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사, 전 6권 『3.1운동 일본 언론 매체 사료집』 발간
일간지·대중지·잡지 등의 1919년 조선 관련 기사 망라
새로운 매체들로 연구 다양성 확대, 외연 넓히는 효과
세계사적 의미 있는 3.1운동 양국 입장 이해 유의미해
3.1절 102주년을 앞둔 가운데, 전 6권의 『3.1운동 일본 언론 매체 사료집』이 발간됐다.
3.1운동을 당사자인 일본에서 어떻게 바라봤는지 신문과 잡지의 관련 기사들로 파악할 수 있는 이 사료는 3.1운동 100주년을 즈음해 양화진문화원 후원으로 기독 출판사인 홍성사에서 출간됐으며, 보도 내용을 원문(일본어) 그대로 실었다.
종래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반응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반복적으로 언급됐던 일부 매체 외에, 새로운 매체들을 통해 연구의 다양성을 확대하고 외연을 넓힌다는 의미가 있다.
사료집은 3·1운동과 직접 관련된 기사만을 선별적으로 수록하기보다는 3.1운동을 통해 촉발된 정치·사회·경제·문화를 비롯한 당시 조선 관련 기사를 망라했다. 기간도 1919년 3월부터 12월 말까지, 일부 매체는 1920년 초반까지를 대상으로 해 관련 연구를 위한 자료 공백을 메우는 역할도 하고 있다.
1권은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 2권은 고쿠민신문(國民新聞), 도요케이자이신보(東洋經濟新報), 후조신문(婦女新聞), 3권은 중앙공론(中央公論), 교육시론(敎育時論), 사회급국가(社會及國家), 아등(我等), 헌정(憲政) 등 5대 잡지, 4권은 오사카 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5권은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6권은 요로즈초호(萬朝報), 미야코신문(都新聞) 등의 기사들을 담았다.
언론 매체 보도 사료를 발췌한 것은, 기본적으로 당시 언론 매체가 사회 구성원들에게 각종 사건과 사실에 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물론, 그에 관한 분석과 해설까지 제공했기 때문이다.
발간위원회에 따르면, 언론 매체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사회 구성원들의 여론과 정체성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근대 초기라는 시대 상황에서 언론 매체가 갖는 중요성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문과 잡지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해석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자, 한 국가의 사회적 인식을 총체적으로 반영한 것이었다.
이번 사료집은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사회적 인식과 대응 양상을 전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초 자료가 된다는 평가다. 편저자들은 “100년 전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운동이었던 3.1운동에 대한 한일 양국 입장을 생생하게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유의미한 작업”이라고 의의를 밝혔다.
발간위원회 편저자들은 지난 2016년부터 일본 현지에서 자료 조사와 수집을 시작하여 1919년 당시 도쿄아사히신문, 오사카마이니치신문, 요미우리신문을 비롯한 일본 8개 주요 신문과 중앙공론, 교육시론, 헌정 등 5개 잡지에 실린 3,036편의 기사를 모으고, 사진 파일에 담긴 이들 기사를 모두 한글 파일로 옮겼다.
이를 6,000매 이상의 방대한 분량의 텍스트로 정리한 뒤 원문 대조를 통해 오탈자를 바로잡았으며, 판독되지 않은 글자들은 별도 표시해 구분했다. 인명과 지명 등에서 간혹 보이는 오자들은 논의 끝에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3월 1일자부터 소개한 각 매체 기사들은 고종의 장례식을 비롯한 당시 정황을 비교적 소상히 다루고 있다. 일본은 처음 3.1운동을 ‘소요와 폭동’으로 부각시켰으나, 이후 대응과 많은 논의를 통해 교묘하게 식민 지배 그물을 펴가려 했던 저들의 속내도 엿볼 수 있다.
사이토 총독 일행에 폭탄을 투척한 강우규 의사, 도쿄에서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여운형, 어렵게 탈주했지만 붙잡히고 만 의친왕 이강(李堈) 공(公) 등 익히 알려진 이들은 물론, 그보다 훨씬 많은 생소한 인물들의 숨가쁜 이야기들이 활자와 사진으로 당시를 증언한다.
사료집에는 3.1운동 당시 현장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기사들을 비롯해 조선총독부의 통치, 조선의 실상 등을 보여주는 여러 사건과 인물들이 소개되고 있다. 함께 수록된 사진들은 당시 사회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도 있다.
