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신앙적 여정 시각적으로 그려낸 토마스 콜
4부작 <삶의 항해>, 신앙 여정 파노라마 식 그려내
<천로역정>과 비슷, 사실적 풍경과 알레고리 연결
온갖 난관과 시험 거쳐 나약한 자아 깨닫고 구원行
무엇 잘 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로
19세기 중반 미국인들은 ‘움직이는 파노라마(Moving Panorama)’를 즐겨 감상했다. 두루마리 그림처럼 전문 화가들이 제작한 그림을 길게 펼쳐놓고, 장면이 넘어갈 때마다 해설가의 이야기와 음악가의 연주를 곁들이는 저테크(low-tech) 공연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그림과 문학과 음악이 어우러진 일종의 공감각적인 작품이었던 셈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인기 있는 공연은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 파노라마’였다. 이 파노라마는 길이만도 255미터나 되어, 관람에 2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이 ‘무빙 파노라마’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이 상연된 첫 해에 1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하니,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파노라마가 제작되기 전에 미국판 『천로역정』을 제작한 화가가 있었다. <삶의 항해>(The Voyage of Life)를 그린 토마스 콜(Thomas Cole,1801-1848)이 그 장본인이다.
‘미국의 천로역정’으로 불리는 이 연작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을 담았는데, 순례자는 절망의 늪, 죽음의 그림자계곡, 절망의 동굴 등을 통과하여 천상의 도시에 이르는 등 『천로역정』과 비슷한 스토리를 지닌다.
사실적인 풍경과 알레고리를 연결 짓는 것은 콜의 작품을 해석하는 열쇠가 되며, 문학에서나 회화에서나 알레고리를 기용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예술적 전통이기도 했다.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등 모두 4부작으로 구성돼 있는 <삶의 항해>를 살펴보자.
먼저 <유년기>(Childhood, 1839-1840)는 어린 아이가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모습이다. 아이가 동굴에서 나오는 것은 고전적 신화 모티브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다(시 139:15)”는 성경의 메타포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기도 하다.
이때 천사(‘하나님의 영’을 상징)가 뒤에서 노를 잡고 아이를 보살펴 준다. 주위 풍경은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어린아이를 축복하듯이 꽃이 피어 있고 물결도 잔잔하다. 초원의 꽃과 식물도 어린 아이를 축복해준다. 기대와 희망만이 아이를 기다려주는 것같다.
<청년기>(Youth, 1840)는 유아가 젊은이로 자라 홀로 여행에 나선다. <유년기>의 만발한 꽃들은 <청년기>에 자리를 내어주고, 척박한 산맥으로 출발을 서두른다.
천사 역할도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천사는 뒷전으로 물러나 청년을 떠나보낸다. 낙엽수림 한 가운데 있는 야자나무는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를 연상시키는데, 초기 작품 <에덴동산에서 추방>(Expulsion from the Garden of Eden,1828)에는 죄와 환상에 빠진 젊은이들이 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즉 콜은 초기작 <에덴동산에서 추방>에서 보인 플롯과 비슷하게, 생명으로 가득 찬 곳을 떠나 기나긴 장정에 오른다.
그러나 콜의 <청년기>가 <에덴동산에서 추방>과 동일한 내용을 지닌다고 보기는 어렵다.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은 결과, 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에 비해 <청년기>에서는 스스로 길을 나서는 성격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이 <유년기>과 다른 점은 천사 대신 청년이 ‘키’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은 자력으로도 얼마든지 삶을 헤쳐갈 수 있으리라 자신했을 것이다.
그의 포즈를 보면 행선지를 분명하게 가리킨 것으로 보아, 청년은 신앙을 잃어버린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그가 성령의 도움 없이 홀로 여행을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천사의 이별 장면이 뜻하는 바는 청년의 단독 여행을 의미하며,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 유지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한, 실질적인 대화와 교제가 없는 여행을 암시한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청년은 어른이 되었다. <장년기>(Manhood, 1840)에서는 예상치도 못한 무시무시한 광경이 펼쳐진다. 거센 물줄기가 곤두박질치는 폭포 앞에서 주인공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다. 폭포가 내리치고 빠른 물살이 흰 이빨을 드러내며 주인공을 집어삼킬 기세이다.
콜이 말한 것처럼 주인공은 “보트의 키를 잃어버렸다.” 그를 환영해주던 파릇파릇한 들판의 꽃과 식물들은 이제 죽은 나무와 거친 암석, 먹구름이 낀 하늘로 바뀌었다. 주인공은 어쩔 수 없는 통제불능의 상태에 휩싸여 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천사는 멀리 구름 속에 떨어져 이를 지켜볼 따름이다. 이 장면에 대해 콜은 “위를 향해 탄원하는 여행자의 모습은 절대자에게 의존하는 상황임을 보여주고, 그러한 신앙은 그를 피할 수 없는 파괴로부터 구한다”고 적었다.
마지막 작품인 <노년기>(Old Age, 1840)의 경우, 장면이 바뀌어 주인공은 인생의 끝자락에 와 있다. 주인공은 노인이 되면서 몸도 쇠약해졌고 감각도 무뎌졌다. 콜이 기술한 대로 “강은 영원의 바다로 흘러간다.”
그의 곁에는 천사가 그를 안내한다. 노인은 더 이상 키를 잡을 필요가 없다. 주님 없이 스스로 여행을 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멀리 층층이 쌓인 먹구름이 갈라지면서 광명한 빛이 출현한다. 그 빛으로부터 축복의 전령이 날갯짓을 하며 그에게 다가온다.
일생 동안 그를 괴롭혔던 위기감, 수많은 시험들, 낭패감과 좌절감 따위는 더 이상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다. 조금 후에는 천사가 영광의 노래가 멈추지 않는 ‘빛의 도성’으로 주인공을 인도해줄 것이다.
일련의 작품에서 토마스 콜은 삶의 여행을 영적으로 표현했다. 감상에 치우친 빅토리아식 취향을 간간이 엿볼 수 있지만, 이 작품들에서 우리는 온갖 난관과 시험을 거치면서 자아의 나약함을 깨닫고 결국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구원의 방주’에 몸을 싣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삶의 항해>에서 여행자는 자기 힘으로 생명을 구할 수 없다. 그는 조류(潮流)에 수동적으로 의탁할 뿐인데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이 위기를 헤쳐 나갈 길이 없어 보인다.
진 에드워드 비스(Gene Edward Veith)가 정확히 짚어낸 것처럼, 이 작품에는 인간은 자기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손길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종교개혁적 관점에서의 인간 이해’가 함축돼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띄워 보낸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는 그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요 6:44)”.
이 땅을 항해 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도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