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 박양규 목사 (上)
성경 속 ‘아무개’들 보니, 제 삶에 훨씬 가깝게 닿아
성경의 영웅들 고민은 ‘순종’, 우리에겐 ‘선택’ 문제
인문학, 선별해 가이드할 큐레이터 같은 존재 필요
“많은 사람이 성경을 볼 때 소위 ‘영웅’들을 중심으로 보는 반면, 영웅 주변의 사람들은 ‘숫자’로 취급한다. 모세와 함께 했던 2백만 명의 숫자,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던 예수님 주변의 5천 명의 숫자, 베드로의 ‘집회’에서 회심한 3천 명의 숫자는 영웅들의 역량을 나타내는 지표에 불과하다.”
‘텍스트로 콘텍스트를 사는 사람들에게’를 부제로 삼은 책 <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 저자 박양규 목사는 성경 속 ‘영웅’들에서 그 주변의 보통 사람들로 시선을 옮기면, 새로운 관점이 열린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광야에 있던 2백만 명의 노마드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선을 맞출 수 있다면, 떡 한 조각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던 유대인 극빈자들과 공감할 수 있다면 성경 본문이 새롭게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시선을 열어줄 것이다.”
저자는 인문학적 시선으로 성경을 봄으로써, 주변 성도들을 단순한 숫자를 이루는 개체가 아니라 눈물과 감정과 삶의 애환을 가진 사람들로 여기며 한국교회가 변화될 수 있는 담론을 만들어 가자고 권면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인문학으로 성경 읽기’란, 인문학적 소양과 지식을 필요로 하는 성경 읽기가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한 존엄성의 관점으로 성경 속 우리와 비슷한 현실을 살아가는 ‘아무개’들과 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에서는 성경 속 12가지 공감 포인트를 찾아내고, 벤치마킹과 공감하기를 거쳐 독자들의 콘텍스트에서 텍스트의 자리를 찾아주고 있다. 여러 성경 명화들을 곁들여 이해에 도움을 주고, 존버, 멍청비용 등 오늘날의 언어로 생명력 있게 공감할 수 있도록 ‘공감사전’도 배치했다.
박양규 목사와의 인터뷰는 인문학과 책 이야기, 교회교육 이야기로 나눠 게재된다.
-인문학에 대해 들으면 들을수록, 도대체 인문학이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게 두루뭉술한 것도 인문학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다시 여쭤봅니다. ‘인문학을 배우고 싶은데, 5번만에 강의해줄 사람이 있느냐?’고요. 그런 분은 없습니다. 의미 자체가 너무 넓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몇 번 강의를 듣고 몇 권 책을 읽어서 되는 게 아니라, 삶에서 녹여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빠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쓴 계기가 있으신지요.
“어느 순간 보니, 인문학이 왕들이나 권력자나 강자들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빅토러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밑바닥 인생들이 주인공이고, 셰익스피어 작품에도 왕들이 나오지만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두 가지가 겹쳤습니다. 하나는 인문학을 보면서, 한 인간에 대해 고민할 시각이 열린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저는 보수 교단에 있으면서, 성경이 왜 현실에 와 닿지 않을까 생각하다 이것이 구조적 문제임을 느끼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보는 소위 신앙의 영웅들에게는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아무개에게는 직접 나타나 말씀하시진 않으십니다. 이를 기억하면서, 성경에 나오지만 우리와 비슷한 이름 모를 한 사람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기 시작하니, 관점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적 고민에 더해, 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 성경에서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고민하다 보니, 책으로 이어졌습니다.”
-성경의 주인공도 고민은 했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믿음의 주인공들을 보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단 성경 속 이름 없는 아무개들을 보니, 제 삶에 훨씬 가깝게 와 닿았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이 고민했던 것은 여러가지 중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얼마나 많이 고민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선택은 이미 하나님께서 하셨고, 아브라함에게는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 하는 ‘순종’의 문제가 남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A·B·C라는 직장이 있다면 ‘어느 회사로 가라’ 하고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직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고민은 ‘선택’, 주인공의 고민은 ‘순종’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유학을 갈 때, 아무런 보장도 없이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확신만 있다면 굶어 죽어도 하겠는데, 제 욕심인지 하나님 뜻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습니다. 이런 확신의 문제가 늘 생기지 않습니까.
대형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부교역자로 있었는데, 나오겠다고 결심했을 때 주변 사람들 모두 ‘있으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이에 대한 하나님의 확신을 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것처럼 나타나셔서 ‘떠나는 게 맞다’고 한 번만 해 주시면 힘들지만 몇 년이라도 견디겠는데, 제 객기가 아닌가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웃음). 우리가 하는 것이 이런 고민들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선택에 있어, 대부분의 문제는 하나님 뜻과 성공주의나 번영신학 사이의 고민이 아닐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대부분의 선택은 안정과 성공 여부가 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이번의 제 선택은 ‘옳음’의 측면이 강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주셨으면 책임져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했던 고민도 이런 것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일 아침에 내려줄테니, 내일 아침에 나가서 주우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오늘 움켜쥐고 있어야 마음에 안정을 얻습니다.
