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교수의 회심 이후 15년, 책으로 만나다 (1)
죽음까지 의식 또렷… 평화롭고 편안하게 떠나
딸 치유 기적 후 세례 받았지만, 외손자가 떠나
영성 위해 지성 포기? 깨달음으로 가는 사다리
아름답고 눈물겹고 황홀한 성경 눈뜨는 강의도
“사랑하는 내 딸아, 너의 기도가 높은 문지방을 넘게 했다.”
2월 26일 딸을 따라 하늘로 떠난 故 이어령 교수는, 2007년 회심 후 영성에 대한 많은 글들을 펴내며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국민들을 일깨웠다. 최고 지성인이자 무신론자 중 한 사람이었던 그가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것은 당시 큰 울림을 줬다.
언론들에 따르면 장남 이승무 교수(한예종)가 전한 이어령 교수의 마지막은 늘 바랐던 대로 평화롭고 편안했다. 정신이 흐린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아 진통제도 거의 맞지 않았는데, 숨을 거두기 한 시간 전 손주들과 영상 통화가 걸려와 웃으며 인사를 건넬 정도로 마지막까지 의식이 또렷했다.
이어령 교수는 ‘죽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봐야겠다는 표정’으로, 허공을 아주 또렷하게 30분 정도 응시하면서 ‘죽음마저 관찰하는 듯했다’고 한다. 손주들과 영상 통화 후 가족 예배를 드렸고, 그 이후 숨이 점점 옅어지면서 하늘로 떠났다.
이어령 교수는 회심의 ‘과정’과 그 ‘전후’에 대한 단상을 기독교인이 된 이후 첫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에 풀어놓았다. 그는 신이든 인간이든 기성의 모든 권위를 거부하면서 살아온 무신론자였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저항과 부정의 삶, 허공을 향해 독침을 찌르고 땅 위에 떨어져 죽은 웅봉(雄蜂·수컷 벌)의 시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처절한 삶’이었다.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그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에게 바친’ 이 책에서 이어령 교수는 실명 위기의 딸이 기적을 체험하고 세례를 받기로 한 3년 전인 2004년 홀로 일본 교토로 날아가 유학하던 시절 ‘무신론자의 기도’를 쓰면서, 신을 향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어령 교수는 당시 딸의 실명 위기에 “우리가 살아서 하늘의 별 지상의 꽃을 보는 것이 그리고 사람의 가슴에서 사랑을 보는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매일 매일 우리는 당신께서 내려주시는 기적 속에서 삽니다”라며 “만약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라고 기도했고, 이 기도는 이뤄졌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 얼마 안 되어, 자신의 손으로 키웠던 외손자를 잃었다. 그 아이가 병명도 모른 채 의식 없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외손자가 그렇게 떠난 후, 그는 눈물과 함께 조용히 성경을 덮었다고 한다. 아무 잘못도 없는 젊은 아이를 데려가셨기 때문이다.
더 이상 기도를 드리지도 주님을 찾지도 않던 그는 어느 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속 한 구절이 떠올랐다고 한다. 사망이 죄의 값이라면 갓 태어난 아이의 죽음은 무엇인지에 대해, 조시마 신부는 “아이보다 더 순결한 예수님이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고 답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성경을 펴고, 욥과 하박국, 예레미야애가 등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어령 교수는 이후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외람되게 이야기하자면, 지금까지 세속적으로 편안하게 살던 것을 끊고 떨어지는 추락의 경험과 아픔이 없으면 주님을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정말로 모두 끊어버리고, 모두 버려야 한다. 예수님은 제일 먼저 부모와 가정을 버리시고, 고향을 버리시고, 모든 가진 것을 버리시고,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버리셨다. 우리는 구하려고만 하는데, 그분은 계속 버리셨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지성 없이 영성으로 가느냐, 지성이 있으면 영성으로 못 가느냐 하는 토론은 무의미하다. 자신이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절대 열어주시지 않는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라며 “지성이라는 욕망이 두드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안 열어주시는 것이지, 지성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두드리면 다 열어주신다”고 답했다.
그는 “너무나 절실히 고독이 왔을 때, 절대 나는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 즉 영혼이 갈구할 때, 목마를 때, 수돗물이든 1급수든 2급수든 보통 물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느낄 때 어디로 가는가”라며 “물론 그런 영혼의 아픔과 갈증이 교회에 간다고 해결되진 않는다. 하지만 식당에 갔을 때 만날 맛있는 음식, 입에 맞는 음식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갈 수밖에”라고 전했다.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에서는 이러한 이어령 교수의 생각을 더욱 구체적으로 펼쳐놓았다. 2011년 나온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의 개정신판으로 세례 10주년인 2017년 출간된 이 책에서, 그는 “영성을 얻기 위해 지성을 버려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지성은 깨달음으로 가는 사다리”라고 정리했다.
