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방국제학교 학생들의 독서감상문 2] 창조와 진화
만방국제학교 학생들은 반기독교적 문학 작품에서도 ‘기독교적 메시지’를 찾아내 적용을 시도합니다. 학생들의 글쓰기 실력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독서감상문’을 소개합니다. 두 번째는 창조와 진화 관련 서적들을 읽은 학생들의 글입니다. (학생 소개에서 ‘가지’는 12-15개로 구성된 셀그룹을, ‘나무’는 여러 ‘가지’들을 모은 대그룹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편집자 주
1. ‘성경에 있는 과학적 사실들’을 읽고
열방 나무 / 예비 졸업반 김OO(11학년)
사람들이 성경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굉장히 단순하다. 발전된 현대 과학에 비해 성경이 비현실적이고 과학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에 있는 과학적 사실들>은 현대인들에게 만연히 퍼져있는 이러한 생각들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느꼈던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나는 지금껏 성경이 이렇게 과학적 사실들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성경을 항상 하나님 말씀, 메시지로만 생각해 와서인지, 과학적 시각을 통해 성경을 들여다 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성경의 과학에 대해 조금의 의심을 가지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성경에 대한 의심은 과거에 불과하게 되었다. 성경의 과학을 배우며 마음 한 켠에 품고 있던 의심은 완전히 사라졌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만이 내게 남아있었다.
<성경에 있는 과학적 사실들>은 성경 속 과학, 크리스천 과학자들 등 과학과 관련해 여러 부분에 대해 다룬다. 그 중,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진화론’에 대한 내용이었다. 책에서는 진화론을 꽤 많이 언급하는데, 결국 나에게 진화론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사람들은 왜 진화론을 믿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진화론이 ‘대진화’와 ‘소진화’로 나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진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것’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소진화는 ‘한 종에서 다양성을 가지고 진화하는 것’의 의미를 가진다.
저자인 레이 컴포트는 창조론과 함께 ‘소진화’를 믿는다. 하나님의 창조와 과학이 합쳐져,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믿는 진화론은 바로 ‘대진화’이다. 이곳에는 missing link와 같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오류들이 존재하는데, 사람들은 사회적 분위기, 생활환경, 혹은 여러 이유들로 단순하게 창조론을 거부하며 진화론을 택한다.
사실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만방에 오기 전, 진화론과 창조론 이 두 가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진화론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방에 와 하나님을 알게 된 뒤, 진화론이 사실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한 번 더 창조론이 ‘사실’, 그것을 넘어선 ‘진리’임을 배웠다. 현재 내가 진화론이 아닌 하나님의 기적, 창조론을 믿는 것이 단순히 신앙적으로만 옳은 것이 아닌, 진리 되는 ‘사실’임을 믿는 진정된 ‘옳음’인 것이다.
현대인들은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처럼,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진화론을 믿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창조론이 진리임을 인정하며, 믿음과 함께 그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크리스천으로서의 옳은 방향이 아닐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창조하신 원리’를 찾아가는 길에 서있을 뿐이다. 절대 우리가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새로운 개념을 구상해내는 것이 아닌, 오랜 시간의 역사에 파묻혀 숨겨져 있던 비밀을 찾아내는 것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공부를 할 때, 과학을 바라볼 때, 그리고 세상을 바라볼 때 가져야 하는 옳은 시각이라고 믿는다.
책을 통해 알 수 있듯, 성경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울러 우리의 삶, 사상, 세계를 결정한다. 모든 시간 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소중한 지표가 되어 옳음과 그름을 결정하고 방향성을 제시한다.
나는 이번 시간을 통해 한 번 더 확신하게 되었다. 나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말이다. 그것은 역사이며 사실이고, 기록이자 진리이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말씀이 이곳에 쓰이는 것일까.
단순하게 성경의 과학을 알아보고자 시작했던 독서는, 나의 삶의 방향성까지 다시 한 번 정립하게 해 주었다. 어쩌면 이 순간마저도 하나님의 과학이자 기적, 계획인 것일까.
이 배움의 시간에 감사하며, 지금의 배움과 감상을 잊지 않고 삶에서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 감사하다.
2. ‘하나님을 믿는 서울대 과학자들’을 읽고
열방 나무 / 예비 졸업반 허OO(11학년)
내가 처음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아주 친한 친구 중 하나님을 믿지 않고 믿으려 하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해선 항상 반박만 하는 친구가 있었다. 난 그 친구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최대한 논리적으로 설명해주고 삶으로 하나님을 보여주기로 했다. 이 책은 더욱이 (한국인들이 믿는) 서울대 교수님들이 쓴 글이라 그 친구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읽기 시작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배운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과학이다. 하나님을 안 믿는 대부분의 사람이 하는 말이 “나는 과학만 믿어. 그건 과학적으로 말이 안 돼”이다.
