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수도사 서유기 + 그리스도교 동유기》 곽계일 교수 (上)
한국 그리스도인들 역사관, 로마 문명권이 중심
‘동방 기독교’ 낯설다? 우리가 속한 전통의 차이
초대교회, 기독론 위격과 속성 따라 종류 나뉘어
이단인가 정통인가? 포용과 배척의 경계선 따라
13세기, 실존했던 몽골인 그리스도인 수도사 2인이 있었다. 스승 사우마와 제자 마르코스는 원나라 수도 대도(현 베이징)에서 예루살렘을 목적지 삼아 도보 순례를 떠났다. 몇 년만에 우여곡절 끝에 동방 시리아 교회에 도착한 제자 마르코스는 뜻밖에도, 교회 수장인 총대주교 야발라하 3세에 오르는 영광을 누린다.
스승 사우마는 그곳을 다스리던 몽골인 칸의 요청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당시 서방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로마와 파리까지 순례하고 시리아 교회에 돌아온다. 둘의 이야기는 야발라하 3세 사후 다음 해인 1318년 《총대주교 마르 야발라하와 랍반 사우마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편찬됐지만, 14세기 중반 원본과 사본 모두 자취를 감췄다가 19세기 말 사본이 재발견됐다.
이 ‘동방수도사 서유기’는 동시대에 정반대로 로마에서 원나라 대도까지 여행하고 돌아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떠올리게 한다. 우연찮게도 ‘서유기’를 쓴 동방 그리스도교 수도사(마르코스)와, 《동방견문록》을 쓴 서방 그리스도교 무역상(마르코)은 정반대 방향에서 각자의 땅으로 향했던 동명이인이다.
책 《동방수도사 서유기 + 그리스도교 동유기》는 두 몽골인 수도사의 ‘동방수도사 서유기’에, 그들이 떠나온 동방 기독교가 예루살렘에서부터 건너온 뒤 13세기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소개하는 ‘그리스도교 동유기’를 합친 책이다.
저자이자 역자인 곽계일 교수(美 조지아 센트럴 대학)는 “두 이야기를 듣게 될 독자들은 동방 교회 수도사들을 뒤따르며, 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예루살렘에서 대도로, 그리고 다시 대도에서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까지 세계 그리스도교 역사의 지형을 밟아 나가게 될 것”이라며 “그 길에서 자신이 속한 친숙한 ‘서방 라틴 그리스도교’ 전통의 시선으로 세계 그리스도교 역사의 낯선 풍경을 응시하며, 낯선 풍경으로부터 친숙한 전통의 의미를 되묻게 될 것”이라고 취지를 전했다.
한국교회에 있어 미답지(未踏地)인 동방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본 도서는 ‘2021 크리스천투데이 올해의 책’에도 선정됐다. 본지는 미국에서 사역 중인 곽계일 교수에게 책 내용과 함께 동방 그리스도교에 대한 궁금증을 문의했다. 다음은 곽계일 교수와의 이메일 인터뷰 내용. 인터뷰는 2편으로 나뉘어 게재된다.
-책에 담긴 동방 기독교 이야기가 놀랍습니다. 책을 쓰게 되신 계기와 초기 기독교를 연구하게 되신 이유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요.
“반갑습니다. 저는 미지의 이야기가 이끄는 매력에 사로잡혀,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는 곽계일입니다.
과거 역사는 시간의 지층 속에 묻힌, 그래서 발굴하면 되는 유물과 같다는 점에서 미래 분야와 다른, 노력에 비해 누릴 것이 많은 미지의 보고입니다.
수년 전 박사 전공 분야를 물색하면서, 복음주의-개혁주의 대표를 자부하는 주요 신학교들 공통으로 교부학(patristics) 박사 과정을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제 전공 분야를 결정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참고로 교부학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 이후 시대부터 이슬람이 등장한 7세기 초까지 그리스도교 역사와 신학을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박사 과정 졸업 후 교수가 되어 교회사 수업을 준비하면서, 13세기 몽골 출신 그리스도교 수도사, 사우마와 마르코스의 순례기를 몇 줄짜리 줄거리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교부학을 공부하면서 관심 두고 있었던 동방 시리아 교부들의 이야기와 두 수도사의 이야기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교부들이 동방 땅끝까지 복음을 전한 이야기 그리고 그 혜택을 받은 몽골 출신 수도사들이 자기들 신앙의 뿌리를 찾아 서방 순례에 나서는 이야기의 얼개가 그려졌습니다.
