스 베일리란 분은 15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것도 한 곳에서만 아니라 모로코로부터 인도까지, 터키로부터 수단까지 15년 동안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람들의 대답은 모두 똑같았습니다. 질문과 답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 마을에 어떤 사람이 탕자와 같이 유산요구를 자기 아버지에게 한 일이 있는가?” “결코 없었다.”

“당신은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불가능하다”

“누군가가 이런 요구를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는가?” “아버지가 그를 때렸을 것이다.”

“왜 그런가?” “그런 요구는 아버지가 죽기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베일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들은 자기 유산만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 유산의 처리권까지 요구한 것이다.

비록 유산을 넘겨준 경우라도 재산 처리권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아버지가 가지는 법인데, 이렇게 적용해 보면 탕자의 두 가지 요구 속에는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나는 기다릴 수 없다’고 한 것과 같다.”

탕자의 비유에 대한 말씀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아주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고 유산을 처분하여 아예 먼 나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고 함께 생활해 온 가정과 공동체를 배반한 것과 같습니다. 육신적으로 배반한 것이고 아울러 정신적으로 배반했습니다.

언젠가 서울에서 유산 때문에 아버지를 죽인 어느 대학 교수의 마음의 뿌리나, 이 아들의 심리적 뿌리는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이 요구대로 모든 것을 다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런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아버지가 죽기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 없으니 유산을 내어놓으라는 자식 앞에서 아직도 정정한 아버지가 그 유산을 내놓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요즘은 부모 대접을 받으려고 하면 죽을 때까지 재산을 잘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나이 들었다고 미리 다 나누어 주면 받을 때는 고맙다고 하고 자식들이 잘해 줄 것 같은데, 받고 나면 찬밥 신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 있는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다

왜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이런 무모한 요구를 다 받아들였을까요? 아버지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얼마든지 아들에게 더 많은 돈을 줄테니 집에 있으라고 강요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 있는 사랑은 남에게 강요를 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자신 있는 아버지는 아들이 잘못 나간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자신 있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합니다. 실패를 통하여 더 성숙한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둘째 아들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아 멀리 떠난 아들은 얼마의 시간 동안인지는 모르지만, 그 모든 것을 다 탕진하고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해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지금 둘째 아들은 사람으로서 더 이상 내려가려야 갈 수 없는 지점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때서야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고자 마음을 먹은 것은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인식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집으로 가겠다”고 말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돌아가자”고 결단을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 = 기다림의 사랑

둘째 아들은 집을 떠나간 후 아버지에게 소식 한 번 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아버지는‘이제는 아들을 잊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매일 매일 마을 어귀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느 날 거지 꼴이 된 한 사람이 저 멀리에서 보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아들의 모습을 도저히 알아 볼 수 없을 것 같은데, 아버지는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아들임을 알고 먼저 아들에게 달려갑니다.

남자들은 훈련소에서 훈련을 다 마치면 퇴소식을 하게 됩니다. 퇴소식날 부모님들을 초청하게 됩니다. 퇴소식을 하기 위해서 훈련병들은 연병장에게 모입니다. 수백 명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천명이 넘는 훈련병들이 모입니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모자를 쓴 훈련병들이 천명이 넘게 모여도 부모님들은 정확하게 아들을 찾아냅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의 눈에는 아들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들에게는 관심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먼 거리에서 거지 꼴이 된 아들을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아들만 생각하고 아들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들의 옷에는 더러운 돼지 오물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근처에도 오지 않으려고 했을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달려가서 입을 맞추고 왈칵 끌어안았습니다.

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자기에게 혼을 내어야 마땅한 아버지가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그래서 급하게 자신이 준비한 말을 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으로 삼아 주십시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단지 서둘러 종들에게 “잔치를 준비하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기다림의 사랑이 없었다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을 향한 기다림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혹 몸은 교회에 와서 지금 앉아 있지만, 아직까지 하나님께 마음으로 돌아오지 못하신 분이 있으십니까?