하지만 모든 크리스천이 알듯, 과학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과학을 만드셨을까. 과학을 통해 우리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일까. 책을 읽으며 이 질문에 하나씩 답할 수 있었다.
우선 이 책에선 ‘상대성 이론’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책을 통해 상대성 이론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상대성 이론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선 상대성 이론을 왜 만드셨을까.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모든 게 다 끝이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서의 삶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하나님과 멀어지면서까지 성공을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하나님의 6일간 천지창조는 인간에게 140억 년의 시간이다. 하나님께선 이 상대성 이론으로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짧고 작은 것인지 알려주신다.
우리의 140억 년이 하나님의 6일인 것처럼, 우리가 중대하게 생각하는 이 땅에서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과 비교하면 먼지만큼 작고 짧을 것이다. 그러니 이 작고 짧은 삶을 위해 하나님을 떠나 죄짓고 성공만을 쫓는 건 참 어리석은 행동이다.
두 번째 배움은 해와 달보다 빛과 어두움이 먼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게 뭘까. 난 우상숭배와 자만하지 않는 것인 것 같다.
만약 해와 달이 먼저 생기고 빛과 어둠이 생겼다면, 우리는 해와 달이 빛을 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과거에 태양과 달을 우상으로 숭배했던 우리의 조상들도 이러한 이유였을 수 있다.
또 이런 우리의 사고방식이 우리 삶에도 적용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하거나 조금 돋보이게 되면,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능력의 원천을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빛을 먼저 만드시고 해와 달에 그 빛을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능력을 부여해주신 것이지, 절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세 번째 질문, 하나님은 왜 지극히 작은 물건에조차 수많은 기능과 특징을 주셨을까? 이 책에서는 예시로 철과 나노입자를 제시한다. 철은 많은 종류를 가지고 있고 그 특성은 너무 많아서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왜 굳이 생명의 호흡도 가지고 있지 않은 철에 많은 특성을 만들어 놓으셨을까. 하나님께선 이를 통해 우리를 향한 계획의 섬세함과 방대함을 알려주시려는 것 같다. 하물며 철에조차 세밀한 계획 끝에 수많은 특성과 능력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계획을 세우고 만드셨을까.
이런 깨달음 후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설명한 모든 원리 속엔 하나님의 목적과 깊은 뜻이 있고,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며 하나님께선 우리가 과학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길 원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그게 하나님께서 과학을 만드신 이유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비록 사람들은 과학과 신앙이 모순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과학을 만드셨고 현대의 우리는 이 과학의 5%도 모르는 부족한 인간이다.
과학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과학을 탐구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결론지었다.
3. ‘창조인가 우연인가’를 읽고
열방 나무 / 졸업반 오OO(12학년)
이 책을 고르게 된것은 나도 고민하고 있던 주제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창조에 대한 확신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어디에서 오셨는가?’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고, 그 고민을 하던 중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였다. 또한 그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사고는 그분의 사고를 따라가지 못한다. ‘전지전능’이라는 단어는 모든 지식과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턴가 이 전지전능의 능력을 자연계의 법칙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그 분은 본질을 넘어 존재적으로도 초월하신 분이다. 우리의 지능과 지식 밖의 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인간이 신의 능력을 평가할 권리와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세계의 매커니즘과 규칙들을 만든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그의 피조물은 그 매커니즘에 따라야 하지만, 신이라는 존재는 그 매커니즘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세상의 기원을 논리적인 관점으로 분석했다. 이 책에서 그는 세계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우연, 자존, 그리고 창조 세 가지로 규정한다.
먼저 그는 우연과 하나님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로 인해 우연, 자존, 창조 중 우연과 창조 둘 중 하나는 거짓이 되는 것이다. 우연이라는 단어는 비의도적인 현상을 가리켜 사용한다.
예를 들어 동전을 던진다고 할 때,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올 확률은 반반이다. 이때 앞면이 나오는 현상을 우연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전 던지기에 우연의 영향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연은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우연’을 어떠한 결과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우연 자체는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가 만들어진 원인이 우연이 될 수는 없다.