그렇게 한 책에 묶인 두 이야기, 《동방수도사 서유기 + 그리스도교 동유기》가 저의 심상에 처음 들어왔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저의 심상 속 무형의 책은 감은사의 손길을 거쳐 독자들의 손에 들린 유형의 책이 되었습니다.”
-동방 기독교는 말씀하신 것처럼 ‘네스토리우스파 또는 경교’라는 단어의 어감 때문인지 ‘다른 복음’처럼 인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서방’과 ‘동방’이라는 방위는 방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입니다.
우리(곧 한국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그리스도교 역사와 전통의 방점을 과거 서로마 권역이자 현재 서유럽 권역에 뿌리내린 서방, 그리스도교 전통 혹은 서방 교회에 찍고 있습니다. 그 방점을 기준으로 동방은 과거 동로마 권역이자 현재 동유럽 권역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 혹은 ‘동방 교회’라 하면 자연스레 동방(러시아, 그리스, 불가리아 등) 정교회를 떠올리게 됩니다. 다른 말로 풀면,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역사관은 서로마와 동로마 권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로마 문명권 중심의 역사관입니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함께 정치와 종교가 일치하는 ‘그리스도 왕국(Christendom·크리스텐덤)’ 세계관이 로마 문명권에 등장했습니다. 이후 로마 문명권에 속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들은 그리스도교 왕국과 대척 관계를 이루었던 페르시아 문명권과 함께 그 너머 아시아 문명권을 이교(異敎) 문명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이 문명권에 뿌리내렸던 동방 시리아 그리스도교를 (말씀하신 대로) ‘네스토리우스파’라는 이교적 어감으로 불렀습니다.
우리에게 네스토리우스파로 알려진 동방 시리아 그리스도교 전통이 ‘다른 복음’처럼 낯설다는 현상 자체는 다름 아니라 로마 문명 중심의 역사관으로 그리스도교 전통과 신학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시선을 반추합니다.
로마 문명 중심의 그리스도교 역사관이 어떻게 우리에게 익숙한 주지(周知)의 관점이 되었는지는 굳이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책에서 동·서방 기독교는 그리스도론에 있어 ‘단격 단성, 단격 양성, 양격 양성’ 등의 차이를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1-4세기 그리스도교 세계에 던져진 최고의 화두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에 관한 질문, 특별히 한 측면에서는 성부 하나님과 관계를, 다른 측면에서는 인간과 관계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사람’으로 선언한 4세기 니케아 신경의 결론은, 5세기 들어 ‘어떻게?’라는 세부 질문으로 분화됩니다.
새 질문에 답하는데 필요한 용어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었던 교부들은 철학 용어였던 ‘위격’과 ‘속성’을 알렉산드리아 신학 전통과 (네스토리우스가 속했던) 안티오키아 신학 전통을 중심으로 차용하고 조합하여 그리스도론을 개진합니다.
먼저 이들 용어의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위격’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고유한 사회적/외적 위치를 가리키는 개념으로써 직함 혹은 신분과 관련 있습니다.
반면 ‘속성’은 한 존재를 다른 존재들과 구별시켜 주는 고유한 내적 특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써, 자질 혹은 능력과 관련 있습니다. 따라서 위격과 속성은 한 존재가 지닌 외적·내적 측면이며,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다만 이들 철학 개념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전한 하나님이며 동시에 완전한 사람인’ 유일무이한 존재에게 적용할 때, 어떤 개념이 동전의 앞면인지를 두고,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안티오키아 전통은 서로 다른 전제적 관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내적 속성이 외적 위격을 결정한다고 전제했던 안티오키아 전통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양성(신성과 인성)을 지녔기에, 양격(신격과 인격)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외적 위격이 내적 속성을 결정한다고 전제했던, 게다가 한 존재는 반드시 한 위격을 가진다고 전제했던 알렉산드리아 전통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이 신성에 합성되어) 한 속성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안티오키아 전통이 개진한 양격·양성 그리스도론은 로마 문명권 너머 페르시아 지역을 기반으로 삼은 동방 시리아 교회가 계승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전통이 개진한 단격·단성 그리스도론은 로마 문명권의 동방 경계 지역에 뿌리내린 (아르메니아, 이집트, 에티오피아 등) 교회들이 계승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문명권 내부 지역의 교회들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양대 그리스도론을 절충한, 논리적으로 가장 모호한, 그래서 역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가장 잘 보존한 단격·양성 그리스도론을 채택합니다.
