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강승애, 물댄 동산같은 풍경
작품 속 씨앗, 새싹, 나무, 꽃 등은 은유
그의 빛, 초자연적 하나님의 은총 상징
은유 없이 본다면, 평범한 정물화 불과
선하신 주님 다스리고 돌보심 환기시켜
강승애의 화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여러 식물의 이미지이다. 노랑 바탕에 초록색 나무가 위치해 있는가 하면, 분홍색 바탕에 풀잎이 흔들리고 한편으로는 길섶의 풀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씨앗과 빗줄기는 복음의 씨앗이 은총의 빛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마른 땅이 샘의 근원(사 41:18)’으로 바뀌듯, 잎과 가지를 내고 꽃을 피우며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보통 풍경화라면 하늘과 산과 같은 배경이 있으련만, 그의 그림에는 그런 게 없다. 땅 위에 솟아난 새싹, 화분 속의 화초, 대지 위의 나무처럼 꼭 필요한 부분만을 강조하는 편이다.
간결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이면에는 식물 이미지들을 일종의 메타포로 사용하는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다. 작가는 이런 식물들 속에서 인간의 내적 상황 내지 성숙 과정을 조명한다. 보는 이가 땅 속에서 묵묵히 겨울을 견디는 씨앗이 된다고 생각하거나 완연한 봄기운을 맞아 새싹이 피어오르고, 시간이 흘러 과실을 맺는 일련의 단계를 떠올리게 한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강승애는 스튜디오 안의 정경, 식탁 위의 머그잔이나 석류와 화병, 해질 무렵 동네 인근, 실내 풍경, 시골 마을 등을 주요 테마로 다루었다. 현실의 모습을 포착한 것도 있고, 지난날 아스라한 꿈을 회상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회화의 지평을 여는 뚜렷한 변화가 포착된다. ‘생명나무’(1999), ‘평화’(2000), ‘축복’(2003), ‘은혜’(2004), ‘기쁨’(2005), ‘빛’(2008)과 같은 신앙적 삶의 내역을 담게 된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한 상황에서도 강승애가 기독교 신앙에 바탕한 작품을 해온 것은 문화명령을 실천하려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당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강승애 작가가 구사하는 메타포, 즉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다른 대상에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표현 방법은 기독교 영성의 예술적 표현에 큰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종래 기독교적 내용의 표현이 표제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면, 강승애의 메타포는 성경의 풍부한 함의를 예술적으로 해석하는데 있어 중요한 기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겉으로는 식물의 이미지인 것 같지만, 정작 작가가 우리에게 제공하려는 내용은 표면의 사실이 아니라 이면의 사실, 곧 영적 진리에 잇대어져 있는 셈이다.
작가에 따르면 그의 작품에서 ‘씨앗’은 믿음의 원소이고, ‘빗줄기’는 은혜의 단비이며, ‘꽃’은 신앙의 결실, 컵에 담겨진 ‘물’은 성령의 충만을 각각 표상한다. 작은 씨앗에서 새 싹이 나고 번성하여 열매를 맺는 과정은 바로 우리의 내적 성숙을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그의 그림은 작은 믿음의 씨가 떨어져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나 아름드리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자라나듯, 그의 그림은 영적 통찰에 의해 점점 깊어진다.
예수님은 농경적 이야기를 비유로 자주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자와 토양의 비유, 알곡과 가라지, 겨자씨 비유,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무화과나무의 비유, 자라나는 씨의 비유 등. 예수님은 평범한 식물들에서 생명의 근원을 깨닫고 삶을 돌보는 법을 가르치셨다.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데 비유만큼 적합한 것이 없다고 여기셨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이 오랜 기간 예술가들에게 막대한 영감을 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승애도 예외는 아니어서, 예수님이 비유로 들려주신 것이 창작의 밑거름이고 작업의 원동력이 된 셈이다.
화면으로 눈을 돌리면, 작품에는 화분의 화초를 비롯해 꽃망울, 연두빛 잎파리, 줄기, 나무, 꽃 등이 펼쳐져 있다. 여기에 이미지의 변용과 과감한 면 분할, 그리고 번짐 수법이 더해진다. 밑칠을 하고 그 위에 물감이 중첩되어, 마치 셀로판지를 덮었을 때처럼 바탕의 물감이 배어나오는 효과로 회화적인 묘미를 배가시킨다.
근래에는 부쩍 빛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빛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화려하거나 강렬한 빛은 아니다. 마치 반투명한 한지에 비친 햇살과 같은 효과를 내기도 한다.
대체로 은은한 빛의 속성으로 인해 인식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작가는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거룩한 손길을 암시하는 수단으로 빛을 기용한다.
근작 <동행>에서는 눈동자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작가가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어떤 위기의 순간에 있든지 자비로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암시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시 33:13)”. 화면에는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빛줄기 속에서 대지의 생명을 키우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을 암시한다.
이 작품은 소극적으로는 우리 인생에 동행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는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분의 주권과 통치를 뜻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만물이 그분 없이는 유지되지 못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골 1:16). 눈동자와 연결된 함의는 하나님의 선하며 전능하신, 우리를 돌보시는 다스림과 섭리이다.
앞서 언급했듯 그의 작품은 은유 체계로 둘러싸여 있다. ‘씨앗’의 이미지가 그렇고, ‘새싹’과 ‘나무’ 그리고 ‘꽃’도 마찬가지이다.
‘빛’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빛은 초자연적 ‘하나님의 은총’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은총이 식물들뿐 아니라 일상 곳곳까지 파고들어 미소짓게 한다.
만일 우리가 은유를 고려하지 않고 그 이미지들을 단순히 물리적인 식물과 빛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회화를 평범한 정물화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그림의 동기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세계는 신적 계시로서 이해된다. 이런 사고는 주어진 사물을 과학적 방법론으로 받아들이는 자연주의적 사고, 생태계를 자급자족하는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가이아 패러다임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그가 작품에서 말하려는 바는 선하신 주님께서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돌보시며, 우리도 그 속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데 있다. 우리의 진정한 존재성은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오며, 이는 그림에서 암시되듯 빛줄기와 새싹, 나무, 꽃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빛줄기 없는 식물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빛이 공급되기에 식물들이 활기를 펴며 자라날 수 있다. 즉 생명을 주시는 이는 예수님이며, 예수님을 신뢰할 뿐 아니라 그 분께 접목돼 있을 때 우리는 건재할 수 있으며 풍성한 생명을 만끽할 수 있다. 예수님께 속해 있는 것만이 진정한 기쁨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알려준다.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