발간사에서 편저자이자 편찬위원장인 양현혜 교수(이화여대)는 “한용운이 ‘조선 독립의 서(書)’에서 웅변했듯이, 3.1운동은 한국 민족이 강요된 노예 상태에서 자유를 향해 자기를 일으킨 사건”이라며 “국권 상실의 상황 속에서 조선인들이 국가를 대신할 ‘민족’의 힘을 발견한 사건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양 교수는 “3.1운동을 통해 조선인들은 자기 자신을 역사 형성의 공동 주체인 ‘민족’으로 자각하게 됨으로써 민족적인 정체성과 주체성을 확보했다”며 “따라서 3.1운동은 그 이후 한민족 정체성과 주체성의 시원이자 전범이 됐고, 이후 역사에서 그 말이 울려 퍼지는 곳 어디에서나 한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증폭시키는 기능을 수행해 왔다”고 밝혔다.
그는 “계급·계층·종교·지역·성별의 장벽을 넘어 조선인이 하나 됐던 100년 전 3.1운동을, 이제 통일을 향한 민족의 새 길을 여는 민족 공동의 기억 자산으로 부활시켜야 할 때”라며 “이를 위해 반세기 동안 남과 북이 각각 축적한 3.1운동에 대한 연구 성과를 상호 존중하고 기억을 더 풍성하게 해, 민족 공동의 기억으로 복원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이를 위해 3.1운동에 대한 남과 북의 연구 성과뿐만 아니라 한민족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의 3.1운동 실태에 대한 연구 역시 집대성될 필요가 있다”며 “나아가 3.1운동에 대한 기초 자료 전수 조사 및 정리 작업이 시급히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4권에 있는 오사카마이니치신문 보도 내용을 보면, 3월 1일 일어난 조선 각지의 만세시위는 3월 3일부터 보도되기 시작했다. 6일에는 ‘내무성 검열을 마친 내용’이라는 글이 있어 보도통제 실상도 엿볼 수 있다. ‘일선동조론’에 입각해 조선 독립 요구의 부당성을 지적하는가 하면, 8일 석간에는 ‘폭동’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조선 측 피해 상황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표제는 일본 측의 적은 피해 상황을 큰 글씨로 강조해 보도하기도 했다. 11일자에는 ‘조선 왕실도 이러한 폭력적 소요에 반대한다’고 보도하면서 3.1운동과 조선 왕실을 단절시키고자 했다.
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 필라델피아, 일본에서의 만세시위 보도도 게재됐다. 특이한 것은, 염상섭이 일본 오사카 텐노지공원에서 오사카 학생과 노동자를 선동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모의한 것이 상세히 보도된 점이다. 이는 그동안 구체적 실상이 밝혀지지 않은 염상섭의 독립운동에 대한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경제를 중시하는 신문답게 3월 25·26일자에서 ‘조선폭동이 경제상 미치는 영향’을, 5월 7·9일자에는 ‘조선소요가 은행 업무에 미치는 영향’을 각각 게재하기도 했다. 이는 3.1운동이 이 시기 경제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고 한다.
제암리 사건은 최초 간략히 보도됐으나, 외무성 참사관 요시자와 겐기치의 시찰담이 ‘선교사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제목으로 나오면서 논조의 변화가 일어났다. 영국 총영사로부터 ‘조선인 2,500만을 모두 죽일 생각인가’라는 비난도 받는 등으로 인해, 참사관은 예정을 초과하며 사건을 조사했다. 현지 시찰을 토대로 한 그의 보고 기사는 조선에 대한 무단통치의 문제점을 일본인에게 자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총평에서 “오사카마이니치신문 보도 태도는 3.1운동을 어리석은 조선인들의 ‘소요’로 보고 일본의 선정에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태도로 보는 점에서 도쿄아사히신문(1권)보다 더 적대적이라 할 수 있다”며 “그러나 3.1운동 관련 기사의 양이 다른 어떤 신문보다 압도적으로 많고, 3.1운동의 경과와 해외 독립운동의 사실 관계 보도 및 3.1운동이 경제 방면에 미치는 영향 등에 관해 비교적 자세히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전했다.
1권: 1919년 3월 1일-12월 26일 실린 546편의 기사와 12점의 사진이 수록됐다.