니케아 그리스도론의 뿌리로부터 분화된 이들 3대 그리스도론이 공교롭게도 언어와 민족 그리고 문명 사이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되었다는 점은, 니케아 그리스도론의 세분화를 끌어낸 요인이 순전히 신학적 사안만은 아니었음을 시사합니다.”
-한국교회가 받아들인 서구 교회의 전통과 다른, 단격 단성 및 양격 양성 그리스도론은 용납할 수 있을 정도의 ‘다름’인가요. 같은 기독교 전통으로 포함시킬 수 있을까요.
“‘같은’ 혹은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인가 여부를 판가름하는 질문은 포용과 배척의 경계선을 어느 정도의 둘레로 설정하는가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조건적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사람’으로 선언한 4세기 니케아 신경을 경계선으로 삼는다면, 동방 콥트 교회의 단격·단성론 및 동방 시리아 교회의 양격·양성론은 자연스럽게 ‘같은’ 그리스도교 전통으로 내포됩니다.
하지만 로마 문명권 내부 교회들이 단격·양성론을 골자로 추가 정립한 5세기 칼케돈 신앙 정식을 경계선으로 삼는다면, 포용과 배척의 기준은 사실 모호해집니다.
칼케돈 신앙 정식이라는 경계선이 지닌 모호성 혹은 탄력성은, 역사의 변곡점마다 비(非)로마권 동방 교회를 대하는 로마권 서방 교회의 태도 변화를 통해서도 이미 여러 차례 드러난 바 있습니다.
대체로 서방 크리스텐덤이 융성한 시기마다 서방 교회는 동방 교회를 ‘다른’ 전통으로 배척하는 경향을, 반면 크리스텐덤이 쇠퇴하는 시기마다 ‘같은’ 전통으로 포용하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한 예로 《동방수도사 서유기》의 주인공 몽골 수도사들은 이집트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지를 탈환할 연합 세력을 얻기 위해 동방 시리아 교회를 ‘같은’ 전통으로 포용하려는 13세기 서방 교회의 전향적 자세에 힘입어, 베이징을 떠나 로마를 거쳐 파리까지 순례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예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으로 서유럽이 내홍을 겪던 16세기 중반, 자치권 보장을 조건으로 동방 시리아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온 분파를 ‘칼데아 가톨릭 교회’라는 이름으로 흡수하였습니다.
크리스텐덤 세계관이 붕괴된 현대 시대에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서방 개신교 전통을 비롯한 동방 교회 전통들에게 적극적으로 화해와 연합의 손을 내밀고 있는 현상도 이런 경향의 연속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비로마권 동방 교회를 향해 로마권 서방 교회가 취해온 가변적 자세는 5세기 칼케돈 신앙 정식과 그 골자인 단격·양성론이 취한 기본 자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극단적인 단격·단성론과 (그가 한 분인 것을 완전히 부정하는) 극단적인 양격·양성론은 배제하고 모두 포용한다는 탄력적이고 열려있는 자세, 그리고 동시에 모호하고 아전인수격인 자세와 결을 같이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또 다른 질문입니다. 누가 얼마나 극단적으로 다른가? 누가 상대의 극단성 혹은 중도성 여부를 판단하는가?”