세례받은지 10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의문과 믿음의 문지방 사이에서 아직도 방황하고 있다”면서 “아직도 나와 같이 문지방 위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욕심에 개정신판을 내게 됐다”고 밝혔다. 무비판적·무의식적으로 문지방을 그냥 넘어서지 않고, 끝까지 꼼꼼히 따져보면서 평생 우물을 팠던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은 종교 이전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시요 소설이요 드라마로 존재해 왔다. 또한 생생한 철학을 담은 생명의 책으로 존재해 왔다”며 “성경을 바이블이라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영어의 바이블은 그리스어로 ‘책’을 뜻하는 ‘비블로스(biblos)’에서 나왔다고 한다. 성스럽다(聖)거나 경전(經)이라는 뜻이 아닌, 그냥 책”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거기 담긴 것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역사의 골짜기를 넘어 모든 이의 손과 가슴에 가닿을 수 있기 때문”이라며 “하나의 암호처럼 생소한 아이콘으로 우리 앞에 가까이하기 어려운 경건함으로만 존재하던 그 책이, 기독교를 믿든 안 믿든 모든 사람들의 ‘책’으로, 아주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래서 “신학이나 교리는 잘 몰라도 문학으로 읽는 성경, 생활로 읽는 성경이라면 제가 거들 수 있는 작은 몫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적 레토릭과 상상력, 그리고 문화적 접근을 통해 빵과 밥과 떡 사이의 거리를 좁혀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며 “비유 뒤에 숨은 문화를 알고 그 차이를 극복해 땅끝까지 가면,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후예들도 성경 속 유목민들이 건넜던 저 광야의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언어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물겹고 황홀한지를 직접 느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 같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을 위해 그는 이 책에서 기호학을 비롯한 인문학 등 자신의 ‘지성’을 십분 활용해, 독자들을 ‘영성’으로 인도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과 한국, 2천 년의 간극 등 시공을 초월해 생활과 문화 코드가 다른 사람들이 접해도 와 닿을 수 있도록 성경을 풀이하고 있다.
이어령 교수는 정통적 성경 풀이와 어긋나는 부분이 많았던 자신의 성경 읽기에 대해 “유감스럽게도 새롭게 개역을 하고 문어체를 구어체로 고쳐봐도, 성경은 시와 소설처럼 그냥 읽기는 힘이 든다. 그냥 힘이 드는 것이 아니라, 오해와 왜곡을 범하기 쉽다”며 “디테일을 넘어서 눈에 보이는 대상물을 뛰어넘어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그래서 시와 소설 작품을 평할 때처럼 성경을 문학평론 혹은 문화 비평의 텍스트로 읽으면서, 예수님의 몸(corpus)을 언어학에서 말하는 코퍼스(자료체)로 분석해봤던 것”이라며 “그것도 누구나 읽어도 쉽게 알 수 있도록 학문 용어나 그 시스템을 빌리지 않고, 그냥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쉽게”라고 했다.
그는 “이를테면 성경에서 빵이란 말은 가지나 이파리가 아니라 뿌리의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비유와 이미지를 조명해 보았던 것이다. 빵의 성경 코드를 좇아가 보면, 의외의 모순과 해법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게 된다”며 “구약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지은 죄로 밭을 가는 노고의 땀을 흘리지 않고서는 ‘빵’을 구할 수 없다고 하셨지만, 신약에서 예수님은 공중에 나는 새, 들의 백합을 예로 들며 인간이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려고 걱정 근심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섭리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고 소개했다.
이에 대해 “창세기에서 원죄에 대한 벌을 받았다면, 신약에서 예수님 말씀대로 한다면 인간은 이미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은 것”이라며 “구약과 신약의 모순은 모순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임하셨기에 그 모순이 드러나면서 풀리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그가 “신학(神學)에서 ‘ㄴ’ 받침 하나만 빼면 시학(詩學)이 된다”고 줄곧 주장했던 그대로다.
“시를 읽듯이 소설을 읽듯이 성경을 읽으면, 어렵던 말들이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같이 읽을 수 있는 성경, 우리가 쓰러졌다 일어서는 법과 미움을 넘어서는 사랑의 수사법과 등 돌린 사람을 포옹하는 너그러운 몸짓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의 식탁에는 우리의 배를 불리는 밥만이 아니라, 빵만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마음까지 환하게 밝혀줄 참으로 눈부신 햇살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