그동안 나는 우연으로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확률적으로 0에 가깝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우연으로 인해 세계가 만들어지는 현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말을 인용하며, 자존이 불완전한 개념임을 설명한다. 저자는 자존에는 2가지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모든 우주가 스스로 존재했거나, 우주의 일부가 스스로 존재해서 다른 부분의 원인으로 작용된 것이다.
우주의 일부만 자존했다고 가정한다면, 자신이 글을 쓰고 있는 펜을 포함한 우주와 펜을 제외한 우주에는 구별된 부분이 존재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존하는 모든 것은 외부의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필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존한다는 것은 스스로 존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는 그 시점 이전에는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저자는 무로부터 유가 발생할 수 없기 때문에, 우주의 자존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우주의 존재를 위한 태초적인 원인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창조란, 모든 것의 태초적 원인이 되는 제1원인을 의미한다. 이 것은 자연계의 필수 법칙인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에도 적용되지만, 설명되어야 하는 한 부분이 존재한다. 하나님, 즉 저자가 말하는 제1원인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이 부분이 나와 저자의 생각이 비슷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초월적 존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초월이라는건 그저 “능력적인 부분의 우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우월’과 같은 단어는 두 대상이 비교할 수 있음을 나타내지만, 우리와 제1원인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기에 ‘초월적 존재’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매커니즘에 귀속된 모든 존재는 실존하지만 본질적인 상태는 아니다. 우리의 본질은 구별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제1원인인 하나님은 실존이 아닌 본질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 본질이란 어떠한 것이 그것으로 있기 위해 있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님 자체이시다.
책을 읽고 난 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은 현대 사회였다. 요즘은 ‘신’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흔하게 사용한다. “-느님”을 연예인이나 음식에 사용하기도 하고, 영화나 만화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접하는 매체에서도 신을 무력하게 표현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부분들로 인해 사람들의 인식이 간접적으로 무신론을 만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잣대로 신을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이라는 존재가 단지 친숙해진 것이 아닌, 신을 깔보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안타까운 사고를 예시로 들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거나,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방관할 수 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일 것이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 걸까. 단지 인간보다 조금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신의 존재에 대한 가정을 하려면, ‘신’의 의미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에게 자신들의 기준으로 제약을 두며 무력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 사이에서도 관점의 차이로 인해 같은 현상을 다르게 평가한다. 우리 능력으로 신을 이해할 수는 없다. 단지 관점의 차이가 아닌 관점의 차원의 차이는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세상의 기원에 관한 또다른 해석을 알 수 있었고, 내 생각이 더 확고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4. ‘1318 창조과학 A to Z’를 읽고
아프리카 나무/ 탄자니아 가지 장OO(8학년)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창조과학을 사랑하기도 하고, 창조과학을 더욱더 자세하고 깊게 공부해보고 싶어서였다.
사람들은 창조과학 하면 바로 노아의 홍수와 공룡 등이 떠오르겠지만, 창조론의 적인 ‘진화론’도 절대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사람들은 왜 근거가 빈약하고 허술한 진화론을 더 많이 믿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이 진화론을 믿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첫째, 진화론자들이 자기의 관점으로만 모든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을 때 나도 모르게 진화론에 익숙해져 있어, 창조론을 거부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을 통해, 한 과학자가 무언가 발표해 그 내용이 교과서에 실린다 해도 항상 그것들의 불완전성을 인지하고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67년 노벨 의학상을 받은 조지 월드는 진화의 증거가 없다고 명백히 밝히면서도, 진화론을 믿는다고 한다. 그러니 항상 무엇을 바라보든 중심을 바로잡고 봐야한다는 것을 느꼈다.
둘째, 진화론자들이 진화를 과학적 사실로 인정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 하나의 대안인 특별한 창조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화론자들은 정말 이기적인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진화론을 믿는 것이 창조론을 믿는 것보다 더 강력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빅뱅 이론만 봐도 아주 자그마한 무언가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갑자기 폭발해 전 우주를 만들고, 그 중에 지구가 갑자기 생겨 태양계를 만들고 지구 안의 모든 물질과 생물체를 만든다. 정말 터무니없는 논리인 것 같다.
진화론은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겼다고 하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우연히 생긴 우리 인간들이 이 땅에서 삶을 사는 것 또한 무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왜 창조론은 세상에 소개되지 않을까?’이다. 그 이유는 창조과학은 늘 종교로만 다뤄져서, 성경에 입각한 아무리 정확한 증거나 정보가 나와도 일반 과학 학술지에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거나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이번에 이 책을 통해 믿음에 대해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창조가 세상을 이겨서 모두가 진실을 확인하는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또한 사람들이 잘못된 것을 말하고 있을 때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분명히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