-도쿄아사히신문은 일본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아사히신문’의 전신으로 1879년 오사카에서 창간됐으며, 1888년 창간된 도쿄아사히신문과 각각 서일본-동일본을 아우르는 양 체제의 신문이었다. 1940년 아사히신문으로 제호를 통일했고, 일본 신문사 중 가장 진보적 성향을 띤다.
2권: 세 신문에서 1919년 3-12월 실린 312편의 기사와 14점의 사진이 실려 있다.
-1890년 2월 창간된 고쿠민신문은 당시 정부계 대표적인 어용신문으로, 정권에 밀착된 모습을 보였다. 창간 당시와 달리 제국주의·국가주의 입장을 견지했다.
-1895년 11월 창간한 경제전문지 도요케이자이신보는 자유주의로 일관한 논조를 지녔으며, 여느 매체보다 돌출된 주장이 주목을 끌었다.
-후조신문은 근대 일본 대표적인 여성 언론매체로, 1900년 5월부터 약 43년간 발행된 주간지다. 신문을 통해 여성의 지위 향상을 꾀하며 여성들의 자각을 촉구했다.
3권: 1919년 3월부터1920년 2월에 실린 5대 잡지의 글 가운데 83편이 수록돼 있다. 사진은 없다. 일간지가 아닌 잡지여서 편수는 적지만 분량이 대체로 길며, 분석과 비평, 진단과 전망, 제언 등을 담은 글들이 많다. 3.1운동에 대해 일간지에서 볼 수 없는 논조를 보여 준다.
-중앙공론은 1887년 창간돼 현재까지도 발행되는 일본의 대표적인 종합잡지다. 불교도의 자기 정숙 및 금주 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반성회’에서 출발했다가 1899년 이름을 고치고 종교색이 사라졌다.
-교육시론은 1885년부터 1934년까지 일본에서 발행된 교육 관련 잡지로, 매달 3회 발간됐다. 50년간 1762호까지 발행됐으며,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사회급국가는 결사 ‘일광사’가 발행한 동인잡지로, 정치·경제·국제 문제 등의 시사평론을 중심으로 1913년부터 1941년까지 28년간 294호가 발간됐다.
-아등은 1919년 2월 정치·경제·교육·문예 비판의 책이라는 명분으로 발행됐다. 이 잡지에 실린 3.1운동 관련 기사는 하나밖에 확인되지 않는다.
-헌정은 1916년 가토 다카아키를 총재로 설립된 헌정회의 기관지다. 야당 기관지인 만큼 대부분 정부 시책에 비판적 논설을 싣고 있다. 3.1운동에 대해 정부 시책의 실패를 지적하고 식민지 지배 방식의 개선 및 철저한 진상조사 등을 요구했다.
4권: 1919년 3-12월 실린 3·1운동 및 당시 조선의 정황을 알려주는 885편의 기사와 32점의 사진이 실려 있다.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은 오사카일보의 제호를 계승해 1888년 11월 발행되기 시작했다. 1943년 도쿄마이니치신문과 통합하여 오늘날 마이니치신문에 이른다. 철저한 사실보도와 진보적 경향의 논조를 보이며, 3.1운동 관련 기사의 수와 양에서 다른 신문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5권: 1919년 3-12월 실린 3·1운동 및 당시 조선의 정황을 알려주는 598편의 기사와 12점의 사진이 실려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에도 시대 신문 판매상들이 목판으로 찍은 신문을 큰 소리로 ‘읽으면서(讀) 팔았던(賣)’ 데서 제호가 유래했다. 현재 일본에서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대표 전국 일간지다.
6권: 당시 대표 상업적 대중지인 두 신문의 1919년 3-12월 실린 612편의 기사와 25점의 사진이 실려 있다.
-요로즈초호는 스캔들 기사를 판매 전략으로 삼는 한편, 번역소설을 시작으로 문예란에 힘을 쏟았다. 이후 사회주의와 노동 문제에도 관심을 나타내며 사회비판성이 강한 신문으로 변신했다. 1930년 도쿄마이유신문(東京每夕新聞)에 합병됐다.
-미야코신문은 1884년 창간한 금일신문이 1888년 이름을 바꾼 것으로, 구미 소설의 번안 소개를 비롯해 참신한 기획물을 선보였다. 탐정 관련 기사나 연극 연예계 기사 등 예능 방면으로 특화된 성격을 보였다. 1942년 고쿠민신문과 합병해 도쿄신문으로 오늘날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