빨리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혼내시려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안아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기다려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다림은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우리는 그 희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시면서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올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예수님이 떠나가셨기 때문에 곧 다시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예수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드로 사도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예수님께서 재림의 시기를 늦추시는 것은 한 생명이라고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다림은 영혼을 향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기다림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다리다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시면, 예수님을 이 땅 가운데 보내실 것입니다.

기다림의 사랑을 하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기다려 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도 기다림의 사랑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기다려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얼마나 기다려주셨습니까? 남편을 얼마나 기다려 주셨고 아내를 얼마나 기다려 주셨습니까?

부모님을 얼마나 기다려주셨고 자녀들을 얼마나 기다려 주셨습니까? 함께 일하는 동료를 얼마나 기다려 주셨습니까? 같이 신앙 생활하는 성도를 얼마나 기다려 주셨습니까?

어떤 분의 아들이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굴지의 대기업에 합격을 했습니다. 취업난이 심각한데 취직이 되었다고 주변에서는 축하가 쏟아졌고, 그분은 즐겁게 지갑을 열어 친지들과 친구들에게 한턱을 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몇 개월 다니더니 그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상사에게서 인격적인 모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이나 참고 다니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후 아들은 다른 회사에 취직을 하지 못한 채 3년을 흘러 보냈습니다. 다른 직장을 알아보기 위해 조금 더 분주하게 돌아다녀야 할 것 같은데, 아들은 방에만 처박혀 있었습니다. 그런 아들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러간 어느 날, 견디고 기다린 보람이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꿈에도 그리던 분야에 취업이 됐습니다. 아들은 지금 고마운 마음으로 행복하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희 큰 아들이 좀 많이 느립니다. 느리다고 제가 야단친 적도 있는데요. 가만히 보니 아들의 삶 자체가 좀 느립니다. 그래서 저도 아들을 좀 기다려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다림은 자녀한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부모 노릇입니다. 기다려 준다는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조금 늦게 출발하더라도 기다려주고, 조금 늦게 가더라도 기다려 주고, 조금 늦게 이루더라도 기다려는 주는 것입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준비된 기다림

제가 말씀드리는 기다림이란 막연한 기다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준비된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상대를 맞이하는 기다림이 아니라 상대를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한 기다림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그냥 둘째 아들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아들에게 입힐 가장 좋은 옷을 준비했습니다. 손에 끼워줄 가락지도 준비했습니다. 살찐 송아지도 준비했습니다.

아버지는 기다리던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들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을 아들에게 내 놓고 잔치를 벌입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등은 준비하였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막연하게 ‘신랑이 일찍 오겠지’라는 생각으로 등만 준비하였습니다. 결국 기름을 사러간 사이에 신랑이 왔고, 신랑을 맞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이 정말 사랑이라면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준비된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기도하며 기다리라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냥 넋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릴 줄 아는 삶’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희망의 시간이며 동시에 고통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에는 긴장과 떨림 그리고 기쁨과 행복에 대한 설렘이 있습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희망과 고통이 교차하는 긴장을 즐기며 오늘을 누리되 내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늘 현재를 살고 내일을 희망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의 특권이며 은혜입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기도하는 사람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늘 기다림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증표입니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e, A.D. 354-430)은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 신자이며 서방 교회의 아버지라 불렸습니다.

그의 교회사적 공헌과 신학적 영향은 전무후무합니다. 또한 그는 서양철학사와 세계사 속에 어느 누구도 되풀이할 수 없을 만한 종적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어거스틴이 위대해진 것은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모니카는 무려 삼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육체의 향락과 세속적인 사교와 이교 철학에 빠져있던 어거스틴을 위해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다시 돌아왔고 역사의 길이 남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막연함 기다림이 아니라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우리의 향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다림은 우리에게 희망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기다림의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도 또한 기다리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기도하며 준비된 기다림이 되어야 합니다.

▲이재영 목사. ⓒ크투 DB

▲이재영 목사. ⓒ크투 DB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감사인생(공저)’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https://cafe.naver.com/judam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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