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으로도 무너지지 않던 인류 문명, 조그만 바이러스에…
죽음, 질병 통해 개인 마음 속에 들어와 경험
죽음, 직접 경험 못해도 자기 일로 비치게 돼
죽음 통해 황폐화 개인 응시…고통이자 은총
이어령 박사가 “지금까지 우리는 죽음을 추상적이고 멀리 있는 존재로 여겼는데,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22일 공개된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죽음은 그저 우리 안에 갇힌 사자, 철창 안에 갇힌 호랑이에 불과했다”며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죽는다고 생각은 했지만, 우리 안에 갇혀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일종의 ‘판단 중지’”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런데 저 사자와 호랑이, 즉 죽음이 길거리로 뛰어나왔다. 죽음의 공포, 굶주린 맹수의 습격을 한두 사람이 아니라 온 마을, 온 도시, 온 인류가 깨닫기 시작했다”며 “우리가 발 딛고 섰던 인류의 문화·문명이, 원폭(原爆)으로도 무너지지 않던 문명·문화가, 조그마한 바이러스(自然)한테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령 박사는 “죽음 앞에 생(生)의 기원(origin)마저 힘을 잃어버렸다. 진화론자의 주장처럼 호모 사피엔스가 원숭이 혹은 침팬지로부터 나왔든 아니든, 하나님이 창세기를 통해 인류 창조의 비밀을 밝히신 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오늘날 이 무시무시한 사자가 날뛰는 아비규환 속에서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라며 “민주주의가 가르쳐온 ‘자유와 인권, 프라이버시의 보장’ 같은 생명의 권리가 침해를 받아도, 말 한 마디 못하고 복종하는 상황을 가져온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박사는 “하루 수천 명이 죽고 며칠 사이 100만명이 확진 판정을 받으며 화장터에 흰 천으로 감싼, 코로나19로 인해 죽은 시체가 장작더미에 쌓여 있는 절망적 죽음을 생각해 보라”며 “시신을 소각하는 연기가 온 천지로 가득한 그런 죽음….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서양의 경우 확진자 급증으로 의료체계가 붕괴됐다. 병원 화장실에 시신이 방치돼 있고, 환자들이 배설물 사이에 누워 있었다. 시신과 환자, 배설물 등이 널브러진 처참한 참상을 떠올려 보라”고 촉구했다.
그는 “죽음이라는 것이 바이러스, 질병을 통해 개개인 마음 속에 들어와 경험되고, 직접 경험을 못해도 죽음이 자기 일로 비치기 시작했다”며 “죽음을 통해 황폐화된 개인을 응시하게 된 것”이라고 풀이했다.
‘어쩌면 코로나19가 은총일 수도 있겠다’는 질문에는 “바쁜 일상 속에 살다 처음 ‘격리’를 경험하게 된. 넘쳐나는 시간과 마주하지만, 고문과 같다”며 “그 동안 숨어 있던 선한 예수님 얼굴을 찾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코로나19가 누구에게는 은총, 누구에게는 고통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령 박사는 “어쩌면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 박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예수님의 미소를 발견할 수 있었을 테고, 코로나19로 격리된 공간에서 외롭게 죽어갈 때 아마 예수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마스크는 나를 병균에서 보호하지만, 다른 이에게 병균을 안 옮기는 이타적 역할도 한다. 마스크를 쓰면서 내 얼굴이 감춰지는 게 아니라, 드러나 보인다. 그게 페르소나, 가면을 쓰면서 내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제자들이 많은데, 그렇게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는지 요즘에야 알게 됐다. 늙은 제자들이 마스크를 쓰고 나를 찾아왔다. 마스크를 쓰니 주름이 하나도 안 보이더라”며 “눈만 보이는데, 눈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느꼈다. 새롭게, 그동안 보지 못했던 눈을 보게 됐다. 그제야 참된 얼굴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전했다.
또 “여태껏 한국인의 종교는 서구인과 달랐다. 종교가 파국적이고 부딪히는 것, 깨지는 것, 부서지는 역사를 거쳐 온 면에서 치열하지 않았다”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와 죽음으로 종교를 증거했으나, 일반적인 신앙인들은 믿음이 점잖다고 할까, 치열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동양사상은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그리스도교와 다르다. 공자는 생김새부터 온화하고, 제자들도 배신 없이 편안하게 주군 모시듯 했다”며 “예수님 제자들은 배신을 밥 먹듯 했다. 오병이어와 만선, 그리고 병든 환자를 싹 낫게 하는 기적을 보여줬지만, 자기 살려고 배신했다. 공자의 제자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식한 어부들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서양은 아주 드라마틱한 신앙이지만, 동양의 믿음은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기독교는 세기의 승자가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창에 찔려 피를 흘리는 고통스러운 신앙”이라며 “타 종교와 비교하자는 건 아니고, 상징이 그렇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17세기 런던 시민이 흑사병을 겪으며 위생 개념이 등장했고, 결국 산업혁명으로 이어진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며 “1665년 무렵 대역(大疫), 즉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영국 런던은 아수라장이 됐다. 런던 인구 46만명 가운데 약 10만명이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이어령 박사는 “끔찍한 비극을 겪고, 런던 시민들은 목재 대신 돌과 벽돌로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쥐가 더는 창궐하지 못하게 콘크리트와 석조 건물이 등장하면서, 동양은 목조, 서양은 석조라는 개념이 흑사병 이후 생겨났다”며 “장원의 농부들이 죽으면 땅이 아무리 많아도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니, (농부의) 몸값이 올라갔다”고 전했다.
이 박사는 “산업혁명기 발생한 사회 문제 중에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건강 문제도 있었다”며 “노동자의 수명이 비위생적 전염병과 관련돼 있다는 현실을 발견했고,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도 그제야 응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또 “성직자에 의한 성경의 독점, 진리의 독점에서 벗어났다. 가내수공업, 중소 상공업이 길드를 통해 협력하듯 소수의 선(善)이 아닌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사회개혁, 종교개혁, 나아가 산업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며 “흑사병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들인 셈”이라고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