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교회 성장의 ‘아이콘’, 하늘로 떠나다
가난한 사춘기, 6.25전쟁으로 부산 피난살이
폐결핵으로 사망 선고, 복음 접한 뒤 치유 경험
신학교에서 최자실 목사 만나 천막 교회 개척
여의도로 옮긴 뒤 1981년 성도 20만명 넘어서
제3세계 선교 박차, 전 세계 120바퀴 돌며 전도
가장 유명한 한국인이자 목사였던 조용기 목사
2021년 9월 14일 오전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故 조용기 목사는 1936년 2월 14일 경남 울산 울주군에서 부친 조두천 장로와 모친 김복선 권사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한학과 전통적인 종교문화에 익숙한 가정에서 자랐다. 어수선한 해방 정국이 이어지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부친이 낙선한 뒤 가난한 사춘기를 보냈고, 곧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부산공고에 입학했으며, 학교에 주둔해 있던 미군 부대에서 학교장과 미군 부대장 사이의 통역을 맡으면서 영어 실력을 키우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폐결핵으로 사망선고를 받고 병상에서 누나의 친구로부터 처음 복음을 접한 뒤 부산에서 미국 오순절교단인 ‘하나님의성회(Assemblies of God)’ 소속 켄 타이스(Kenneth Tice) 선교사를 만나 집회 통역을 하면서 회심을 하게 된다.
이후 폐결핵이 치유되는 신유의 경험을 하면서 신학교 입학을 결심했다. 1956년 9월, 20세 때 하나님의성회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하여 후에 장모이자 목회 동역자가 되는 최자실 목사와 만났다.
두 사람은 195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5월 18일 천막 교회를 개척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시작이었다.
그 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위상은 국내를 넘어 세계에 알려졌고, 1973년 9월 제10차 세계 오순절 대회를 한국에서 주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아시아 국가가 주최한 첫 오순절 세계 대회였다.
교회를 여의도로 이전한 뒤 성장세는 더욱 가팔라져, 1979년 10만 명, 1981년에 20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1976년에는 세계교회성장기구 CGI(Church Growth International)를 설립해 세계 교회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당시 세계에서 성장하는 교회들의 대부분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용기 목사는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하나님의성회 총재를 역임하면서 제3세계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에서 대규모 성회를 인도하고, 강력한 성령운동이 전개됐다. 구소련 붕괴 후인 1992년 6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성회를 가졌고, 1997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가진 성회에서는 150만 명이 운집, 두 나라에서 모두 개신교 사상 최대의 집회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렇게 조 목사는 1975년부터 2019년까지 71개국에서 최소 370차례 부흥회를 인도했고, 비행 여정을 보면 지구를 120바퀴 이동한 셈이었다.
조 목사는 국내에서 민족복음화운동에도 헌신하며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을 다니며 성회를 인도했다. 특히 사회 구원을 위해 1988년 일간지 국민일보를 설립해 기독교의 목소리를 우리 사회에 전하기 시작했으며, 1999년 비정부기구(NGO)인 사단법인 선한사람들(현재 굿피플)을 세워 국내 및 해외에서 인권 환경 보건 및 아동복지 등의 증진에 앞장섰다. 그 공로로 1982년 대통령 표창(홀트학교 건립기금 및 장애아동 복지사업)을 수상했다.
또 1994년에는 대한적십자사부터 ‘적십자헌혈유공자 금장’, 1996년에는 심장병어린이 무료시술 지원 및 소년소녀가장 돕기 헌신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보건복지부)’을 받았다.
2005년에 미국 뉴욕기독교교회협의회로부터 ‘더 패밀리 오브 맨 메달리온’을 수상하고, 2007년 미 연방의회에서 ‘자랑스런 한국인 인증서’도 받았으며, 2009년에는 캄보디아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조용기 목사는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4차원의 영적세계> 등 다수의 저서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