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없이, 풍경화로 예수님 고난 표현한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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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록, 한 점의 그림] <노란 하늘과 해가 떠 있는 감람나무>

자연, 반 고흐에게 의미 내용 전달 간접적 매개물
무자비한 태양에서 달아나려 안간힘 쓰는 나무들
십자가 고통 감내하신 예수 그리스도 떠올리게 해
고난받는 종 따르고자 했던 빈센트 기도처럼 읽혀

▲에밀 베르나르, 올리브 정원의 그리스도, 캔버스에 유채, 1889.

▲에밀 베르나르, 올리브 정원의 그리스도, 캔버스에 유채, 1889.

빈센트 반 고흐에게는 파리의 코르몽(Fernand Cormon) 화실에서 만난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라는 동료 화가가 있었다. 아를에서 화가 공동체를 같이 꾸리고 싶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베르나르는 1880년대 후반 인상주의와 점묘법을 섭렵한 뒤 명암이나 입체감이 느껴지지 않는 색면과 굵은 윤곽선을 토대로 한 ‘클루아조니즘(Cloisonnisme)’이라는 회화 기법을 창안한 화가이기도 했다.

베르나르는 1889년 신작 ‘올리브 정원의 그리스도’를 사진으로 찍어 빈센트에게 보내주었다. 그림은 기도하는 그리스도를 체포하러 오는 로마 군인들과 선두에 선 유다를 그린 것이었다.

베르나르는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깊이 잠에 빠진 제자들을 배치했는데, 형태를 변형시키고 압축시키며 배경을 평면화시키는 등 새로운 시도를 꾀하였다.

이에 대해 빈센트는 냉담한 반응을 보냈다. 베르나르가 보낸 작품 사진은 “실제로 관찰한 것은 전혀 담고 있지 않아 내 신경을 긁었다(1889. 11-12월)”고 심경을 토로한 다음, “그 그림의 문제는 일종의 꿈, 그것도 악몽이라는 데 있어. 그림들이 너무 현학적이야. … 솔직히 그런 그림은 영국의 라파엘 전파가 훨씬 더 잘 그렸어”(1889. 11-12월)라며 실망감을 나타냈다.

빈센트는 종교적 그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빈센트는 오래 전부터 자연적 형태를 이용하여 은유적 표현을 하는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곡식 다발, 씨뿌리는 사람과 수확하는 사람, 별이 빛나는 밤, 죽음과 부활의 이미지인 밀밭, 잘려나간 나무 등은 그가 기독교적인 삶을 회화에 담기 위해 얼마나 숙고했는지 알려준다.

자연은 단순히 아름다운 대상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때로 자연은 의미내용을 간접적으로 실어나르는 매개물이기도 했다. 빈센트는 감람나무를 그릴 때 베르나르가 도달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고뇌를 떠올렸고, 풍경화를 통해 예수님의 고통을 헤아리는 것이 가능하리라 보았다.

▲빈센트 반 고흐, 노란 하늘과 해가 떠 있는 감람나무, 73.6 x 92.7cm, 캔버스에 유채, 1889. 미네아폴리스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

▲빈센트 반 고흐, 노란 하늘과 해가 떠 있는 감람나무, 73.6 x 92.7cm, 캔버스에 유채, 1889. 미네아폴리스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

<노란 하늘과 해가 떠있는 감람나무>(1889)는 베르나르의 그림이 자극이 되어 탄생되었으나, 이전에 일찍이 본 적이 없었던 회화를 탄생시켰다.

그는 모두 15점의 감람나무를 그렸는데 처음에는 미묘한 색상과 빛의 반사가 조화를 이룬 그림을 그렸다. <알프스를 배경으로 한 감람나무>에서는 “선하고 아름다운 아름다움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1889. 6)고 했다.

그러나 감람나무의 밝은 측면은 점차 줄어들고 진중한 성격을 띠게 된다. 나무들은 고통스럽게 뒤틀리고 얽히면서 전체적으로 긴장된 감을 지닌다. 여기에다 휘몰아치는 붓질과 대담한 색깔과 두꺼운 물감층은 그러한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노란 하늘과 해가 떠있는 감람나무>에서 나무들은 무자비한 태양으로부터 달아나려 안간힘을 쓰나,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나무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포획하고 있다. 감람나무들은 이글거리는 햇빛과 씨름하며 그 자리를 가까스로 지키고 있다.

이같은 화면의 전체 흐름은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셨던 예수님을 떠올리게 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닥쳐올 수난에 관하여 아버지께 기도 드렸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 22:42).

예수님의 고뇌가 얼마나 심했던지,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았다고 기록하였다. 잔을 피하려고 하셨지만 결국 피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가장 진실하고 깊은 열망은 아버지의 뜻을 이뤄드리는 것이었다. 빈센트의 은유적 형상화가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풍경화인 듯하면서도 이러한 성경의 사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동산의 이야기는 빈센트의 그림 속 감람나무들이 왜 뜨거운 햇살 아래 시련을 받고 있으며 그림자가 나무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지, 뒤틀린 가지와 울퉁불퉁한 껍질, 그리고 옹이들이 왜 나무에 새겨져 있는지 말해준다.

빈센트는 그림이 성경의 친절한 도해(圖解)가 되기보다 성경 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려면 적절한 표현 장치, 곧 은유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편 우리는 그의 그림이 본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평가되는 것을 본다. “반 고흐는 감람나무에서 모든 자연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영적인 힘의 발현을 발견했다. … 그들의 연속적인 리듬에 실려 있는 에너지는 거의 물리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제공하는 설명에 따르면,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영적인 힘’이며 ‘에너지’이다. 이 안내문에는 빈센트가 왜 이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한 기술이 빠져 있다. 자연의 이미지를 빌어 의미 내용을 말했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겠지만, 빈센트의 화의(畫意)가 고려되지 않는 해석은 그의 작품을 왜곡시킬 수 있다.

겟세마네 동산은 빈둥거리며 돌아다니는 산책길이 아니다. 빈센트가 이곳을 위로는커녕 안정감이 없게 묘출한 것은 이곳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별개로 생각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그가 주목한 것은 ‘위풍당당한 예수’가 아니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한 ‘위대한 슬픔의 인간’(1878. 12. 26)이었다. 그런 빈센트에게 겟세마네 동산과 그속의 감람나무의 이미지는 각별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생사의 기로에 선 예수님은 깊은 고뇌에 사로잡히셨다. 몇 해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도 직면한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빈센트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그리기보다 감람나무와 과수원을 택한 것은 “실재하는 겟세마네 동산을 직접 그리지 않고도 고뇌를 표현할 수 있을 것”(1889. 11. 20)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작렬하는 태양의 황금빛 햇살 아래 자리를 지키는 나무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말해준다. 나무는 부서지고 타는 듯한 괴로움을 견디어내고 있다.

그런데 나무들의 자세가 독특하다. 나무들은 하나같이 위를 향해 가지를 내뻗고 있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향하여 가지를 뻗고 있는 나무의 이미지는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빈센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심이 깊어졌고, 공감의 용량도 커졌다. 필자에게 <노란 하늘과 해가 떠있는 감람나무>는 고난받는 종의 발걸음을 따르고자 했던 빈센트의 기도처럼 읽힌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님이 기뻐하실 수만 있다면 제 영혼을 거룩한 비통함으로 채워주소서. 슬픔의 사람, 고통을 아시는 주님이시여, 저는 일생을 바쳐 당신을 섬기겠습니다.”(1877. 10. 30)

이 기도문은 예수님의 슬픔을 깊이 이해하였던 빈센트의 작품 배경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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