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인문학 서적’ 나란히 펴낸 김도인·이정일·박양규 목사 (1)
김도인 목사 “이미 영성 있는 목회자들, 최고 지성인 되어야”
이정일 목사 “메타포로 설교할 뿐, ‘리얼리티’ 정착하지 못해”
박양규 목사 “인문학, 예수님처럼 ‘한 사람’에 대한 공감에서”
최근 기독 출판계에서 ‘인문학’을 강조하는 서적을 펴낸 목회자들 3명이 뭉쳤다. 지난해 본지 ‘올해의 책’으로 뽑혔던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의 이정일 교수(신한대), <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의 박양규 목사(교회교육연구소), <설교는 인문학이다>, <나만의 설교를 만드는 글쓰기 특강> 등을 쓴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다.
이들 ‘삼총사’는 정기적으로 만나 인문학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한국교회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본지는 이들 3명과 ‘합석’해, 인문학과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 문학 등에 대해 나눈 대담을 청취했다. 다음은 그 내용.
-먼저, 서로의 저서에 대한 소감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박양규 목사: 이정일 목사님 책을 보면서, 뭉뚱그렸던 적용들이 선명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애용해야 하는 책입니다. 교인들의 상처와 아픔을 ‘기도하라’로 끝내지 않고, 치유할 수 있는 너무너무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도인 목사님 저서의 경우,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이 컨설팅을 받아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교에서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글쓰기의 논리적 구조와 설교의 진행 등을 이렇게 설명해 주시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분은 이 시대에 보석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김도인 목사: 이정일 목사님 책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 시대 신학함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 인문학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야기를 다루는 문학이 중요합니다. 문학은 적용 아니겠습니까.
저는 설교를 신학도 설교학도 아닌,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신학이든 설교학이든 아무리 외쳐도, 와닿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성도들 삶에 적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아, 내가 찾던 내용’이라고 느꼈습니다. 한 챕터를 보자마자 너무 좋았고, 저희 아트설교연구원 회원들과 함께 읽을 때도 반응이 너무 좋았습니다. 신앙과 삶의 괴리를 묶어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인문학이 신학을 전달하는 일종의 ‘다리’라면, 그걸 잘 아우를 수 있는 것이 문학입니다. 회원들 반응이 폭발적이었는데, 기독교 책에서 처음 있는 반응이었습니다. 유명한 신학자들 책도 ‘좋네’ 이 정도였는데, 인문학의 중요성을 아는 이들에게는 너무 좋았습니다. 책을 잘 안 읽는 제 아내도 가져가더니 안 돌려줍니다(웃음). 사변적 설교와 신앙생활에서 길잡이를 할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박양규 목사님 책은 인문학에서 한 단계 나아가, 미술까지 다룹니다. 평소 인문학을 넘어 예술로 나가야 한다고 했는데, 바로 제가 찾던 책입니다. ‘저보다 앞서가신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성경과 예술을 잘 결합해 우리 삶으로까지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이 시대를 잘 담아낼 수 있고, 신학에만 빠져 있는 설교자들에게 좋은 도전을 주는 책입니다.
이정일 목사: 제가 책을 쓰고 싶었던 이유가 여러 가지였지만, 그 중 하나는 한국교회에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찾아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반응이 올 것이고, 생각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렇게 두 분 목사님을 만났는데, 코드가 잘 맞습니다.
두 분의 책은 미술과 설교라는 구체적인 것으로 선명하게 이야기해 주십니다. 한국교회는 어찌 보면 ‘신학 과잉’입니다. 성경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가르치는데, 그것은 삶을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메타포’로 설교할 뿐, ‘리얼리티’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 안에서 자라며 배운 멋지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가치관을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을까요? 인문학만큼 좋은 도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저는 문학을 택했습니다. 박 목사님은 미술, 김 목사님은 글쓰기를 택하셨지요. 서로 보완하고 배울 수 있는 좋은 관계입니다.
-세 분이 작은 모임을 만드신 걸로 아는데요.
