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크리스천이 우리 사회에 줘야 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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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록, 한 점의 그림] 길 위에 선 화가들, 반 고흐부터 한국까지

길 위 사람들 판단보다 아픔 긍휼히 여긴 고흐
그의 기독교 애린 정신 이어받은, 우리 화가들
사회에 필요한 우리 본분, 하나님과 이웃 사랑
‘섬김과 돌봄’ 중핵으로 하는 기독교적 가치관

▲복권 판매소, 빈센트 반 고흐, 종이위에 수채물감, 38x57cm, 1882,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복권 판매소, 빈센트 반 고흐, 종이위에 수채물감, 38x57cm, 1882,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목회자의 꿈을 포기하고 화가가 되기로 했을 때, 그의 신앙을 의심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화가가 되면서 기독교를 떠났다고 보는 시각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오판에 불과하다. 그의 생애와 그림을 살펴보면 기독교 신앙을 지녔던 흔적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였던 부친 테오도루스와의 의견차는 있었을지언정, 그가 기독교 신앙을 저버렸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엡 2:4)’을 따라, 성경의 정신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데 진력하였다.

헤이그에 머물렀을 때 빈센트는 가난한 사람들에 주목하였다. 목탄과 연필, 잉크로 밑그림을 그린 후 그 위에 수채 물감을 얹힌 <복권 판매소>(1882)도 그중의 하나이다. 화면에는 복권을 사려고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대개 허리가 구부러진 빛바랜 옷차림의 노인들이고, 아기를 안은 부인과 이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남편의 시선에서 절박함이 전해온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도 않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 복권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이 우리 눈에 다소 유치해 보이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 음식을 먹지 않고 절약한 돈으로 샀을지도 모르는 복권을 통해 구제를 받으려는 그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의 비참함과 쓸쓸한 노력을 생각해 보렴(1882. 10. 1).”

빈센트에게 그림은 이웃에게 내미는 사랑의 표시였다. 그는 늘 힘들고 약한 사람들이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이 이름 없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그려서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면 참 행복할 것이다(1880. 9. 24)”고 다짐한 바 있다.

그의 인물화가 지배층이 아닌 농부와 광부, 직조공, 우편배달부, 노인이나 아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신념이 달라지지 않았음을 뒷받침해 준다. 그들 모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탄생된 특별한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 자신이 세상에 빛과 의무를 지고 있다고 여겼고,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그림(1883. 8. 4-8)”을 그리고자 했다.

길 위의 사람들을 자신의 논리로 판단하지 않고 이웃의 아픈 감정에 머물러 있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화가가 그들에게 보인 마음이란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긍휼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빈센트의 <복권 판매소>는 그리스도인이 공동체 속에서 살아갈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그는 복권을 구입하기 위해 노상에 있는 사람들을 요행수를 바라는 게으른 자로 여기기보다, 경제적 곤궁에 몰린 위급한 사람들로 판단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긍휼함이 발동한 것이다.

만약 그들을 주관적인 잣대로 판단했다면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태도는 밀레(F. Millet), 레르미트(L. A. Lhermitte), 레가메이 (G. Regamey), 도미에 (H. Daumier) 등의 영향을 받은 이유도 있지만, 기본 정신은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런던 근교의 아일워스에서 교회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화가가 되어 이웃의 모습을 화폭에 담을 때까지 상존했던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다정한 이웃’이 되는 것이었다.

빈센트는 네덜란드 출신의 동료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Anthon van Rappard)에게 삶의 신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산다는 것, 곧 생명을 주고 새롭게 하고 회복하고 보존하는 것, 불꽃처럼 일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하게, 쓸모 있게,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 것, 예컨대 불을 피우거나 아이에게 빵 한 조각과 버터를 주거나, 고통받는 사람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는 것이라네.”

빈센트의 이 말에는 기독교적 애린(愛鄰·이웃을 사랑함) 정신이 내포돼 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정신은 후대 작가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문화의 부패를 막는 방부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애린 정신은 우리나라 몇몇 작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터치, 조혜경, 캔버스에 유채, 2022.

▲터치, 조혜경, 캔버스에 유채, 2022.

먼저 조혜경의 <터치>는 빈센트의 일명 ‘시엥(클라시나 마리아 오니크)’을 모델로 한 것이다. 화면에서는 고달픈 듯 허리를 숙이고 있는 시엥의 실루엣을 엿볼 수 있는데, 작가가 노모와 자녀를 부양하는 창부 시엥을 등장시킨 것은 오늘날 어둡고 구석진 곳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조명하고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다.

우는 자와 함께 하는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머물고자 하는 마음의 선율이 잔잔히 울려퍼진다. 빈센트가 상처입은 자와 함께 했듯, 조혜경은 <터치>를 통해 상한 갈대처럼 고통받는 사람들과 동행하기를 원하며 우리에게 누가 오늘날의 ‘시엥’인지 질문을 던진다.

김정희의 <풀숲 속에서>는 수풀에서 만나는 고양이를 테마로 하였는데, 이는 온갖 위험과 난관 속에서도 삶을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에서 고양이는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잔뜩 긴장하며 주위를 경계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작고 연약한 존재에 대한 돌봄을 암시하고 있다.

▲흘려보내는 자, 정경미, 영원의 돌림노래, 2022.

▲흘려보내는 자, 정경미, 영원의 돌림노래, 2022.

정경미의 <흘려보내는 자>는 사지에서 돌아온 기구한 여성의 삶을 기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화면에는 꽃물이 얼룩져 있는데, 이것은 꽃다운 나이에 타국에 끌려가 온갖 수모를 받아야 했던 슬픈 인생을 기리는 동시에 눈물로 여생을 지새워야 했던 한 그리스도인의 곡절 많은 인생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작가는 소녀 시절 가수가 꿈이었던 할머니가 부르는 구슬픈 노래가 ‘영원의 돌림노래’가 되어 멀리 퍼지기를 바란다. 그의 작품은 “긍휼은 고요히 내리는 비처럼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다 함께 축복한다”는 세익스피어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최진희의 작품에는 허름한 옷차림의 인물들이 릴리프 형태로 등장하는데, 그들은 팔장을 끼거나 먼 곳을 응시하거나 시름에 빠져 있다. 그의 <홀로서기>는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 시대의 초상일 수도, 밀려드는 업무에 지친 사람일 수도, 목적지를 잃은 사람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최진희는 상하고 깨진 인간의 표현을 통해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이의 뜻을 추정케 만든다. 네 작가들은 그림을 통해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알리고 소통하고 있다.

근래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개인주의와 물질주의가 어느 때보다 팽배하다. 그에 반해 공동체와 나눔에 대한 인식은 날로 위축돼 간다. 목전의 이익 추구가 높은 가치의 추구를 압도하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생명을 경시하고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의 삶을 환기시키는 것은 충분한 의미가 있으며, 이들 작품의 메시지가 우리 사회의 구성원에게도 널리 인식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의 본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마 22장). 우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것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 ‘섬김과 돌봄’을 중핵으로 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아닐까?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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