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모 작가 “공산주의, 성적 타락·순결 등 개인적 가치 고려 않아”
신앙 깊던 여대생 언니, 데모하면서 세 번이나 임신
그들에게 여성은, 공평하게 분배해야 할 영역일 뿐
남녀평등·여성인권 외치던 남편은 가부장적이었다
‘데모하던 그 언니는’이라는 제목으로 게시된 한 프리랜서 여성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의 페이스북 글의 공유가 이어지고 있다. 586 운동권과 그들의 ‘성적 자기결정권’ 주장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
이 글에서 박 작가는 “동네 교회에 예쁜 여대생이 있었다. 신촌 모 여대에 재학 중이었고, 교회는 물론 동네 남학생들이 거의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언니를 좋아했다”며 “신앙심이 깊었고, 얼굴보다 마음이 더 고운 사람이었다. 언니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기 시작한 건, 그녀가 운동권 학생들과 몰려다니며 사회주의 사상에 빠졌을 때부터였다”고 운을 뗐다.
작가는 “언니는 운동권 남학생들과 MT 가는 걸 매번 망설였다. 운동권은 ‘사상이념 의식화 교육’시 성적 수치심을 장애물로 규정하고, 여성 동지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교육했다”며 “말이 ‘성적 자기결정권’이지, 남자들의 성 유린, 성 유희, 성 착취, 무상 섹스를 위한 허울 좋은 명분이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또 “언니 몸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났다. ‘군부독재 전두환 물러가라’고 쓰인 머리띠가 바지주머니에 있었고, 가방 안엔 ‘마르크스 자본론’, ‘경마장 가는 길’이 들어 있었다”며 “사복 경찰에 쫓긴다 해서 친구 집에 피신시켜준 적도 있었다. 언니를 친구 집에 두고 나서는데 ‘집안이 어려우니 열심히 공부해 버젓한 직장을 가져야 하는데, 장녀인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지, 너는 데모하지 마라’ 혼잣말을 탄식하든 내뱉었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열심히 데모하던 언니가 어느 날 학교를 그만두었다. 교회에도 나오지 않았다. 언니 친구 이야기로는, 임신해서 그만 두었다는 것”이라며 “임신 소식만 세 번 들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언니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기독교에서 집단 혼숙, 간음, 낙태가 죄인 줄 알았을텐데…. 공산주의 질서에서 성적 타락이나 혼란, 순결 따위는 개인적 가치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성은, 여성의 몸뚱이는 공평하게 분배하고 나눠야 할 영역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박 작가는 “1년 후였을까, 언니가 결혼한다고 연락이 왔다. (동네 교회 아닌) 같은 교회 다니는 성가대 운동권 선배랑 결혼했다”며 “결혼식장에서 본 언니 얼굴은 예전의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그 모습이 아니었다. 지쳐 있기도 하고 표독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묘한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작가는 “결혼 후 언니는 시부모를 모시고 두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잘 살았다. 언니가 이혼했다는 소식은 한참 후 언니 존재조차 잊고 있을 무렵에 들려왔다”며 “남녀 평등과 여성 인권을 외치던 남편은 가부장적이었고, 언니의 과거를 들먹이며 폭력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학생 시절 임신을 세 번이나 한 건 모두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또 “언니가 이혼을 요구했지만 묵살당했고, 손목을 긋는 자살 소동을 벌인 후에야 이혼에 동의했다. 남편은 아이들을 볼 수 없다는 조건을 걸고 이혼을 허락했다”며 “언니는 이혼 후 혼자 살다 병을 얻어 죽었다”고 했다.
끝으로 “그녀의 인생에서 전두환이 없었다면 행복했을까. 교회에 안 다녔다면, 사회주의 세상이 됐으면 행복했을까. 아니면 지독한 가난이 문제였을까”라며 “요즘 전두환 전 대통령이 회자되니 소설 같은 언니의 부박한 삶이 떠올랐다. 누구처럼 잘 버텨서 시장 자리, 장관 자리 하나쯤 꿰차지 그랬어. 견뎠으면, 전두환 때보다 지금 삶이 나았을텐데”라고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