김도인 목사: 아트인문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셋만의 작은 모임인데, 자주 만나서 신학으로 꽉 차 있는 설교자들에게 인문학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지 깨우치는 도구로 쓰임받고 싶습니다.
이정일 목사: 한국교회는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먹이지 않고, 복음을 제시합니다. 이게 참 아이러니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배고프고 목마른 이들을 먼저 먹인 다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지쳐 쓰러진 엘리야에게도, 하나님은 일단 육신을 회복시키신 다음 말씀을 들으러 시내산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말씀 먼저, 복음 먼저입니다.
교회 바깥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바깥 사람들이 너무 목말라 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들은 문화라는 도구로 이야기하면, 4시간도 듣습니다. 그런데 앉자마자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복음을 제시하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걸 보면, 무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사도 나누고 서로의 필요도 안 다음,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하찮은 물건 하나를 살 때도 후기를 꼼꼼히 읽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에 대한 후기를 보면, ‘복음’을 살까요? 아무리 비싸고 좋아도, 심지어 공짜로 준다 해도 사겠습니까? 그렇게 무례하게 대하는데 말입니다.
이는 인문학적 교육이 안 돼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귀한 만큼, 상대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듣는지도 중요한데, 균형잡힌 시각이 약하고 어렸을 때 그런 태도를 배우지 못한 탓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김도인 목사: 저도 예전에는 복음만 제시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다 도망갔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바뀐 게 있는데, 그런 말 대신 관계만 맺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하면, 그들이 먼저 물어봅니다. ‘뭐 하시는 분이세요?’라고요. 이전에는 먼저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왜 그런 말씀 하세요?’ 하고 피해가던 사람들입니다.
삶과 삶의 만남, 인간과 인간의 접촉입니다. 말씀하셨듯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먹이면 자연히 공감대가 형성되고, 서로 신뢰가 형성될 때 관심도 갖게 됩니다. 이제는 다시 도전해 보려는 마음도 생깁니다.
한 청년을 만나고 있는데, 아무 이야기도 안 합니다. 목사인 걸 알고 있습니다. 그거면 된 것 아닌가요.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고민이 뭐니? 내가 도움 줄 게 있을까?’ 하고 물어봅니다. 그럼 상대도 ‘필요한 것 있느냐?’고 묻습니다.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해집니다. 물론 시간은 걸립니다.
한국교회가 급성장하면서 오는 부작용이 컸습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좀 늦더라도, 숫자가 적더라도, 진짜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제 삶을 바꿨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숫자 늘리기에 바빴습니다. 지금은 숫자보다, 한 명에 집중합니다. 신학의 ‘과잉’이라고 하셨는데, ‘폭발’하고 있습니다. 젊은 친구들이 10년간 신학을 공부했으면, 이후부터는 인문학을 같이 해야 합니다.
박양규 목사: 두 분이 귀한 말씀을 많이 해 주셨네요.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에는 두 부류의 성직자들이 나옵니다. 한 부류는 포교를 열심히 해서 성과를 냅니다. 이들에게 사람들은 성과를 올리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의 애환을 듣고 공감합니다. 주인공은 성과가 없어서 ‘잘못 살았나’ 고민하지만, 그 자세 속에서 천국의 열쇠가 발휘된다는 소설입니다. ‘제 인생의 책’입니다.
지금은 왜 이런 분을 찾기 힘들까요?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한 사람에 대한 공감에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가 어떻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어떻고 하는 지식의 향연이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한 정신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정신으로 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 목사님은 인문학뿐 아니라 경제경영서와 자기계발서도 같이 보시는데요.
김도인 목사: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읽었습니다. 다 모르니까, 알기 위해 뭐든 읽기 시작했습니다. 철학 책을 처음 보는데, 새까맸습니다(웃음). 한 2-3년 읽다 보니, 조금씩 이해가 됐습니다. 인문학 책도 잘 몰랐지만, 읽다 보니 이해가 되고 사회 현상을 이야기할 때도 조금씩 이해가 쌓였습니다.
