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성경 6] 오순절과 120문도
부활 후 예수님 직접 목격한 숫자는 600여 명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숫자, 120여 명
예수님 승천 후 10여일만에 사라진 480여 명
2,000년 후 우리, 성경 부지런히 읽고 준비를
1. 들어가는 말
오순절은 예수님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을 말합니다. 120문도가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각인의 머리에 임한 날이기도 합니다.
이후 여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능력을 받아 전혀 배우지 않았던 각종 언어로 방언을 하였습니다. 또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설교를 할 때 한 번에 수천명이 회개를 하였습니다. 성령이 불꽃처럼 또 바람처럼 내린 이날, 비로소 교회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날을 ‘칠칠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초실절로부터 칠칠(7*7=49), 즉 49일이 지난 그 다음 날입니다. 이 날은 초실절에서 시작한 추수가 모두 끝나는 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확한 십일조를 가지고 성전으로 갑니다.
그러나 이 날이 가지고 있는 더 중요한 의미는 이스라엘이 탄생한 날이라는 점입니다. 즉 이 날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출애굽후 50일째 되는 날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하여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탄생하였습니다.
2. 2천 년 전에 무슨 일이?
이처럼 오순절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날, 또 신약에서는 교회가 시작된 날로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그러나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한 가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여 볼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5절에 보면 마가 다락방에 모인 사람이 12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과연 이 숫자는 충분한 숫자일까요?
개역개정은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어 성경에는 “약 120여명 정도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약 120명이나 되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고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즉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120명이라는 숫자가 작은 것인지 큰 것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글성경은 마치 누가가 많은 무리가 모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에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분명 원어와 상관없는 번역자의 어떤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다 읽게 되면 ‘120명이나’가 아니라 ‘120명밖에’라는 뜻이 담겨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또 부활의 첫 열매로 초실절(안식일 다음 날) 즉 주일 새벽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간 이 땅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증거에 따르면, 약 600여 명의 사람들을 만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고전 15:4-8).
1) 열두 제자
2) 오백 형제
3) 야고보(예수님 동생)
4) 모든 사도(70문도)
5) 바울
바울은 예수님을 승천 이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것과 또 막달라 마리아 등 복음서에 나오는 인물 등을 고려하면, 예수님이 부활 후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나타나셨던 사람들은 모두 600여 명쯤은 됐으리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만나신 후 40일째 되는 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과 함께,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한 날부터 이들은 마가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 하며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순절 때 모인 무리의 수가 120여 명밖에 안 됐다는 점입니다.
40일간 약 600여 명의 무리가 예수님의 부활체를 직접 눈으로 보았는데, 정작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10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한 사람들은 불과 120여 명밖에 안되었습니다.
3. 나머지는 어디로?
성령이 내린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불과 10일 뒤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것을 본 이들 480여 명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불과 10일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에 “기다리라”는 명령을 잊어버리고 (혹은 무시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말세에 하나님의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라”는 요엘 2장 28-32절 예언이 실현되는 역사적 현장에 참여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빗대 예수님 재림 때도 기독교인들 중 약 20%만(즉 600여 명 중 120여 명)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 주장합니다. 각 교회로 본다면 교인 5명 중 1명꼴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물론 이것이 정확한 하나님의 뜻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추론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있습니다.
예수님도 “인자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을 매일 찾아와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귀찮게 하는 과부 이야기(눅 18:1-8)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예화입니다.
이 예화는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체를 보고도 단 10일도 견디지 못하고 교회를 떠난 480여 명에게, 또 현대의 우리에게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에겐 잠시 혹했던 부활 이야기, 영생 이야기, 천국 이야기가 그렇게 큰 매력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천국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신하들처럼 살진 소를 잡고 모든 것이 준비된 잔치에 가는 대신, 이들은 각자 자기 사업을 위하여 또 자기 밭으로 일을 하러 갔던 것입니다(마 22:1-14). 그 결과 이들은 천국잔치에 초청을 받았지만 그러나 택함을 입지는 못하였습니다.
4. 2022년 오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체도 보지 못하고 그의 구세주 되심을 믿고 있습니다. 2천 년 전과 비교하여 볼 때 우리의 객관적 신앙 조건은 분명 이들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만 보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심’과 또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을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습관처럼 입술의 고백은 할 수 있을지언정,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았던 열두 사도처럼 실천하는 신앙을 갖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요즘 주변 신앙인들을 보면 입술의 고백이 마치 무슨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처럼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보고도 못 믿었던 480여 명을 생각하면, 보지 않고 믿어야 하는 우리는 그만큼 더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부활체를 보고도 못 믿었던 사람들은 분명 부활체가 가지는 의미를 정확히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겐 밭에 가고 시장에 가는 것이 부활 잔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보지 못하고 믿어야 하는 우리들은 지금부터라도 부활이 가지는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성경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것은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한 사도들에 의한 증언이 기록된 성경이 있다는 점입니다. 즉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는 사도들의 증언이 핵심을 차지한다는 점입니다.
480여 명은 예수님의 부활체를 만나보고도 믿는 특권을 포기하였지만, 우리는 성경 기록만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지런히 성경을 읽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 3년을 보내고 또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한결같은 증거에 힘입어 오늘날의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과 또 미래를 향한 약속에 대하여 먼저 자신이 잘 알 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증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벧전 3:15).
5. 천국 잔치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한 가지 즐거운 소식은,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점입니다(요 14:2). 다만 그곳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즐거움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잔치에 자주 비유됩니다.
예를 들면 천국에서 벌어질 하나님의 잔치에는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온갖 산해진미가 등장할 것입니다.
만세 전부터 예비해 놓으신 이 잔칫상에는 온갖 귀한 것들이 등장하는데, 이사야 25장 6절은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가 바로 그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보면 별로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을 비유로 기록한 것입니다. 오래 묵은 포도주일수록 좋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감하지만, 골수가 가득한 것은 약간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이사야서가 쓰여졌을 당시 최고 음식에 대한 이미지 표현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고대에는 기름이 살코기보다 더 비쌌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등급이 높은 한우일수록 기름이 많으며 또 기름이 많을수록 고기도 더 맛이 있습니다. 구약 제사 때 향기로운 냄새를 내며 타는 고기 기름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드려야 했습니다. 따라서 ‘피’는 물론 ‘기름’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레위기 3장 16-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좋은 포도주도 값으로 따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오래 묵은 맑은 포도주는 이미 예수님께서 가나 잔치 때 선을 보이셨습니다. 술 취한 사람들이 마셔도 맛을 구별할 정도이니 그 포도주 맛이 어떠하였을지 조금은 짐작이 갑니다.
여러분 모두 120문도처럼 끝까지 남아서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준비해 놓으신 천국 잔치를 즐기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