제 경우 교회 부교역자로 계속 있었다면 1년이 예측한 대로 돌아갈텐데, 제가 그런 예측 속에서만 살아간다면 제 안에 하나님께서 계실 공간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목회자로 설교를 한다면, 성도들이 설교에 공감할 수 있을까? 성도들은 목회자들보다 훨씬 절박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데, 기도하라 묵상하라 하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 소리처럼 들릴까 싶었습니다. 그런 성도들과 비슷한 경험을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책에서 성경을 큐티처럼 읽기보다 문맥으로 읽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성경은 쓰여질 때 분명한 독자가 있었고, 어떠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목적이 필요한 상황이 있을텐데, 성경 속에서 그러한 고려를 하지 않고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될 것 같은 한 구절만 발췌해서 위안을 삼으려고 하는 부적처럼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송구영신예배마다 하는 ‘말씀 뽑기’ 같은 것이 문제가 있습니다. 적어도 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어떤 상황의 독자를 위해서 썼는지 정도만 생각해도, 그런 부작용들이 많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말씀을 들 수 있습니다. 굉장히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지만, 바울은 우리가 인용할 때 쓰는 그런 의미로 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감옥에 있던 바울이 하나님께서 내게 능력을 주신다면, 어떠한 환경에 있더라도 하나님이 능력 주신다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비록 옥중에 있지만, 능력 주시니 다 감당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앞 구절들을 봐도 가난한 곳이든 부유한 곳이든 있을 수 있다고 나옵니다.
제국의 변방에 있던 빌립보 교인들이 그 구절을 읽고 얼마나 큰 위로를 얻었겠습니까. 그런 맥락 없이 ‘어떤 스포츠 선수가 이 구절을 외쳤더니 금메달을 땄더라’고 합니다. 제가 판단할 수는 없지만, 바울이 이렇게 하라고 그 구절을 썼을까 생각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책과 이런 말씀들이, 성경이 현실에 와 닿지 않았던 이유에 대한 일종의 해답을 얻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적어도 그런 해답을 얻었습니다. 저도 이전까지는 성경에서 영웅들의 모습에만 주목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들러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기드온의 300용사’의 300명 중 한 사람처럼, 숫자 속에 포함돼 있는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 있었는지, 그들이 왜 영웅을 따라갔는지 하는 것에서 큰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 그들의 선택이 제가 이렇게 결단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줬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20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 그냥 있었다면 가장 안전하게 미래가 보장되고 잘 살았을 것입니다. 최근 연구들을 보면,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인들에게 노역을 강제로 채찍질하면서 시킨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정당한 보수를 지급했습니다. 삶이 절규할 정도의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안정된 것이었습니다.
답도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불러내신 이유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고 하는 것보다, 그들과 함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안정을 위해 하나님의 계시보다 내 예측대로 같은 조건을 움켜쥐려 합니다. 그런 조건들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문학도 여러 종류가 있고, 크리스천들에게 유익한 쪽으로 접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이드해줄 수 있는 큐레이터 같은 존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요즘은 누가 많이 아느냐보다, 누가 선별해서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느냐 하는 큐레이팅이 굉장히 중요해졌습니다.
플로베르 소설 <마담 보바리>에는 간통이 나와 고발당하고 톨스토이 소설 <안나 까레니나>에도 불륜이 있지만, 어떠한 가치가 있길래 읽혀야 하는지를 선별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없다 보니, 어렸을 때 기독교인들에게 읽으라고 하는 책은 <천로역정>이 전부이고, 나머지 책들은 ‘인본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습니다.
물론 인본주의적인 책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책들이 있습니다. 그런 몇몇 작품들 때문에 인문학 서적들이 모두 위험하다고 치부한다면, 우리는 온실 속의 화초가 될 뿐입니다. 그런 부분들을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이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요.”
-말씀처럼 인문학 서적들을 ‘인본주의’라며 금서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인문학 서적이 인본주의라면, 설교집 외에 자기계발서나 보편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서적들을 과연 몇 권이나 읽으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저는 이렇게 본격적으로 독서를 한지 3년 정도 됐는데, 전에는 역사가 전공이라 역사적으로 풀고자 했을 뿐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교인들의 수준이 이미 많이 높아졌는데, 그들을 아우를 수 있는 더 큰 그릇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스어로 예술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것뿐 아니라, 대장장이가 칼이나 낫을 만드는 것도 예술로 봤던 것입니다.
로마 시대부터 우리가 아는 예술과 기술 등의 구분이 생겨납니다. 시민의 덕목을 쌓기 위한 것이 기술과 분리되는 인문학인데, 고전문학도 몇 권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인문학을 논하다 보면 인본주의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제대로 분별할 수만 있다면, 인본주의적 서적들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창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벽을 치다 보니, 세상과 단절되기 시작됐습니다.
온실 속에 있기보다, 소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상적 배경과 토양을 먼저 튼실하게 갖춘다면, 어떤 책을 읽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면역력을 길러야 합니다.
요즘은 인문학 열풍을 넘어 사회정의나 공공성이 화두입니다. 중세 시대만 해도, 인문학은 ‘기예학’이라 해서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을 배우기 전 먼저 배워야 했습니다. 신학을 논하기에 앞서, 인문학이 기본으로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인문학 자체를 접하지 않고 신학을 하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하면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인들은 이미 인문학을 섭렵하면서 발전하고 있는데, 목회자들은 오로지 신학이라는 성벽에 갇혀 있어 소통이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