모두가 기본 소양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어야 삽니다’ 오직 하나만 알다 보니, 가정에서도 매일 부딪쳤습니다. 제게는 복음만 있다 보니, 교양을 찾는 아내와 늘 부딪쳤습니다. 신학은 아는데, 교양이 없었던 것입니다. 책을 통해 사람과 세상이 이해되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이 나왔습니다.
‘목사가 성경 읽고 기도하면 되는 것 아냐?’ 했는데, 책을 통해 저 자신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내와 아들이 인정합니다. 목회자들은 최고의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영성은 이미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균형감각을 쌓아야 합니다.
신학·신앙 서적도 당연히 도움이 되지만, 사고가 굳어질 수 있습니다. 신학교라면 교양이 가장 높아야 하는데, 가장 낮지 않나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박양규 목사 “기독교 소설의 가장 큰 문제, 경쟁력이 없다는 것”
이정일 목사 “교회 안에선 뜨겁지만, 필드 밖으로 안 나가려 해”
김도인 목사 “세상 역행해야 하는데… 주식·부동산까지 따라가”
-‘기독교 문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정일 목사: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나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쿠오 바디스>,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 등 잘 쓴 책들이 있지만, 그 숫자가 너무 적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적 메시지가 갖고 있는 한계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런 말을 할 거야’를 알고 읽으면, 긴장을 하게 됩니다. 일반 책들은 그런 것들이 드러나지 않아서 긴장하지 않습니다. 시작부터 ‘기독교 메시지를 들을거야’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다 보니, 작품이 가진 신비스러움이나 설레임이 덜합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참 드문 케이스입니다.
기독교를 표방한 책들이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어려운 것은, 내가 가진 정보를 다 준 상태로 시작해서 설레게 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너를 사랑할거야’ 마음먹고 달려들면, 상대가 긴장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연히 사랑에 빠집니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적 내용이더라도, 굳이 이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 일반 서점에서 나올 정도로 눈높이를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기독교 책을 냈지만, 앞으로는 일반 출판물을 많이 쓰고자 합니다. 기독교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지만 기독교적 기반을 탄탄히 하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 작가들이 세상 속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 역할 아니겠습니까.
내 영역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동적이 되기 쉽습니다. 영화 <시스터 액트>에서 수도원을 지키고 있는 철창 문을 뜯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악(惡)이 들어오는 것을 막은 것이지만, 동시에 내 생각 속에 갇힌 것입니다. 기독교의 생각이 너무 귀하고 보배로운데, 그것을 붙들고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만, 크리스천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는데, 좁은 울타리만 지키면 되겠습니까. 조금 넓어져야 합니다.
문학을 접할 때도 인간관계를 다루는 소설도 읽지만, SF 작품도 읽습니다. 우리 시야가 은하계 넘어서까지 닿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곳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장소입니다. 깊은 심층도 들어가 보고 하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도 빛나는 문장들을 봅니다. 그 작가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선물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편재하심(遍在, omnipresence)을 작가들의 글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편 가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 아니겠습니까. 영역을 확대시켜야 합니다.
우리 사고의 범위도 확장시켜야 합니다. 우리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는 재앙처럼 보여도, 이것을 통해 삶이 회복되기도 합니다. 산불이 일어나면 큰일 나지만, 그동안 움츠렸던 식물들이 햇빛을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합니다.
특히 10-20대를 공략할 수 있는 것은 웹소설과 웹툰뿐입니다. 아이들이 그나마 교회 쪽으로 발이라도 대고 있게 하려면, 이야기의 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흥미가 없으면 단번에 발을 끊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재미없으면 바로 이야기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박양규 목사: 기독교 소설의 가장 큰 문제는 경쟁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과거 옥스퍼드 대학교 학생들 중 목요일 아침 10시마다 매주 잉클링스(Inklings)라는 모임을 했습니다. ‘이글앤차일드(Eagle and Child)라는 카페에 모여 지난 1주일 동안 썼던 작품들을 낭독하며 서로 냉철하게 비판했습니다. 거기서 나온 작품들이 톨킨의 <반지의 제왕>,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입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 경쟁력을 갖추면서 표방하는 가치가 같은 모임들이 있다면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경쟁력이 없다 보니, 고민을 해야 합니다.