서방 그리스도교, 공통의 ‘로마 문명권’에서 성장
동방 그리스도교, 지역과 체제, 자연환경 뒤섞여
광활하고 불안정함 속, 생기 불어넣으려는 노력
이슬람 근본주의 지속적 탄압 탓에 점차 고사돼
-책을 보면 시리아와 원나라 등 동방에서 주교직이 체계화돼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시대별로 각국의 기독교 세력과 성도 분포가 어느 정도였는지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틴권 로마와 헬라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서방 그리스도교 전통은 로마 문명권이라는 비교적 균질한 토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반면 동방 시리아 그리스도교 전통은 근동부터 극동까지 여러 문명과 토착 종교와 통치체제 그리고 자연환경이 수시로 변모하고 뒤섞이는, 광활하면서 비균질한 토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토양의 비균질성은 시대와 지역별로 동방 시리아 전통의 교세를 예측 가늠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서방과 상이한 동방의 환경에 적응하려 시리아 교회는 옥서스 강을 경계로 서편 내지(內地)와 동편 외지(外地)라는 이원론적 교구 체계를 채택합니다. 내지가 전통의 일치화와 공급을 담당한다면, 외지는 전통의 수용과 현지화를 담당합니다.
언제나 한 명이었던 총대주교가 내지 교구의 상징이라면, 현지 출신이었던 주교는 외지 교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총대주교가 내지에서 외지로 파송한 대주교는 일치성과 다양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적어도 6명 이상의 지역 주교가 세워진 교구에 대주교를 파송한다는 교칙은 대주교의 숫자를 통해 주교의 숫자를, 그리고 주교의 숫자를 통해 대략적인 성도의 숫자를 추측해 볼 수 있는 단서가 됩니다. 하지만 관련 사례들은 이 교칙이 내지 교구들에만 일관되게 적용되었고, 외지 교구에는 예외적으로 적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대주교 한 명 아래 예속된 주교의 평균 숫자는 4-5세기 원칙대로 6명에서 9세기 4.5명, 그리고 11세기 3.8명으로, 외지로 확장해 나갈수록 점차 낮아지는 추세를 보여줍니다. 8세기 초 처음 세워졌다 10세기 말 사라진 남중국 ‘시나이’ 대주교구의 이름은 14세기 기록에 다시 등장합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동방 시리아 교회가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어나간 아시아의 토양이 얼마나 광활하고 불안정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그런 토양에서 금세 말라버리기 십상인 가지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고 뻗으려 한 동방 교회의 노력이 얼마나 지난하고 끈기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게다가 근동과 극동 사이를 잇는 초원지대를 터전 삼아 이동하며 살아갔던 튀르크 유목 부족들의 존재는, 동방 시리아 교회의 교세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인입니다.”
-이처럼 뿌리 깊은 신앙 전통을 갖고 있던 동방 기독교의 세력이 약해지고, 사람들은 신앙을 잃어버린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서방 그리스도교 전통은 로마 제국이라는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부터 핍박받았지만,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로 그 단일 대상이 도리어 전통의 보호자·후견자로 변모하면서 그만큼 극적인 반등의 계기를 맞습니다. 그리고 근대화 시대 이전까지 수천 년 동안 크리스텐덤을 구축하며 서구 사회의 지배 사상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반면 동방 시리아 그리스도교 전통은 시대와 지역별로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 샤머니즘, 그리고 혼합종교 등 다양한 이교 통치자들의 영토에서 언제나 소수 종파로서 생존하며, 가지를 뻗으려 분투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동방 시리아 전통의 흥망성쇠를 결정한 핵심 요인은 다양한 이교 통치 세력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는지 여부였습니다. 총대주교 청사가 페르시아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에서 아랍 압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거쳐 몽골 일 왕조의 수도 마라가로 옮겨 다닌 패턴이 이를 방증합니다.
서방 로마 문명을 선택적으로 흡수했던 페르시아와 아랍 왕조 시대에, 동방 그리스도인들은 동서 문명의 가교로서 왕조에 기여했습니다. 이집트 맘루크 왕조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유럽 십자군과 군사 연합 작전을 모색했던 몽골 일 왕조 시대에 동방 그리스도인들은 (수도사 사우마 같이) 동서방을 넘나드는 외교 대사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14세기부터 현대까지, 서방 문명을 배척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왕조들로부터 지속적인 탄압을 받으면서, 동방 시리아 전통은 외지로부터 내지로 점차 고사하여 갔습니다.
여기에 더해 16세기 중반 총대주교 친족 세습제에 반대한 일부 분파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 귀속된 사건은, 동방 시리아 교회에 회복하기 어려운 내상을 입혔습니다. 현재 총대주교는 미국 남가주(캘리포니아 주)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