이정일 목사: 김은국의 <순교자>가 뛰어난 작품이긴 하지만, 내면이 섬세하지 못합니다. 비슷한 소재를 다루지만 <침묵>이 임팩트가 강한 것은, 갈등하는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어렵습니다.
당시 시대를 다뤘던 80여쪽의 논문을 읽으면서, 저였다면 어떻게 견뎠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핍박을 견뎌낸 것은 어촌에 사는 일자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족의 죽음을 보면서도 감내했습니다.
반면 복음을 위해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훈련받은 사람들은 대다수가 견디지 못하고 굴복합니다. <침묵>에서도 세바스찬뿐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 선교사들이 모두 실패하지요. 왜 그랬을까 하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다들 뜨겁습니다. 하지만 아군이 한 명도 없는 필드에 나가 외로이 서 있으면, 굉장히 힘듭니다. 다들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는 열심히 합니다. 다만 필드 바깥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이런 문학 작품들을 통해서 이런 부분들을 사전 점검하는 것입니다.
책에도 썼지만, 아프리카 작품을 읽고 가르치면서 그곳의 절절한 절망과 간절함을 느꼈습니다. 한국은 취업과 내집 마련을 위해 애쓰지만, 거기에선 ‘오늘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소년(녀)병들의 처절한 이야기를 다룬 국제 학술논문을 찾아서 보는데, 제대로 읽기 힘들었습니다.
현실이 너무 힘든데, 우리는 그런 걸 잘 모릅니다. 한국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하다가, ‘할렐루야’ 하면서 죽어가는 것이 아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이런 풍요를 주셨을까요. 누군가와 나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지식과 은혜를 누군가와 나눠야 하는데, 우리는 쌓기만 합니다. 건물 올리고 좋은 시설을 만들 생각만 합니다. 과연 예수님이 그것을 보고 행복해 하실까요?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시대에 오셔서 똑똑한 친구들과 복음을 증거하셨다면, 온라인에서 임팩트가 얼마나 강했을까요? 왜 예수님은 가장 어둡고 힘든 시기에 오셔서 그 길을 걸으셨을까요? 그런 길에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을 읽을 때, 그런 생각들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학에 젖어있고 선민사상에 빠져 있던 바리새인들 틈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던 사람들을 찾아가 안아주셨습니다. 그런 인간다움이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김도인 목사: 기독교 내에서는 투사 같은데, 바깥에 가면 금방 동화돼 버립니다. 요즘 기독교인들도 주식과 부동산 다 따라하지 않습니까? 그런 이들에게는 성경도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한 편의 자기계발서 같아 보입니다.
삶에서 고통과 힘듦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드러내야 하는데,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삶의 목적인 것처럼 치부하는 기독교 문화가 있습니다. 세상 문화에 역행해야 하는데, 따라가고 있습니다. 인문학적 통찰이 없다면, 지금 가는 길이 옳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예방만 하다가 백신을 놓쳤듯, 기독교인들에게 인문학적 접근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이정일 목사: 목회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언제 열리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동을 받으면 열리는데, 그 감동이 인위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설교는 인위적 감동일 때가 많지요. 자연스러운 감동을 줄 때, 인간다운 면을 보았을 때 감동합니다.
TV 관찰 예능에서 탑 연예인들이 사소한 것을 못해서 헤매는데, 오히려 그에게 애정이 생깁니다. ‘아, 이 그도 인간이구나’. 실수를 통해 나와 같은 사람임을 느끼면서 애정을 줍니다. 교회는 그런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늘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려 합니다. 예수님도 힘드실 때가 많았고, 이를 제자들과 거리낌없이 공유하셨습니다. 그런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